〈 127화 〉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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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섹스 이후에 몰려드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만 자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알람을 맞춰두었으니 세상모르고 잘 일은 없을 것이다.
다들 동물잠옷으로 갈아입으니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특히나 눈표범족인 라우라가 눈표범잠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본 우리들은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말을 쏟아냈다.
그러자 평소에 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이끄는 입장이 많았던 라우라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수줍어했다.
우린 잠시 웃고 떠든 뒤에 깨끗한 시트로 갈아끼운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날 중심으로 누워서 각자 내 오른팔과 왼팔을 차지했고 에리카는 나와 이리스 사이로 끼어들어서 내 허리를 껴안았다.
예전에는 하렘멤버는 얼마든지 늘려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앞으로 한 명만 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이득과 효율성만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예쁘고 쓸 만한 노예를 구입해서 예속퀘스트를 활성화시켜 특수스킬을 뽑아내면 된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날 사랑하고, 또 내가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짓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행복한데 굳이 남들 괴롭히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내게 의지하면서 곤히 잠든 애인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짜증나게도 금방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분명 몸은 피곤하다고 징징거리는데 정신은 말짱해졌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대로 누워 있다가 알람이 울리면 애들 깨우자.’
나는 다른 사람들을 깨울까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눈만 보이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바로 내 사랑들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제법 오랫동안 라우라와 이리스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한 적이 없어서 한 번 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라우라는 안 보는 사이에 레벨이 나처럼 51까지 올랐고, 그 대가로 3개의 특수 포인트를 추가로 얻었다.
나는 2개는 마력에 투자해서 A랭크로 만들고 마력순환의 스킬레벨을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1개는 지구력에 투자해서 C랭크로 만들었다.
라우라가 가진 스킬들의 레벨은 어느새 모두 10에 도달한 상태였지만 추가스킬을 얻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건 나처럼 이세계인이 가진 특권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리스를 살펴보니 그녀의 레벨 또한 나와 같은 51이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뭔가 이상해서 설명을 찾아보니, 원래 인류는 레벨 상한선이 50으로 제한되어있다.
하지만 난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최고레벨인 100까지 올릴 수 있다.
따라서 내게 절대예속된 노예의 경우에 레벨이 한계치인 50에 도달한 시점부터 나와 레벨이 연동된다.
또한 내게 남는 특수 포인트가 생기면 절대예속 대상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고 하니 정말 편리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리스 역시 특수 포인트 3개가 누적되었고, 나는 그걸 모두 지구력에 투자해서 A랭크로 올렸다.
마지막으로 에리카의 스테이터스를 살펴보았다.
일단 에리카는 절대예속을 비롯해서 예속퀘스트가 달성되면 주어지는 패시브 스킬들을 모두 얻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에리카의 특수 포인트 1개는 마력에 투자해서 D랭크로 만들어주었다.
에리카는 아직 전투스킬의 레벨이 많이 낮은 편이지만 이건 에리카의 경험과 노력에 따라서 금방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태창을 내 눈앞에서 치우기 전에 잠깐 내 스킬창으로 들어가서 에리카의 예속퀘스트 활성화로 얻은 특수스킬을 확인했다.
‘날개 길들이기 스킬이라? 마음에 드는 걸.’
사실 나는 당연히 말과 관련된 특수스킬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폭 넓은 활용성을 가진 특수스킬을 얻으니 기분이 좋다.
날개 길들이기 스킬은 스킬레벨에 따라서 특정한 종류의 날짐승을 한 마리씩 길들이고, 그렇게 길들인 동물이 어디에 있든 간에 바로 내 곁에 소환할 수 있는 스킬이다.
이러한 특수스킬을 얻게 된 이유는 에리카가 뱀파이어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뱀파이어족은 매사냥을 즐기는 종족이니 내게 날짐승을 길들이는 특수스킬이 주어지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에리카도 처음부터 동족과 함께 전통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쯤 매를 한 마리 어깨에 얹고 다녔을 것이다.
‘언젠가 에리카의 뿌리를 찾아주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거 뭔가 드론소환스킬이랑 느낌이 비슷한 걸.’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개 길들이기 스킬과 드론 소환 스킬의 공통점은 소환물에 시야공유를 쓸 수 있다는 것 하나 뿐이다.
반면에 차이점은 제법 많다.
장점을 보자면 처음부터 소환시간에 제한이 없고, 드론보다 소음이 적으며,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점은 살아있는 생물이니 평소에 관리를 해줘야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론이야 파괴되면 그만이지만 정을 준 동물이 죽어버리면 마음이 엄청 아플 것 같다.
지금은 매나 수리 같은 주행성 맹금류를 길들일 수 있고 2레벨은 부엉이처럼 야행성인 맹금류를 길들일 수 있다.
그리고 3레벨은 날지 못하는 육식조류인 공포새, 4레벨은 아예 조류가 아닌 익룡을 길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녀석들은 분명 내가 이 세상에 추가한 적이 없는 동물들이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개입을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는걸.
뭐, 멸종된 동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만든 설정이겠지.
마물 같은 괴생물체가 아닌 이상에야 심각할 거 없어.
그렇다면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것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섭지만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최고레벨인 5레벨에 도달하면 무려 와이번을 길들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와이번을 길들인다면 그걸 타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겠지?
아, 벌써 기대된다. 최대한 빨리 스킬레벨을 올릴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내가 기대감에 차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갑자기 스마트폰의 흥겨운 알람소리가 울렸다.
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오래 잤던 것 같다.
나는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내 사랑들을 깨웠는데, 기특하게도 다들 잘 일어나주었다.
그리고 내게 차례대로 키스를 해주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우리는 다 함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호텔에서 나왔다.
바깥에는 우리처럼 해맞이를 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움직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인류연합제국에서는 해맞이를 중요한 전통으로 여긴다.
보통은 도시 밖의 특정장소를 정해놓고 그곳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꼭두새벽부터 기사단이나 제국군이 해맞이장소까지 촘촘하게 경계근무를 서면서 길안내를 한다고 한다.
또한 수도에서는 아예 황제가 직접 가장 해가 빨리 뜨는 바닷가에 가서 해맞이를 주관할 정도로 행사규모가 크다.
리제르카 사람들은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에서 해맞이를 한다고 한다.
산은 별로 높지 않지만 주변이 대부분 평지라서 일출을 보기 좋았고, 꼭대기가 널찍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은 그 산이 아니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우리끼리 오붓하게 해맞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한 장소가 바로 이리스가 다리우스 용병단을 저격했었던 버려진 탑이다.
탑의 높이가 상당하고, 해가 뜨는 방향으로는 키 작은 나무들로 구성된 숲이 펼쳐져서 일출을 보기 좋은 곳이다.
사전답사를 했을 때 보았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숲은 마치 초록색 바다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었다.
우리는 인파에 섞여서 성문 밖으로 빠져나온 뒤에 슬쩍 경로를 이탈하여 버려진 탑으로 향했다.
한 때 다리우스 용병단이 우리에게 패배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던 공터는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평범한 야영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여기서 얻은 금괴 덕분에 이렇게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그 당시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다.
이젠 좀 더 안전하고 속편한 돈벌이가 아니면 쳐다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뭐, 이렇게 말해놓고는 결국엔 그런 골치 아픈 일에 간단하게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긴 하다.
우리가 탑에 도착했을 때는 저 멀리서부터 새벽녘의 어스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탑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는 아예 인공적인 조명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변이 충분히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그것의 붉은 기세 또한 관측되지 않았다.
이 세상의 해가 내가 아는 태양과 같은 항성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이질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달은 거의 두 배는 더 크게 보여서 이 세상이 지구와는 확실히 다른 곳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레베카님, 커피 드세요.”
“고마워.”
나는 그새 이리스가 끓여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받았다.
보온병을 써도 될 텐데 굳이 나를 위해서 바로 커피를 끓여주는 이리스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리스는 나뿐만 아니라 라우라와 에리카에게도 따뜻한 차와 커피를 내주었다.
마치 철없는 남편을 챙겨주는 아내이자,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엄마처럼 느껴진다.
라우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스트레칭을 이어나갔다.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아침에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는 게 전부이고 그녀가 운동을 시킬 때나 열심히 움직이는데 말이다.
라우라는 내 시선을 눈치 채고는 나를 향해 조금 무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베카님, 올해는 더 건강한 몸으로 만들어드릴게요.”
“그, 그래? 그것 참 고마운 일이네. 하하하...”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처럼 무리하는 일이 없도록 스케줄을 조절해드릴 테니까요.”
나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새파란 눈빛에 사로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노예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주종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하질 못하겠다.
한편 에리카는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호호 불면서 식히느라 제법 오랫동안 커피를 맛보지 못했다.
시험 삼아서 커피에 입을 대어보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아예 스마트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어버렸다.
그러다 나는 에리카와 눈을 마주쳤고, 에리카는 부리나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렌즈를 손으로 막았다.
“앗! 레베카님, 이런 걸 왜 찍으세요?”
“뭐 어때서 그래? 엄청 귀여운 걸.”
“그, 그렇지만 성인이 애들처럼 뜨거운 것도 잘 못 먹으면 부끄럽잖아요.”
“괜찮아. 성인이라고 뭐든지 강해지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럼 제대로 예쁜 모습을 찍어주세요.”
에리카는 렌즈를 막았던 손을 치우고 깜찍한 포즈를 취했다.
아무래도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에리카가 이리저리 포즈를 바꾸는 모습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담았다.
“레베카님, 나중에 저도 보여주세요.”
지나가던 이리스는 내가 동영상을 찍는 걸 슬쩍 보더니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제 에리카도 텔레파시를 쓸 수 있으니 비밀이야기는 귓속말이 최고였다.
에리카에게는 효과가 좋았지만 라우라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보니 청각이 뛰어난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이리스, 이따가 따로 보여줄게. 아, 이제 슬슬 해가 뜨려나봐. 저쪽이 불그스름해졌어.”
나는 이제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평선과 그 너머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붉은 기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새로운 세상의 태양은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이글거리는 불꽃과 함께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에리카를 뒤에서 안았고, 라우라와 이리스는 양 쪽에서 나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일출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가 뜨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봤었지만 오늘처럼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처음 마음 놓고 보는 일출이라서 그건 거겠지.
“얘들아, 올해도 잘 부탁해. 난 너희들을 만나서 정말 행복해.”
나는 눈가가 촉촉해져서는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고, 내 사랑들은 다함께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애써 손으로 훔치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걸 참아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여자의 몸이 된 이후로 감정을 통제하는 게 예전처럼 쉽지가 않아졌다.
인간은 결국 호르몬과 전기신호의 지배를 받는 생체기계일 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니컬한 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지.
“다들 고마워. 이젠 너희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못하겠어.”
“그건 저희들도 마찬가지에요. 저만 하더라도 레베카님 덕분에 살 수 있었으니까요.”
라우라는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면서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리스도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맞아요. 저도 레베카님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하기 싫어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울지 말고 웃어주세요.”
에리카는 그 말과 함께 내게 키스를 해주었다.
정말이지 날 웃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에리카에 이어서 이리스와 라우라에게도 연달아 키스를 했다.
곧 태양이 머리 위로 완전히 떠올랐고, 세상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마치 내 마음 속 어둠마저 싹 거두어지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머리가 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레베카님,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좋아. 원래 떠오를 때 찍었어야 했는데 내가 우는 바람에 망쳐버렸네. 다들 미안해.”
“에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사진보다 레베카님이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요.”
라우라는 나보다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리스가 반대쪽 손을 잡았고, 에리카는 내 앞에 살짝 기대어서 라우라와 이리스의 손을 동시에 잡았다.
나는 드론을 동원해서 사진을 찍었고, 한참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탑을 떠날 생각을 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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