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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18화 (118/271)

〈 118화 〉 117화

* * *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드리나무에 기대고 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고, 힘이 풀렸던 다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곧 에리카의 고혹적인 눈과 마주쳤다.

“레베카님, 잘 주무셨어요?”

“응. 다른 애들은?”

“제 옷을 빨아주겠다고 근처의 개울가로 갔어요.”

나는 에리카의 말을 들은 뒤에야 그녀가 아까와는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친구를 위해서 피 묻은 옷을 빨아주는 라우라와 이리스가 참 기특하다.

“원래 제가 하려고 했었는데 굳이 자기들이 해주겠다지 뭐예요.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에요. 그래서 전 걔들 대신에 레베카님의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여긴 말들을 풀어놓았던 곳 근처 같은데 말들은 다시 찾았니?”

“네, 저쪽에 메어두었어요.”

에리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4마리의 말들이 4그루의 나무에 각각 고삐가 묶여있었다.

녀석들은 느긋하게 풀을 뜯으면서 출발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도망을 치지 않고 다시 모인 게 신기하네.”

“제하트가 대장 역할을 잘해서 그래요.”

“그래? 가서 칭찬을 해줘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켠 뒤에 제하트에게 다가가 녀석에게 에리카가 늘 들고 다니는 신선한 당근을 먹여주고 몸을 전용솔로 빗어주었다.

그러자 제하트는 기분 좋은 듯 울음소리를 한 번 내더니 큰 머리를 나한테 들이대면서 친근감을 표시했고 나는 목을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제 말을 다루는 손길이 아주 능숙해지셨군요.”

“겨우 적응한 단계야. 네가 하는 일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봐.”

“다른 일들은 거의 다 허드렛일이니까 레베카님이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너만 고생시킬 수는 없잖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와주면 서로 좋다고 생각해.”

“말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절 받아들이셨으니까 마음 놓고 맡기셔도 돼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도 지금은 소중한 내 애인인걸.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면 벌써 그만두게 했을 거야.”

나는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리카에게 있어서 말을 돌보는 일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서 궂은일이라는 이유로 못하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손이 부르트는 일이 없도록 특수상점에서 파는 핸드크림을 챙겨주거나 직접 발라주기도 했다.

물론 라우라와 이리스에게도 그런 것들을 잔뜩 챙겨주고 있기 때문에 차별대우는 아니다.

“레베카님, 예전부터 라우라와 이리스가 왜 노예로 살면서도 만족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요즘에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신분에 관계없이 언제나 보물처럼 소중하게 아껴 주시니까요. 그래서 굳이 신분해방이 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난 에리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절대예속 패시브스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지만 난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난 에리카를 상대로도 예속퀘스트를 진행할 예정이기 때문에 라우라와 이리스가 노예 신분으로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아직 에리카는 호감도가 4에 머무르고 있어서 괜히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음란도가 6으로 오른 대목은 내 관심을 많이 끌었다.

처음 그녀와 섹스를 한 이후로는 키스 이상으로 뭔가를 한 적이 없었는데 왜 오른 걸까?

호감도가 5까지 오를 정도는 아니라도 나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 걸지도 모르겠다.

겸사겸사 레벨과 스킬을 살펴보니, 레벨은 8에서 14로 올랐고, 총기사격 말고도 신속조준과 제압사격, 고속장전 스킬을 얻었다.

내가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처럼 사격과 관련된 스킬을 빠르게 얻는 모습을 보니 절로 뿌듯해졌다.

이리스가 잘 가르쳐 주고 에리카가 그대로 잘 따라준 덕분이겠지.

나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몸으로 체득하지 않고 안전하게 배우는 걸 보니 조금 부럽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땐 내가 굉장히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것 같다.

다짜고짜 처음 만나는 괴물들에게 달려들어 싸우다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레베카님, 제가 뭔가 말을 잘못한 건가요?”

“응?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네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이것저것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군요. 그럼 민감한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괜찮으니까 말해봐.”

에리카는 내 허락을 받았는데도 우물쭈물하면서 망설이더니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내게 말했다.

“라우라랑 이리스가 한 피어싱 말인데요. 특별한 기능이라는 게 뭔가요?”

“아, 그거? 평생 늙거나 병들지 않는 거야. 대신에 한 번 장착하면 평생 뺄 수가 없어.”

난 겉으로는 태연하게 설명했지만 속으로는 참기 어려운 기쁨을 느꼈다.

에리카가 자기 입으로 직접 피어싱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곧 그녀의 호감도가 5에 도달할 거라는 신호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레베카님이 그걸 착용하지 않으신 이유는 다시는 뺄 수 없기 때문이신가요?”

“착용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날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내가 섹스를 할 때 요구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주는 거라서 그래. 듣기엔 애매한 조건이지만 난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를 알 수 있어.”

“그렇다면 전 아직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레베카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거군요.”

에리카는 아쉬움과 섭섭함,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힌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속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피어싱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볼게요. 그리고...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레베카님에게 더 많은 사랑을 드리도록 노력할게요.”

“넌 이미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단지 우리가 만난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짧을 뿐이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고, 그만큼 기회도 많으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정말 행복해.”

나는 에리카를 포옹해서 그녀의 체온을 만끽한 뒤에 그녀에게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에리카의 몸을 더듬지 않고 오직 그녀의 입술에만 집중했고, 그녀가 숨을 쉬기 어려워할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크게 흥분한 나는 젖꼭지가 빳빳하게 서는 게 느껴졌고, 내 가슴에 닿는 에리카의 작은 가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유두가 민감한 에리카는 내 가슴에 자신의 그것이 닿을 때마다 야릇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키스를 나눈 뒤에 에리카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에리카는 무심코 내 입술을 쫓다가 안타까워하는 숨을 내쉬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런 에리카를 안고서 한참 동안을 서있었고 그러는 동안에 라우라와 이리스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얘들아, 어서와. 빨래한다고 고생했어.”

나는 두 사람보다 먼저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은 내 곁으로 다가와서 가벼운 키스로 화답했다.

이리스가 들고 있는 빨래바구니에는 깨끗해진 이리스의 옷이 젖은 채로 들어있었다.

그래도 물기를 최대한 짜서 그런지 바구니에서 물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는 어떠세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그땐 심리적인 요인이 컸던 것 같아.”

“다행이네요. 혹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 다쳤을까 걱정했었어요.”

“만약 그랬더라면 아파서라도 잠을 잘 수 없었을 거야. 너랑 라우라가 둘이서 날 업어준다고 고생 많았어. 아참! 내가 다리를 주물러줄게. 사양하지 말고 이쪽으로 앉아.”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에 이끌었다.

딱히 차례를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의 순서대로 라우라가 먼저 앉았다.

그리고 나는 라우라의 발치에 앉아서 정성을 다해서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운동을 많이 한 튼튼한 다리라서 그런지 안마를 할 때 힘이 제법 많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라우라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나도 기뻐서 힘든 줄도 몰랐다.

“고마워요, 레베카님.”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제 전 충분하니까 이리스를 주물러주세요.”

“발마사지까지는 해주고 끝낼게.”

나는 라우라의 발바닥까지 확실하게 서비스를 해준 뒤에 이리스의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라우라보다 다리가 말랑말랑한 편이지만 어느 정도 운동을 한 사람이라서 건강미가 물씬 느껴졌다.

그녀 역시 라우라처럼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고, 내가 발마사지를 해줄 때는 간지럽다면서 깔깔거리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종아리와 허벅지를 안마해주는데 집중했다.

“레베카님은 다른 사람에게서 안마하는 법을 배우셨나요?”

“배웠다기보다는 어깨너머로 보고 따라하는 거야. 반쯤은 그냥 손을 막 움직인다고 하는 게 맞을 걸?”

“그래도 덕분에 다리의 피로가 확 풀렸어요. 고맙습니다.”

이리스는 내가 안마를 끝내자 내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도 나에게 다가와서 반대쪽 볼에 뽀뽀를 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에리카, 네 차례야.”

“제가요? 전 레베카님을 업어드리지도 않았고 딱히 전투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너만 해주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돼. 그러니까 얼른 와서 앉아.”

“네, 레베카님.”

에리카는 내 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다리는 말랑말랑하고 약한 편이라 내가 조금만 힘을 세게 주어도 아파했다.

그래서 나는 힘 조절에 신경을 쓰면서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마를 해주었다.

발마사지를 해줄 때는 조금 간지러워하기는 했지만 이리스처럼 자지러지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에리카 역시 내가 안마를 끝내자 볼에 뽀뽀를 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니 정말 뿌듯하고 보람이 넘쳤다.

그럼 이제 제르디아로 돌아가서 가르탱에서 청구서를 내밀어야겠다.

우리는 말에 올라타고서 제르디아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대폭발이 일어난 협곡의 입구 쪽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마어마하게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 파견되었는지 모를 기사단원들은 사람들이 협곡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지만 그들이 바쁜 틈을 타서 몰래 내부로 진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혼란상을 보면서 왠지 내 책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엘카힘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겼다.

그리고 제하트를 재촉해서 더 빨리 제르디아로 돌아가려는 순간에, 멀찍이서 익숙한 마법갑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바로 내 친구 가르탱이었다.

전속력으로 뛰어오던 가르탱은 나를 보자마자 속도를 줄이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투구를 벗었는데, 날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레베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다친 곳은 없어?”

“우린 다 괜찮아. 폭발에서 벗어나느라 마법갑옷이 완전히 박살나긴 했지만 말이야.”

“미안하다. 내가 준 정보 때문에 네가 죽을 뻔 했어.”

가르탱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본의 아니게 친구를 사지로 몰아넣은 입장에선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내가 보여야 할 태도는 관대함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지 뭐. 함정을 예상하긴 했었지만 설마 기지를 통째로 자폭시켜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나도 그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짐작도 못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 마법갑옷은 내가 책임지고 고쳐주거나 아예 새 것을 마련해줄게.”

“정말?”

“넌 명예기사니까 문제될 거 없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예비용 경량 마법갑옷도 챙겨줄게. 대충 3벌 정도면 되겠지?”

가르탱은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사랑들의 안위에도 신경을 써주는 친구의 태도가 참 고맙다.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고맙지. 아, 그리고 시설이 폭발하기 전에 인면어들을 시설로 돌아오게끔 명령했었는데 지금도 그 명령이 유효한지 모르겠어.”

“그건 우리 쪽에서 주변의 물길을 확인해보도록 할게. 네 말대로 모여들고 있다면 한꺼번에 처리할 좋은 기회겠지.”

가르탱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그는 나보다도 인면어를 질색하는 친구였는데, 인면어의 대량번식으로 죽은 백성들이 너무 많아서 싫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네. 그런데 가르탱, 혹시 네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마법공학자가 있어?”

“몇 명 정도 있어. 수도에도 있고.”

“그럼 파편이랑 내 설명만으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마법도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음... 마침 영주님의 저택에 손님으로 머무르는 분이 있어. 좀 별난 분이긴 하지만 실력은 확실해.”

“그래? 나 좀 소개시켜주라.”

내 부탁을 들은 가르탱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라서 사적으로 만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뭐? 그 사람 아니, 그 분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네가 말하는 조건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그 분 밖에 없어.”

“그, 그래? 하하하, 황녀님이라니 그것 참 부담스럽네.”

“일찌감치 황위계승을 포기하신 분이니까 너무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그리고 나랑 그 분은 사관학교 동창이고 친분이 있는 편이니까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볼게.”

가르탱은 은근히 자랑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하긴 단순한 황족도 아니고 황제의 딸과 인맥이 닿는데 자랑할 만도 하지.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얼른 말해봐.”

“네가 고생을 하는 동안에 프리실라가 건강한 딸을 낳았어.”

“정말? 진짜 잘 됐다!”

프리실라가 무사히 출산했다는 소식에 나는 물론이고 내 사랑들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박수까지 쳤다.

“내일 나랑 같이 병원에 가볼래?”

“그거 좋지.”

“그럼 내가 지금 일을 수습하고 연락을 할게.”

“알았어. 수고해.”

나는 가르탱과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한 뒤에 내 사랑들과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르디아로 돌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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