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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14화 (114/271)

〈 114화 〉 113화

* * *

기사단 본부 습격사건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느긋하게 지냈지만 그저께 오전에 일어났던 일은 상당히 불쾌했었다.

제르디아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노먼의 저택으로 찾아와서는 사방에 고함을 지르며 분풀이를 했었다.

영주는 노먼의 뺨을 몇 번이고 강하게 후려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노먼은 저항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뺨을 내주었다.

그 큰 덩치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맞았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신분차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참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영주가 그렇게까지 분노를 표출했던 이유는 본인이 직접 노먼을 단장대리로 앉혔는데 그가 적에게 놀아나는 추태를 보여서 체면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 기름진 주둥이에서 체면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영주는 이번 사태는 본인의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중대한 사태를 무려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야 인지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뒷수습을 할 생각보다 분풀이가 먼저인 영주의 행동 자체가 스스로의 체면을 더 많이 깎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프리실라가 남편이 마구잡이로 얻어맞는 장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프리실라는 마침 그날 새벽에 갑자기 진통을 느껴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지금도 입원한 상태다.

노먼은 그녀를 따라서 병원에 갔다가 영주가 온다는 말에 허겁지겁 저택으로 돌아왔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영주가 떠난 뒤에 퉁퉁 붓고 피멍이 든 노먼의 얼굴을 치료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마음 놓고 프리실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난 노먼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엘카렌의 수작질에 넘어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일부 제공했다.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고 둘도 없는 친구를 미워하고 나까지 함정에 빠뜨릴 뻔 했다.

하지만 나는 프리실라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그에게 선심을 써줬다.

노먼은 나에게 고개 숙여서 감사를 표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아내의 곁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어제는 잠시 프랑카로 돌아가서 루드비히의 장례식을 치렀다.

우리만 참가하는 작고 조용한 장례식이었지만, 에리카는 내 덕분에 루드비히가 고향에 묻힐 수 있었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었다.

에리카는 나에게 섹스를 포함해서 뭐든지 해주고 싶어 했지만 난 당분간 그녀와 섹스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키스로 만족했다.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지 에리카와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다.

그리고 에리카는 장례식이 들어간 비용을 걱정했었지만 내 입장에선 충분히 돈을 쓸 가치가 있는 일이라서 그냥 웃고 말았다.

‘다음 도시에서는 장례식을 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네. 가는 곳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정말 우울할 거야.’

내가 잠시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는 사이에 라우라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라우라는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내 허벅지 위에 앉아서 나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쓰다듬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스르륵 넘기더니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갑작스럽지만 언제나처럼 반가운 라우라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서로의 혀가 얽히면서 느껴지는 열기에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당장에라도 보지가 젖어버릴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입술을 떼어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지금 당장 분위기를 타서 섹스로 넘어가기엔 시간이 부족해서다.

나는 못내 아쉬워하는 라우라를 꼭 끌어안고서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라우라, 미안하지만 오늘은 참아주라.”

“물론이죠. 레베카님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눈치 없이 섹스를 요구하면 민폐잖아요.”

“방금 그렇게 아쉬워했으면서?”

“어떤 일이든 레베카님이 최우선이니까요.”

라우라는 그 말을 하면서 나에게 얼굴을 비비며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살살 만져주면서 그녀를 귀여워해주었다.

라우라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엄청 좋은 모양이다.

실컷 내 손길을 즐긴 라우라는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내 품에서 벗어났다.

“레베카님, 우리 이제 나갈 준비를 하도록 해요. 약속시간에 늦으면 곤란하잖아요.”

“시간 참 빠르네. 이리스랑 에리카는?”

“밖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있을 거예요.”

에리카는 습격사건 이후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데 열중하고 있다.

루드비히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에리카를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에리카의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면 그녀를 위한 총기세트를 주문제작하도록 해야겠다.

“둘 다 부지런하네.”

“오늘은 레베카님이 게으름을 피우시는 거라고요. 조금만 덜 사랑스럽게 늦잠을 주무시고 계셨더라면 바로 깨웠을 텐데 말이죠.”

“덕분에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어.”

나는 라우라가 잔소리를 하지 못하게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틀어막았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내 혀에 자신의 혀를 얽어매었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나서, 라우라는 내 가슴팍에 몸을 기대었다.

“키스로 무마하려고 하시다니 치사하세요.”

라우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나랑 키스를 몇 번을 해도 처음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라우라가 너무 사랑스럽다.

“너무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서 자주 쓰게 되는 거 있지. 그래도 네가 진지할 때는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쓰진 않잖아.”

“레베카님은 언제나 저를 존중해주셔서 좋아요. 히힛.”

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즐거워하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리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그녀와 에리카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넷이서 다 함께 외출준비에 나섰다.

오늘 잡혀있는 약속은 바로 가르탱을 만나는 일이다.

가르탱은 개인적으로 나와 내 사랑들을 모두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주었다.

뒷수습으로 바쁠 텐데 굳이 시간을 내서 우리를 초대한 이유는 그저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왕이면 감사를 받는 김에 적절한 보상도 받았으면 좋겠다.

저번 만남은 습격사건 때문에 마무리가 엉망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마음 놓고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마냥 좋은 일로 날 불렀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게 문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인 엘카렌을 내 멋대로 빼돌려서 처분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그 일로 추궁을 당하고 수사를 받을 기미가 보인다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할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가르탱의 개인적인 초대라서 연회에 참가하는 것처럼 드레스까지 차려입을 필요는 없고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린 옷이면 충분할 것이다.

내가 적당한 옷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고심하는 사이에 옆으로 다가온 속옷차림의 이리스는 나에게 팔짱을 끼면서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혹시 가르탱님이 레베카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요? 엄청 만나고 싶어 하던데 말이죠.”

“이리스, 가르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구애를 할 일이 없단다.”

“레베카님의 매력을 모르는 불쌍한... 아! 아하! 저희처럼 같은 성별을 좋아하는 군요?”

이리스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르탱을 상대로 위기감을 느꼈었는데,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으니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내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별 반응이 없으면서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 싶으면 경계하는 이리스가 귀엽다.

“그래. 그래서 우리가 다함께 발가벗고 덤벼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레베카님이라면 너무 좋아서 기절을 할 텐데요.”

“그러게 말이야. 하하하!”

나는 이리스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바보처럼 크게 웃고 말았다.

세 사람이 내 앞에서 알몸이 되어 유혹하는 걸 상상하니 지금은 없는 자지가 벌떡 서는 기분이 들었다.

“조만간 그럴 기회가 생기실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리스는 옆에서 이제 막 내가 사준 치마를 입은 에리카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러자 에리카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배시시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난 에리카의 눈을 보자마자 성욕이 팍 죽어버렸다.

아직도 그녀가 서럽게 울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런 것 같다.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착잡한 기분에 얼른 대화주제를 바꿨다.

“에리카, 사격은 할 만하니?”

“네, 이리스가 잘 가르쳐줘서 재밌어요.”

“다음에는 나도 같이 할까?”

“네! 그럼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에리카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가녀린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특수상점에서 실컷 운 이후로 줄곧 나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가 마구간 구석에 홀로 앉아서 훌쩍이는 모습을 우연히 본 뒤로는 해맑은 미소가 더욱 짠해보였다.

다시 만났다고, 이제 평생 헤어지지 말자고 생각했던 가족이 하루 만에 불미스러운 일로 죽어버렸으니 평생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을 테지.

그나마 모든 사태의 원흉인 엘카렌을 내 손으로 직접 끝장내서 에리카를 위한 복수를 해주어서 다행이다.

“레베카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응? 아, 아니. 네 치마가 정말 잘 어울려서.”

“레베카님이 저를 위해서 골라주신 옷이니까요. 레베카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입고 싶었던 예쁜 옷을 많이 입어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에리카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뱅그르르 돌면서 우아한 자세를 잡아보았다.

행동 자체는 그저 귀여워보였지만 그녀가 내게 보내는 고혹적인 눈빛에 귀엽다는 생각을 싹 잊고 말았다.

“앞으로도 가지고 싶은 옷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전 항상 받기만 해서 죄송스러워요.”

“받기만 하다니? 날 사랑해주잖니. 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이야.”

나는 나름 진지한 분위기를 잡으며 에리카를 향한 내 진심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들어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 라우라 때문에 모든 걸 망쳐버렸다.

“그래도 섹스로 보답을 받는 건 좋아하신단다.”

“라우라!”

나는 도망치려던 라우라를 붙잡고 그녀의 볼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얼굴이 망가지는 와중에도 실실 웃기만 했다.

어휴, 이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저, 저기 레베카님이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봉사를 해드릴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세요.”

“에리카, 진정해. 당분간은 그럴 생각이 없어.”

나는 당장에라도 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릴 것 같은 기세를 보이는 에리카의 양 어깨를 잡아서 말렸다.

그러자 에리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직 제가 서툴러서 만족하실 수 없는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안 좋은 일이 겪은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랑 섹스를 하는 건 뭐랄까...”

“그런 것까지 걱정하셨어요? 레베카님은 정말 배려가 넘치는 분이시군요. 전 괜찮으니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에리카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마음이 흔들려버렸다.

분명 내 입으로 당분간 에리카를 상대로는 성욕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에리카의 늘씬한 몸매에 눈길이 가버렸다.

하여튼 나란 놈은. 아니, 나란 년은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다음 기회에 보자. 알았지?”

“네, 레베카님. 기다리고 있을 게요.”

나는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에리카의 뒷모습을 보면서 복잡해진 머리를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애썼다.

외출준비를 다 끝낸 우리는 시간에 맞춰서 가르탱의 저택으로 갔다.

길거리에는 치안을 유지하는 기사단원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나 인력난이 심해서 그런 것 같다.

서둘러 저택 앞에 도착한 우리는 저번에 저택에 방문했을 때처럼 집사의 안내를 받아서 5층까지 올라가서 가르탱의 넓은 개인공간에 발을 디뎠다.

그가 왜 이런 고립적인 생활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편의시설을 다 갖춰놓고 재밌게 사는 사람에게 굳이 속사정을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어서 오시오, 레베카.”

“반갑습니다, 가르탱님. 바쁜 와중에 이렇게 저희들을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은인을 너무 늦게 대접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식사가 준비되고 있으니 따라오시오.”

우리는 가르탱을 따라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10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이 있었고, 사람 수에 맞춰서 세팅이 끝나있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다가올 식사를 기다렸다.

그나저나 노예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게 하다니, 가르탱은 베로니카 언니처럼 아랫사람들에게도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식사를 하기 전에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고자 하오. 얼마 전에 영주님께서 그대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지만 내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소.”

“저를 수사하려고 하셨다고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내가 기사단 본부 습격사건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날 수사하려던 거야?

설마 내가 루드비히를 한 번 구해줬던 일로 시비를 걸고 싶은 건가?

하여간 그 영주라는 새끼는 갈수록 더 짜증난다.

“그렇소. 공교롭게도 그대가 도시에 와서 노먼의 저택에 머무른 뒤에 바로 그런 사태가 발생했으니 의심스럽다고 하시지 뭐요. 그리고 그대가 엘카렌을 빼돌려 죽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목격자들의 오해이며 결투의 결과라고 둘러대었소.”

“죄송합니다. 제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군요.”

“괜찮소. 그대의 행동은 공익을 생각하면 분명 옳은 행동은 아니지만 어차피 마법수정구로 기억을 읽을 수 없어서 제대로 재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가면쟁이들의 기억은 읽을 수 없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리제르카에서 보낸 공문에 그렇게 적혀있었소. 실은 공직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법체계를 벗어난 사적 제재를 옹호하는 건 절대로 올바른 일이 아니지만 그대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 이번엔 눈감아주기로 했소.”

가르탱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선택한 덕분에 내가 편하게 다음 도시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다른 정보도 있나요?”

“별 것 아니지만 이제 내가 기사단장이 되었소.”

“축하드립니다!”

나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박수를 치면서 축하를 해주었다.

그가 차기 기사단장이 될 확률이 가장 높다던 엘카렌의 예측이 그녀의 개입으로 인해서 더 빨리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정말 고맙소.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오. 내 친구 노먼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불명예전역을 하게 되었고 곧 신분도 귀족에서 평민으로 강등될 것이오.”

“강등이요?”

“그렇소. 그 친구가 평민이 되는 즉시 빚과 관계없이 그 저택에서 살 권리를 잃게 되오. 게다가 남은 평생을 기사단을 위해서 잡역부로 일해야 되는 형벌도 받게 될 것이오.”

“생각보다 처벌이 세군요. 전 그냥 감옥에서 몇 년 살 줄 알았거든요.”

“원래는 사형이지만 적과 내통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귀족 신분이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그리고 나도 노먼이 적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소. 기사단장이 되자마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두 가지나 저질렀으니 앞으로 정말 조심해야할 것 같소.”

가르탱은 쓴 웃음을 지으며 물을 연거푸 마셔댔다.

본인의 성격에 맞지 않은 일들을 하니 속이 타는 모양이다.

뭐, 덕분에 난 수사를 받지 않을 수 있고 프리실라도 남편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아참, 보상에 대해서는 말해주자면 영주님께서는 그대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니 내가 대신 주도록 하겠소.”

“뭐든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엘카렌이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것이오. 지금 우리 기사단의 사정상 그곳들이 비어있다 하더라도 조사할 여유가 전혀 없으니 혹시 관심이 있다면 찾아가보도록 하시오.”

가르탱은 언제 챙겼는지 모를 서류뭉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서류에는 각종 시설에 대한 위치, 특이사항, 잠재적인 위협 같은 것들이 적혀있었다.

기사단 본부가 박살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정보원들은 제법 살아남은 모양이다.

“흥미로운 제안이시군요.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대신 그곳에서 나오는 전리품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래도 제르디아 지방이나 제국 전체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라면 부디 꼭 알려주기를 바라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서류뭉치를 챙겨서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최근엔 제대로 모험을 해보질 못했는데 이곳을 조사하면 비슷한 기분이 들 것 같다.

“고맙소. 흠흠, 갑자기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친구가 되어보지 않겠소?”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가르탱.”

나는 가르탱의 제안에 다짜고짜 말을 놓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 무례한 태도에도 가르탱은 밝게 웃으면서내 손을 잡아주었고 이어지는 맛있는 식사를 그와 함께 즐기며 새로운 우정을 위해서 건배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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