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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11화 (111/271)

〈 111화 〉 110화

* * *

나는 엘카렌의 맨얼굴을 보자마자 충격을 받아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다름 아닌 프리실라였다.

사근사근한 불곰족 여성이 알고 보니 가면쟁이, 그것도 사람들로 생체실험을 벌이고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그런 극악무도한 쓰레기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루드비히는 엘카렌과 노먼 사이에 별도의 중개인이 있다고 그랬었는데...

프리실라가 평소에는 착한 아내인 척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중개인 역할을 맡긴 건가?

“프리실라, 당신이 어떻게...”

“레베카님, 이 괴물은 프리실라님이 아니에요. 배를 보세요.”

라우라는 엘카렌의 옷을 찢어서 그녀의 배를 훤히 노출시켰다.

프리실라와 엘카렌은 모든 면에서 똑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도 엘카렌은 프리실라와 달리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

“날 그딴 짝퉁과 같은 취급하지 마! 커헉...”

엘카렌은 본인을 프리실라라고 착각한 나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화를 내다가 입으로 피를 토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프리실라를 알고 있었다.

설마 중개인이 프리실라는 아니겠지? 하루에 두 번이나 배신당하는 싫은데.

“네 년과 프리실라는 어떤 관계지? 내가 말로 물을 때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흥! 고문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년이 주둥이만 살아서 같잖게 협박하기는.”

“난 못해도 네 년의 배에 시원하게 구멍을 뚫어준 사람은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 그것도 아주 능숙하게 말이야.”

“아악! 씨발...”

프리실라는 자신의 배에 꼽힌 칼자루를 슬쩍 비트는 라우라 때문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그게 꼭 발에 밟힌 버러지 같아서 꼴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날 죽일 건데 말해서 뭐... 끄아악!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프리실라는 라우라가 다른 칼로 배를 한 번 더 찔러버리자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가면쟁이들은 한 가지 방법 외에는 죽지를 않으니 라우라가 더 과격하게 나오는 것 같다.

“프리실라는 내 복제품이야. 재미삼아 만들고 그냥 버렸는데 우연찮게 가르탱의 집으로 팔려가게 되었지. 그래서 난 그걸 이용해서 제르디아 기사단을 파멸시킬 계획을 세웠어. 일정한 절차만 거치면 시야를 공유할 수 있고, 잠시 조종도 할 수 있으니까 어려울 것도 없었지.”

“그럼 프리실라를 노먼에게 접근시킨 것도 네 의도란 말이야?”

“아니, 그 멍청한 불량품은 찐따 같은 노먼을 만난 뒤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일이 많아졌어. 원래라면 다음 기사단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 가르탱을 홀렸어야 했는데 말이야.”

엘카렌의 말을 듣고 나니 프리실라가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분명한 자아가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 태어날 소중한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프리실라의 건강이나 정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좋겠다.

“프리실라가 가르탱의 취향이 아니었나보네.”

“하! 그 자식은 게이야! 여자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놈이라고! 처음부터 그걸 알았더라면 몇 년 동안 삽질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난 본의 아니게 가르탱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고, 차라리 그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속으로는 남자라도 어쨌든 겉은 여자니까 가르탱 앞에서는 만취를 하더라도 서로 사고를 칠 일이 없겠지.

아니야. 난 이제 완전히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거라고.

“흠흠.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했는데?”

“어차피 어리숙한 노먼은 속이기 쉬우니까 기사단장인 윌리엄부터 노렸지. 그 꼰대는 강직한 인간이라서 타락시키는 게 정말 곤란했어.”

“하지만 넌 성공했고.”

“그래. 운 좋게도 그 자식이 젊은 시절에 잠시 경마에 심취했다가 겨우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그 뒤로는 아주 쉬웠어. 슬쩍 등을 떠밀어주는 것만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도박중독자가 되었거든.”

이제야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된 이유를 알겠다.

세상에 도박만큼 재산을 날려먹기 좋은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프리실라가 이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엄청나게 자책을 할 것 같다.

“궁지에 몰린 윌리엄은 내가 프리실라를 통해서 전달한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고, 결국 내 실험실로 직행하게 되었지. 그 놈을 거대 인면어로 개조하는 건 정말 재밌었어. 킥킥킥. 으아악! 씨발, 왜 또 지랄인데?”

“웃는 게 재수 없어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엘카렌이 실실 미소를 짓는 게 너무 역겨워서 나도 모르게 칼날을 잡고 양 옆으로 흔들어버렸다.

그녀가 죽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는 게 꽤나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성격이 많이 망가진 모양이다.

“자, 계속하자고. 네가 개조한 윌리엄이 기사단 본부를 공격해서 파괴한 건 성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성물에 대한 건 말 해주고 싶어도 못해. 제약이 걸려있어.”

“꼭 결정적인 것들은 알아낼 수가 없다니까.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지금 노먼은 어디서 뭘 하고 있지?”

“가르탱을 반역죄로 체포할거야. 놈은 내가 프리실라를 통해서 세뇌한 덕분에 모든 일이 다 가르탱 때문에 일어났다고 굳게 믿고 있거든. 내가 거짓증거도 만들었으니 실패하지 않을 거다.”

“네가 노먼을 아주 끝까지 이용해먹는 구나!”

“그래! 성물은 확보하지 못했어도 제르디아 기사단을 박살내는데 성공했으니 제르디아는 곧 우리 차지가 될 거다. 여기서 날 죽인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야. 하하하하!”

“닥쳐!”

나는 화가 나서 엘카렌을 마구 후려쳤다.

마법갑옷의 출력은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엘카렌의 얼굴은 말 그대로 짓이겨졌다.

하지만 인조마핵을 파괴하지 않아서 그녀는 죽지도 못하고 엄청난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레베카님! 이제 그만하세요! 네?”

“이리스...”

나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이리스의 외침에 깜짝 놀라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마력저격소총을 들고 있는 이리스와 만삭의 프리실라가 있었다.

나는 임산부에게 끔찍한 것을 보여줄 수 없어서 서둘러 몸으로 사건현장을 가렸지만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와 살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미안해. 너한테 못 볼꼴을 보여줬네.”

“아니에요. 레베카님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걸요.”

이리스는 이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분명 내 추태를 고스란히 보았는데도 말이다.

그나저나 바로 옆에 있는 라우라도 아니고 이리스가 날 말릴 줄이야.

라우라는 내 과격한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프리실라가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저에 대한 이야기는 다 들으셨나요?”

“이 괴물이 당신을 수시로 조종했다는 말에 대해서 들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집안을 파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요. 앞으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살 자신이 없어요.”

프리실라는 완전히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하기야 나 같아도 저런 상황이면 환장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힘든 와중에 최악의 진실을 알아버렸으니 정말 괴로울 것이다.

“분명 노먼님이라면 이해해주실 거예요. 프리실라님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프리실라님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나요?”

“레베카님이 가르탱님을 뵈러간 사이에 황금색 가면을 쓴 여성분이 저를 찾아와서 가르쳐주셨어요.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분이셨지만 여러분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도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을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신 것 같아요.”

황금색 가면? 이건 또 뭐야?

설마 그 사람이 성물을 가로채고 노르헤임의 좌표를 적어놓은 사람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일단은 그녀는 아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면쟁이들의 민감한 속사정을 다 알고 있고, 어쨌든 가면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놈들 중에서 별종일지도 모른다.

“프리실라님은 적에게 공격받는 저희들을 위해서 기사단을 불려주셨어요. 정말 위기상황이었는데 천만다행이었죠. 덕분에 저희들이 레베카님을 도울 수 있었어요.”

“딱 좋은 타이밍에 와줬어. 사실 엄청나게 위기상황이었거든. 네 저격이 나한테 희망을 줬어.”

“히힛, 레베카님에게 도움이 되어드려서 정말 기뻐요.”

“일을 마무리하면 꼭 보답해줄게. 그런데 에리카는 어디에 있니?”

“아, 에리카는 특수상점에 있어요. 다친 곳은 없지만 엄청 슬퍼보여서 걱정이에요.”

이리스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에리카를 어떤 식으로 위로해주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에리카의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다시 좋은 관계로 만들 것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에리카와 헤어지기에는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이 너무 뜨겁다.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랑 라우라는 얼른 에리카 곁으로 가도록 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엘카렌은 제압했고, 음모의 전말을 알아냈으니 이제 해결할 일만 남았어. 걱정 마.”

“네, 레베카님. 가자, 라우라!”

이리스는 뭔가 아쉬워하는 라우라를 데리고 특수상점으로 뛰어갔다.

에리카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거의 다 재생된 엘카렌의 얼굴을 또 짓밟아서 박살내고 치트가방에서 꺼낸 철제우리에 집어넣었다.

살아있는 건 무슨 수를 써도 치트가방에 넣을 수 없으니 이대로 노먼과 가르탱 앞으로 가져가야겠다.

“프리실라님,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지금 노먼님은 가르탱님을 반역죄로 체포하려고 해요. 그러니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증언을 해주세요.”

“물론이죠. 가다가 아이를 낳는 한이 있더라고 갈 거예요.”

프리실라는 눈빛만으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나는 오른쪽 어깨에는 엘카렌을 가둔 철제우리를 올리고 왼쪽 팔에는 조심스럽게 프리실라를 앉힌 뒤에 그녀에게 무리가 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바로 파괴된 기사단 본부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남자다.

오랜 친구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심지어 죽이려고 드는 사태를 막기 위한 준비는 모두 갖춰졌으니 실천으로만 옮기면 된다.

그나저나 나와 엘카렌의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단순히 돈을 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데...

이게 다 엘카렌 때문이다.

이 미친년이 다짜고짜 공격만 하지 않았어도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엘카렌을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너무 자비롭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좀 더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면서도 나에게 이득이 되는 처벌이 뭔가 없을까?

역시 기생촉수 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엘카렌과 프리실라가 이어져있는 이상, 프리실라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일단 보류하자.

내가 남들에게 절대로 말해줄 수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금방 기사단 본부에 도착했다.

본부로 향하는 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서로를 마력소총으로 겨누고 있는 두 남자의 고성을 들을 수 있었다.

“가르탱 부단장. 그대를 반역죄로 체포한다. 당장 무기를 내려라.”

“단장대리님, 저는 창조신께 맹세코 그런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먼저 총을 치우시지요.”

“이미 증거는 모두 확보했다. 네 죄를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도록 해라.”

“노먼, 이 바보 같은 친구야. 우리 우정이 겨우 그 정도였단 말이더냐?”

“넌 나를 모욕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리실라가 아니었다면 난 평생을 너한테 속고만 살았겠지.”

“프리실라가? 그녀가 왜?”

노먼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당당하게 맞서던 가르탱은 프리실라가 노먼을 꼬드겼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들고 있던 마력소총까지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노먼의 부하들이 가르탱을 체포하기 전에 개입하고 나섰다.

“노먼님, 잠시 프리실라님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왜 프리실라와 함께... 프리실라, 다친 곳은 없어?”

노먼은 나에게는 딱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나보다는 프리실라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었다.

프리실라는 힘겹게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노먼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그의 뺨을 맛깔나게 후려쳤다.

나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고 나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목격한 모든 이들이 경악하고 말았다.

“서방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둘도 없는 친구를 죽이려들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네가 마련한 증거로...”

“그건 내가 아니라 이 가면쟁이가 조작한 것뿐이에요. 이 괴물이 저를 조종해서 당신을 속인 거라고요!”

프리실라는 내가 땅에 내려놓은 우리에 갇혀있는 엘카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침 엘카렌의 재생이 끝나서 그녀의 프리실라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주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라고?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제가 설명 드리지요. 이 엘카렌이라는 자는 기사단장님을 납치하여 거대 인면어로 개조하고 프리실라를 조종하여 노먼님을 속였습니다. 기사단을 무너뜨려 제르디아를 장악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였습니다.”

나는 힘들어하는 프리실라를 대신하여 엘카렌이 털어놓은 진실을 간단하게 축약해서 노먼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노먼은 수치심으로 물든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는 가짜에게 놀았다는 말인가... 프리실라, 넌 분명히 내가 갑자기 달라졌다고 했었지? 난 오히려 널 이해할 수 없었어. 난 네가 말하는 대로 따라주었는데 정작 넌 나를 이상하게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저 괴물 때문이었다니...”

“제가 저 괴물과 이어져있는 바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전 더는 서방님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

프리실라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책하더니 결국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노먼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가르탱이 앞으로 나서서 친구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임신한 아내가 울고 있는데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으면 어떡해? 당장 달래줘. 하여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깐. 그리고 레베카경, 그대 덕분에 우리 모두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정말 고맙소이다.”

“아니요.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두 분 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나는 내게 고개를 숙이는 가르탱의 겸손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시간 동안 온갖 불미스러운 일들이 다 벌어졌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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