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108화
* * *
라우라와 에리카는 임대로 내놓은 비어있는 상가건물에 숨어있었다.
엄연한 무단침입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대충 넘어가자.
두 사람은 나를 반기려다가 내가 묶여있는 루드비히를 내려놓는 것을 보더니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라우라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루드비히를 노려보았고, 에리카는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에리카는 내게 공포심마저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내가 루드비히를 죽일 생각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는 불쌍하게도 목소리를 심하게 떨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루드비히 오빠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널 살리려고 가면쟁이들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어.”
“네? 어떻게 그런 일이... 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에리카는 루드비히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루드비히는 차마 에리카와 눈을 마주치질 못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카렌님이 실험체인 내 기억을 읽고 네 재생능력을 생체병기개발에 쓰고 싶어 하셨어. 만약 그렇게 되면 넌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한 처지가 될 거야. 그래서 난 널 지키기 위해서 엘카렌님의 명령에 따라 제르디아를 습격하고, 일부러 잡히고, 노먼님의 도움으로 성물이 있는 곳까지 갔어. 하지만 성물은 이미 누가 가져갔고, 널 지킬 방법이 사라진 거야.”
루드비히가 하는 말을 들은 에리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구해냈다고 생각했던 오빠가 알고 보니 줄곧 가면쟁이들과 한패였다는 사실을 들으니 기가 막힌 모양이다.
“오빠는 나 때문에 레베카님을, 우리 모두의 기대를 배신했던 거야?”
“그래. 오직 널 살리고 싶어서 그랬어. 그리고... 윽!”
루드비히는 말을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에리카가 뺨을 세차게 후려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에리카의 거친 행동은 루드비히 뿐만 아니라 나와 라우라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분노와 허망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오빠를 노려보면서도 슬픈 눈물을 흘렸다.
“왜 나를 다시 만났을 때 말하지 않았던 거야? 내 핑계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내 목숨 때문에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이... 오빠가 이런 끔찍한 사람이 되어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미안해. 하지만...”
“말로만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런다고 오빠가 죽인 사람들이 살아 돌아와? 오빠가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데? 오빠는 나까지 죄인으로 만들었어.”
“에리카,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전적으로 다 내 탓이야.”
“오빠의 입장은 이해해. 날 살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만큼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오빠는 날 위해서라는 말을 앞세워서 학살을 저질렀어. 내 이름을 걸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그 사람들은 다들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에리카는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루드비히는 완전히 얼어붙었고 나와 더 이상 에리카와 루드비히를 대화하게 놔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에리카, 진정해. 루드비히는 분명 큰 잘못을 저질렀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하지만 너한테는 그 어떠한 책임도 없어.”
“아니에요. 믿었던 오빠가 저 때문에 사람들을 잔뜩 죽였는데 어떻게 제 탓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넌 그저 피해자일 뿐이야.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이게 다 엘카렌이라는 놈 때문이야.”
“레베카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두를 배신하고 사람들을 잔뜩 죽인 오빠를 죽여서라도 사죄해야 할까요?”
에리카는 절망에 찬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놀란 마음에 서둘러 마법갑옷을 벗고 나와서 에리카를 안아주었다.
알몸이든 뭐든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마음껏 울어. 내가 곁에 있어줄 테니까. 안심하고 울어도 돼.”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래. 실컷 울어서 나쁜 감정을 털어내도록 해.”
지금까지 억지로 울음을 참았던 에리카는 결국 내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나는 이토록 작고 약한 사람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에리카를 이렇게 울게 만든 모든 것들이 미웠다.
난 눈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를 꽉 물고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기서 나까지 소리 내어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에리카는 내 품에서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고,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고맙습니다, 레베카님.”
“이제 좀 괜찮니?”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에리카는 나를 향해서 힘들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분명 고혹적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 파는 미소였다.
“에리카, 레베카님도 말씀하셨지만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누가 그런 말을 지껄이면 내가 가서 작살을 내버릴 거야.”
“고마워, 라우라.”
“친구끼리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라우라는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믿음직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레베카님, 루드비히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너도 잘 알다시피 난 배신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야. 배신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라야하는 법이고.”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지만 에리카 때문에 망설이는 것도 사실이시죠?”
“맞아, 역시 넌 내 마음을 잘 알아. 루드비히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는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상황이... 에리카!”
나는 갑자기 손에 마력권총을 들고 루드비히를 조준하는 에리카의 가느다란 팔목을 잡고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라우라는 다소 거칠게 에리카의 손에서 마력권총을 뺐었다.
“에리카, 너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니?”
“이게 유일한 해법이라면서요?”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상황이 변했다고는 하더라도 다짜고짜 친오빠나 다름없었던 사람을 죽이려고 들더니 말이다.
난 에리카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녀를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에리카, 해도 내가 해. 멋대로 굴지 마.”
“죄송해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오늘은 이해해주겠지만 한 번만 더 총기로 말썽을 일으키면 너에게 강한 벌을 줄 수밖에 없어.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해.”
“네, 레베카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에리카는 여느 노예들처럼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아, 난 이런 식의 굴욕적인 사과는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서둘러 에리카를 일으켜 세웠고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리고 에리카에게 뭐라고 훈계를 더 하려는 순간에 이리스로부터 텔레파시가 왔다.
‘라우라, 전투가 끝났어! 내 활약상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수고 많았어. 그리고 지금 레베카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네가 직접 보고 드려.’
‘정말? 레베카님, 들리세요? 헤헤헤.’
이리스는 나와 직접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말에 굉장히 기뻐하는 듯했다.
상황만 나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마음껏 즐겼을 텐데...
‘응. 아주 잘 들려. 결과는 어떻게 됐니?’
‘제가 거대 인면어를 끝장냈어요. 그리고 기사단이 인면어의 시체에서 불곰족 남자를 구출했어요. 혹시 기사단장님일까요?’
‘아마도 그럴 거야. 일단 고생 많았고, 지금 바로 특수상점으로 가도록 해. 거기서 만나자. 그리고 라우라, 너도 에리카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 난 남은 일을 처리하고 갈게.’
난 더 이상 루드비히를 상대로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에리카가 자신의 손을 오빠의 피로 더럽히지 않도록 그녀를 격리해야 한다.
지금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레베카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마, 라우라. 일찌감치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노먼을 조심해. 절대로 놈을 믿지 마. 놈은 가면쟁이들의 협력자야.’
‘네, 레베카님.’
라우라와 이리스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는 방금 루드비히에게서 노먼의 정체에 대해서 들은 라우라는 몰라도 이리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하긴 나 말고는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귀족나리일 뿐이니 놀랄 것도 없겠지.
“에리카, 라우라를 따라가도록 해.”
“루드비히 오빠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해도 될까요?”
“그래.”
내 허락을 받은 에리카는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꼭 안아주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빠, 아까는 소리 질러서 미안해. 오빠는 나에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른 적 없는 착한 사람인데 말이야. 난 오빠 덕분에 고아원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어.”
“미안해, 에리카. 난 항상 널 위해서 살겠다고 했었는데, 정작 네 마음에 상처만 주고 말았어. 그러니 내가 죽어도 마음에 두고 살 필요 없어. 나 같은 죄인은 잊고 레베카님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
나는 루드비히의 손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어서 에리카를 안아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포옹하고서 체온을 나누었다.
“고마워. 그리고 안녕. 다음 생에서는 진짜 남매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자.”
에리카는 루드비히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라우라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에리카는 라우라와 함께 건물에서 나서기 전에 내게 부탁을 하나 남겼다.
“부디 오빠를 편하게 보내주세요.”
“에리카, 너 정말 루드비히가 죽어도 괜찮겠어?”
“오빠가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레베카님이 오빠를 해방시켜주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나는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에리카가 키스로 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키스를 많이도 했었지만 이렇게 슬프고 착잡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라우라와 에리카가 건물에서 나자가, 빈 건물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와 루드비히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바로 루드비히였다.
“레베카님, 노먼님은 엘카렌님에게 직접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분 사이에 중개인이 있습니다. 저도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노먼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조언해줘서 고맙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약이 걸려서 말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이미 너처럼 죽음을 원하는 가면쟁이를 만난 적이 있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루드비히가 알려준 정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닦달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심문을 해봤자 제약이 걸려있는 정보를 발설하지 못하니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려봤자 의미가 없다.
“제가 에리카를 다시 만났을 때, 솔직하게 제 사정을 말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겠지요?”
“이미 지나간 일은 어떤 가정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 하지만 에리카라면 분명 네 편을 들어주고 너와 함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했을 거라고 믿어. 그리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너희들을 도왔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나한테 사과하지 말고 저승에서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도록 해. 그리고... 널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절 죽여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내 철칙을 지키게 되겠지. 너와 이런 식으로 헤어져서 유감이다.”
나는 루드비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명치부근을 마력권총으로 조준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 눈을 감고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목숨을 어렵사리 빼앗았다.
단 한 발의 총성이 어쩜 이리도 크고 무겁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씨발... 바보 같은 새끼.”
나는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루드비히의 시신 옆에 앉아서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을 억눌렀다.
이제 와서 루드비히를 죽이는 게 정답이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그냥 다짜고짜 살인을 해버린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랑은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후우, 널 죽여 놓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네 무덤은 확실하게 만들어줄게. 그러니 당분간 내 가방 속에서 지내도록 해.”
나는 치트가방에서 큰 상자를 하나 꺼내서 루드비히의 부서질 것 같은 시신을 안에 넣고 특수상점에서 산 테이프로 밀봉했다.
가방 속 공간에서는 상태가 보존되니 시신이 훼손될 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난 바닥에 묻은 피를 가지고 있는 청소도구를 총동원해서 열심히 닦아낸 뒤에 건물에서 나와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불청객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특이하게도 한쪽은 하얀색, 다른 한쪽은 검은색인 반반가면을 쓰고 있는, 엘카렌이라는 이름의 그 가면쟁이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여자였고 키는 나보다 컸다.
“이봐, 남의 실험체를 그런 식으로 가져가면 어떡해? 그거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엘카렌은 마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쓸데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친구인 줄 알겠다.
저런 년이랑 친구가 되느니 혼자 살다가 죽고 말지.
“흥!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하여간 도둑들은 다들 너무 뻔뻔하다니까. 힘으로 뺏는 수밖에 없겠네.”
“맨몸으로 마법갑옷을 입은 사람을 이겨보겠다고? 확실히 너희 가면쟁이들은 나사가 하나씩 빠졌다니까.”
“마법갑옷은 무적이 아니란다. 애송아.”
엘카렌은 가면쟁이라는 말이 굉장히 불쾌했는지 갑자기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더니 자신의 머리 위를 중심으로 5개의 붉은색 마법진을 전개했다.
그리고 엘카렌은 나를 향해서 손을 앞으로 뻗었고, 마법진에서 새빨간 빔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피하기는 했지만 주변의 건물들이 두부처럼 간단하게 잘려나가서 그 단면대로 미끄러지듯 무너졌고, 사람들 역시 산채로 여러 조각으로 동강이 나버렸다.
여기 분명 총이 주력인 세상 맞지? 이젠 아닌가?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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