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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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공기가 맴도는 지하 감옥은 지상과 마찬가지로 지옥도가 펼쳐져있었다.
차가운 철창 뒤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그들은 대부분 벽이나 바닥 혹은 쇠창살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서 자살했고, 간수들 몰래 흉기를 숨겨두었던 죄수들은 그 어설프게 날카로운 도구로 자신의 목을 찢어서 죽었다.
죽은 사람들이 흘린 피는 감옥 이곳저곳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그 끔찍한 광경들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미니맵과 지도창, 앞만 보고 걸었다.
이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이라면 정말 비참한 죽음이 따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라우라가 텔레파시를 보내는 바람에 난 조금 놀라고 말았다.
‘레베카님? 레베카님?’
‘어... 무, 무슨 일이니, 라우라?’
‘기사단 측에서 길을 차단해서 본부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에요. 어떻게 할까요?’
‘이리스는 신전의 첨탑으로 올라가서 저격을 준비하고 라우라, 너는 에리카를 데리고 본부와 첨탑의 중간지점으로 가서 나와 이리스 사이를 중계해. 알았지?’
‘네, 레베카님.’
평지 밖에 없는 제르디아에서 가장 높은 곳은 바로 도시 중앙에 있는 광장 근처에 위치한 신전의 첨탑이다.
그곳이라면 기사단 본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고, 내 지시에 따라서 거대 인면어의 뒤통수에 바람구멍을 뚫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 본부에서 기사단까지의 거리는 텔레파시가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중간에 라우라가 중계를 해줄 필요가 있다.
이리스를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한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레베카님, 에리카가 루드비히의 안부에 대해서 묻는데 뭐라고 말해줄까요?’
‘그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전해줘.’
‘상황이 좋지 않은가요?’
‘아직은 그런 것 같아. 이리스, 첨탑이나 그쪽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 싶으면 라우라와 합류해. 괜히 무리하지 말고.’
‘네, 레베카님도 조심하세요.’
‘고마워.’
난 텔레파시를 끝내고 다시 불쾌한 복도를 걸어갔다.
힘든 와중에 짧게나마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운이 난다.
지하 1층과 2층의 감옥은 죽은 죄수들로 가득했지만, 3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력권총의 전조등의 켜고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이 슬쩍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문은 지도창과 미니맵에 표시되어 있지만 그 너머는 말 그대로 미지의 장소였다.
‘이건 막시안의 별장에 있던 마법통로 같은 거야. 벽처럼 보이지만 벽이 아니야.’
나는 일렁거리는 벽 너머로 손을 슬쩍 집어넣어서 휘졌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했고, 최대한 숨을 죽이고 그의 뒤로 다가가서 뒤통수에 마력권총을 들이댔다.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천천히 뒤로 돌아서.”
루드비히는 착하게도 즉시 내 명령에 따라서 움직였다.
잔뜩 겁을 먹은 그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구, 구도자님? 죄송합니다. 목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목표가 없다고?”
“네, 성물은 이미 누군가 가져간 뒤였습니다. 막시안의 별장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루드비히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성물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면쟁이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물을 모으고 있고, 누군가 놈들보다 앞서서 성물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그 누군가가 우리를 노르헤임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가면쟁이의 적이 우리에게 단서를 남겼다는 건 우리를 아군으로 생각한다는 거겠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적의 적이 결국 또 적일 수도 있으니 그 누군가에게 함부로 호의적인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넌 누구의 편이냐?”
“저, 전 어디까지나 조직의 편입니다! 그러니 부디 에리카를 살려주십시오! 그 아이는 저와 달리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엘카렌님!”
루드비히는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축축한 바닥에 이마를 바짝 붙이며 싹싹 빌었다.
분명 내 목소리를 알고 있을 텐데도 가면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난 분명 루드비히를 죽일 생각으로 그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에리카를 살려달라고 비는 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내 믿음을 배신한 이유가 정말 에리카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면 당장은 죽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엘카렌이라는 새끼가 에리카를 죽일 생각 같으니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낸 뒤에 루드비히를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난 엘카렌이 아니다. 그자가 왜 에리카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냐?”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엘카렌님께서는 에리카의 재생능력을 생체병기 개발에 쓰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에리카는 죽게 될 겁니다.”
씨발, 지금 뭐라고? 감히 내 에리카를 그딴 일에 써먹을 생각이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만나면 곱게 죽여주지는 않겠어.
경우에 따라서는 촉수생물의 먹이로 던져주마!
나는 이를 박박 갈면서 분을 삭이다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엘카렌은 어떻게 에리카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냐?”
“마법수정구로 제 기억을 읽었습니다. 저 때문에 에리카는 죽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여태까지 에리카를 납치하지 않고 그냥 둔 이유는 뭐지?”
“제가 성물을 가져간다면 굳이 에리카를 확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또 실패했으니 에리카도, 절 구해주신 레베카님도, 다른 좋은 분들도 모두 죽을 겁니다. 다 저 때문입니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바닥에 이마를 붙인 채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과 기대를 배신했지만 개인의 욕심이나 신념 혹은 광신 때문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에리카를 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루드비히가 못마땅했지만 결국 그에게 조준하고 있던 총구를 거두고 말았다.
“노먼에게서 수상한 점은 없었나?”
“그 사람은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씨발, 노먼이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었을 줄이야.
임신한 아내를 두고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가면쟁이와 가르탱의 관계를 조사한다더니 정작 자기가 그 놈들과 협력자였다.
난 하마터면 바보처럼 그를 도와서 가면쟁이들에게 좋은 일을 할 뻔 했다.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정작 중요한 시점에는 덜컥 믿어버린 내 스스로가 수치스러울 정도다.
‘씨발,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노먼이 내 믿음을 배신한 게 문제라고.’
나는 일단 남 탓을 하면서 감정을 억눌렀다.
그나저나 나중에 그 작자를 만나면 주먹부터 나갈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무리 내가 명예기사라도 귀족을 상대로 폭력부터 행사하면 정말 인생이 피곤해질 거다.
그렇다면 가르탱을 이용해서 노먼에게 앙갚음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루브비히, 마지막 질문이야. 엘카렌은 어디 있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항상 윌리엄을 통해서 저 같은 하급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래?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을 가능성은?”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눈물과 콧물로 온통 엉망이 된 루드비히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욱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의 멱살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에리카는 널 믿었어. 하지만 넌 그 아이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질 않았지. 네가 처음부터 우리 모두에게 솔직히 말했더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설마 레베카님?”
루드비히는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뒤늦게 내 목소리를 떠올렸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난 그깟 구도자가 아니라 레베카 카론이다. 널 당장 죽여 버려도 상관없지만 에리카를 생각해서 참아주겠다. 하지만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어주마.”
“그냥 절 죽이는 게 빠를 겁니다.”
“무슨 말이지?”
“엘카렌님은 저를 거대 인면어로 변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마법술식이 제 심장에 새겨져있습니다. 만일 저를 법정으로 데려간다면 그곳에서 절 변신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들 겁니다.”
“지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하다 못해서 엘카렌의 명령을 거부할 방법 같은 건 없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 말고는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루드비히는 도미닉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해법을 제시하며 울먹거렸다.
가면쟁이들은 자살이 불가능한 놈들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언젠가 누군가 자기를 죽이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인 삶이다.
“지금 네가 변신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엘카렌도 널 변신시키는 조건이 있나보네?”
“제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그럼 네 얼굴을 가리면 되겠네. 루드비히, 적어도 에리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죽어. 나한테 그 힘든 일을 억지로 떠밀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루드비히는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자신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게 더 화가 났지만 에리카를 생각해서 참았다.
“너 인면어의 현혹마법에는 면역이지?”
“네, 레베카님.”
“혹시 엘카렌이 네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이 제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챈다면 그땐 엘카렌님이 추적마법을 사용할 겁니다.”
“후우, 좋아. 이거 쓰고 에리카에게 가서 진실을 전하자.”
나는 루드비히에게 복면을 씌우고 혹시나 그가 도망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 치트가방에서 중량 마법갑옷을 꺼내서 입고 루드비히를 어깨에 들쳐 멘 상태로 지상으로 단번에 달려갔다.
이 상황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루드비히를 이용해서 역으로 엘카렌을 상대로 함정을 팔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죽을 사람은 모두 다 죽고, 산 사람은 모두 다 도망친 것 같다.
나는 우선 가르탱이 있는 곳으로 향해서 그를 만났다.
그가 있는 곳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병력들이 집결해있었고, 땅에 떨어졌던 사기가 평균적인 수준까지는 올라와있었다.
가르탱은 내 어깨 위에 있는 루드비히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레베카, 이제 반격작전을 시작해도 되겠소?”
“네, 그런데 혹시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동명이인들을 여럿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시점에 하필 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실종된 기사단장님의 성함이 바로 윌리엄 로트라본이오.”
“거대 인면어의 이름이 윌리엄입니다. 어쩌면 가면쟁이들이 기사단장님을 그렇게 변화시켰을 지도 모릅니다.”
“신이시여, 어찌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르탱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휘청거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단원들도 놀라서 입을 다물질 못했다.
기껏 가르탱이 올렸던 사기가 또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불타오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분이 말도 안 되는 빚을 지셨다는 것부터 이해가 되질 않았었는데 역시 그 모든 게 다 가면쟁이들 때문이 분명하오. 레베카, 알려줘서 고맙소.”
“맞서 싸우실 겁니까?”
“거대 인면어를 쓰러뜨리고 기사단장님을 구출하고야 말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가서 그대가 할 일을 하시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놈들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가르탱과 함께 거대 인면어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이미 경험이 있으니 분명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르탱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루드비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 그 자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지 않소? 가서 그 일을 마무리 하시오. 이건 애초에 우리 기사단이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라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다시 내 저택에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겠소.”
“알겠습니다. 참고로 가면쟁이들은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곳만 마법방어막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다른 곳을 공격하시고, 쓰러뜨린 뒤에는 인조마핵을 찾아서 파괴해야 합니다. 마침 제 사람들 중에서 장거리저격에 능한 사람이 있으니 기사단이 전투에 돌입하면 지원사격을 해드릴 겁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가면쟁이들의 약점을 빠르게 설명했고, 가르탱은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약점만 알려주더라도 기사단 자체에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리스의 지원이 함께한다면 보다 적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가기 전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가르탱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귓속말로 노먼에 대한 사실을 전해주었다.
가르탱의 표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지만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 문제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처리하도록 노력하겠소. 우리가 단장님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우위에 설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가르탱님, 무운을 빕니다.”
“고맙소. 살펴가시오.”
나는 가르탱과 악수를 한 뒤에 슬퍼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라우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라우라, 이리스에게 곧 전투가 벌어지니까 저격으로 기사단을 지원해달라고 전해줘. 그리고 지금 루드비히를 데리고 그쪽으로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 레베카님. 조심해서 오세요.’
“그래, 조금 있다 보자.”
나는 텔레파시를 끝내자마자 미니맵 상에서 인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 뒤에 유유히 기사단 본부를 빠져나왔다.
바깥에 있는 기사들은 몰려든 인파를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놓고 마법갑옷을 입고 있는 나를 신경 쓰지 못했다.
난 인적이 없는 골목에서 지도창으로 라우라와 에리카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한 뒤에 둘이 숨어있는 외딴 건물로 향했다.
내가 지금 특수상점을 접선장소로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엘카렌이 루드비히를 이용해서 특수상점의 존재를 파악하거나 아예 침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적의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이 자리에서 루드비히를 죽여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에리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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