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6화
* * *
나는 폭발음이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의 창문 밖을 보았다.
그리고 기사단 본부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지고 시커먼 연기가 엄청나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폭탄테러 같은 건가? 아니면 마법? 뭔지는 몰라도 사태가 굉장히 심각해보였다.
지도창으로 상황을 확인하니, 믿기 어렵게도 거대 인면어가 기사단 본부에 나타나서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기사단 본부가 강가에 위치해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노먼은 무사했지만 루드비히의 이름이 없었다.
설마 또 변한 건가? 아니야, 죽어서 이름이 뜨지 않았을 수도 있어.
나는 루드비히가 굉장히 의심스러웠지만 차마 그가 에리카의 믿음을 배신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지금 즉시 기사단 본부로 가봐야겠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고맙소.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나는 마시던 피와 차를 팽개치고 가르탱과 함께 중량 마법갑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르탱은 내 가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마법갑옷에 놀라기는 했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준비를 끝마친 가르탱은 다짜고짜 커다란 창문을 열고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걸 본 나는 식겁해서 가르탱이 뛰어내린 곳을 내려다보았는데, 그는 한손으로 벽을 잡은 채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속도를 조절하다가 2층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착지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재가 모조리 깨져나갔지만 가르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집이야 부서져도 고치면 그만이라는 게 그의 생각인가보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가르탱이 했던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돌린 다음에 그대로 따라서 뛰어내렸다.
마법갑옷의 성능 덕분인지 생각보다 쉽게 가르탱의 행동을 따라할 수 있었고, 기다리고 있던 그와 함께 마법갑옷의 출력을 올려 전속력으로 기사단 본부를 향해서 뛰어갔다.
그리고 내 사랑들에게 텔레파시로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있지 않았다.
‘라우라, 이리스. 먼저 가있을 테니까 조심해서 오도록 해.’
‘에리카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은 너희들이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라우라, 네가 지휘를 맡아.’
‘네, 레베카님. 부디 조심하세요.’
나는 라우라라면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충분히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이리스와 에리카도 라우라의 말에는 반드시 잘 따를 거라고 믿었다.
만약 셋 중 한 명이라도 믿고 맡길 수 없었다면 가르탱을 바로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비상상황임을 직감하고서 서둘러 길가로 비켜섰고 덕분에 우리들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고 빠르게 기사단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사단 본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다.
성문은 장난감처럼 뜯겨나갔고 성벽을 비롯한 각종 건물과 시설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렵게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불에 뛰어들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그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집단자살극에 충격을 받아서 몸이 경직되었지만 가르탱이 하는 말이 날 정신 차리게 해주었다.
“레베카! 지금은 살아남은 병력을 규합하고 이 사태를 일으킨 적을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요! 침착하게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말이오. 그러니 지금 죽어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나중에 하도록 하시오.”
“네, 가르탱 부단장님! 이쪽에 기사단원들이 지금 벌어지는 사태를 피해서 대피해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오시지요.”
“그걸 어떻게... 일단 앞장서시오.”
가르탱은 몇 초 고민하지도 않고 나를 믿어주었다.
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미니맵 상에 보이는, 가르탱과 마찬가지로 파란색 점으로 표시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향해서 서둘러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겁에 질린 채로 숨어있던 한 무리의 기사단원들을 발견했다.
아무리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자살을 해버리는 상황을 버텨내지는 못한 것 같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기사단원이라면 이런 상황일수록 용기를 가져야하는 법이다! 무기를 들고 적을 죽이고 백성들을 지켜라!”
가르탱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일갈했고, 덕분에 그들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서 정보를 취합하고 나섰다.
“뭐가 기사단 본부를 공격한 건가요?”
“갑자기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거대 인면어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어떻게든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인면어의 현혹마법은 어디까지나 사냥감을 물에 빠뜨리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체적으로 조종해서 자살을 하게 만다는 건 내가 만든 설정 어디에도 없다.
즉, 이번에도 나와 동향출신이 내가 만든 세상에 개입했고, 그것을 가면쟁이들이 알아내서 협력관계를 구축한 게 분명하다.
놈들의 목적은 뭔지 몰라도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나 같은 ‘이세계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건 내 예상보다 내가 만든 세상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다는 거겠지.
그냥 좀 얌전히 살면 안 되나? 협박이라도 받았다면 이해해줄 수 있지만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새끼들은 다 잡아다 족치고 싶다.
“그런데 선글라스는 소용이 없던 가요?”
“네, 그걸 쓰고 있던 사람들도 당했습니다.”
이거 보통 큰 일이 아니네.
선글라스가 거대 인면어의 현혹마법에 대처할 수 없다면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과 똑같은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인면어는 눈을 마주치는 행위를 통해서 사냥감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눈을 무력화시킨다면 선글라스는 필요 없다.
하지만 가면쟁이표 거대 인면어는 짜증나는 가면을 쓰고 있을 게 분명하니 뒤에서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현혹마법에 대처할 수 없다면 우리가 전멸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오.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하오.”
“흐음... 아!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방에서 루드비히였던 거대 인면어를 쓰러뜨리고 획득한 하얀 가면을 꺼내들었다.
거대 인면어는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생체병기다.
즉, 병기라면 쓰는 입장에선 통제가 가능해야하는 법이다.
통제가 되지 않는 병기는 병기로서의 가치가 없다.
나는 가면쟁이들이 자신들의 상징인 가면으로 이러한 통제를 달성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큰 모험이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있을 수는 없다.
“그건 분명 가면쟁이들의 물건 아니오?”
“이거라면 거대 인면어의 특수한 현혹마법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확실한 것이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모험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법갑옷을 입은 상태에서 실패한다면 그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법갑옷을 벗고 무기도 두고 갈 생각입니다. 몸에 밧줄을 묶고 간다면 제가 실패하더라도 신속하게 잡아당기셔서 절 구해주실 수 있겠지요.”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내 맹세코 그대를 무사히 구해주겠소.”
가르탱은 아주 엄숙한 태도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래부터 여자였다면 반했을지도 모르겠는걸.
흠흠, 아무튼 나는 부끄러움이고 나발이고 바로 마법갑옷을 벗고 간단하게 로브로 몸을 가린 뒤에 가면을 썼다.
다행히 난 거대 인면어로 변하지 않았고, 꽤나 쾌적한 착용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가방에 마법갑옷을 집어넣고 기다란 밧줄을 꺼내서 내 허리를 묶었다.
가르탱은 밧줄을 꼭 잡고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에 용기를 내어 거대 인면어가 있는 곳을 향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서 시야를 가릴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숨을 쉬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저 가면을 쓰기만 했는데도 방독면 역할을 수행하다니 정말 신기하다.
가면쟁이들의 가면은 단순히 조직 내에서의 신분증명이나 방어용도로만 쓰이는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나는 뭍에 기다란 몸을 반쯤 내밀고 있는 거대 인면어에게 다가가 놈과 일부러 눈을 마주쳤다.
거대 인면어는 나를 보자마자 내게 가까이 다가왔지만 다행히 내 정신은 멀쩡했다.
놈은 나에게 현혹마법을 걸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군으로 인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가면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구도자님께서 직접 현장을 찾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야? 이 새끼 말도 할 줄 아네?
일단 목소리는 루드비히가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나저나 저 큰 얼굴로 말을 하니까 엄청나게 징그럽다.
“지나가는 길에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 지 확인하고 싶더구나. 임무의 진행상황은 어떻지?”
난 엘카힘의 말투를 떠올리며 최대한 그 년과 비슷한 말투와 태도로 거대 인면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다행히도 거대 인면어는 순종적인 태도로 대답하고 나섰다.
“엘카렌님의 명령대로 기사단 본부를 파괴하고 적들을 대부분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 곧 루드비히가 목표를 탈취할 것입니다.”
엘카렌? 새로운 구도자의 이름이다.
보아하니 엘카렌이 거대 인면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고, 그 놈을 처리한다면 적어도 제르디아에서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 자리에 없는 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역으로 그 놈이 여기에 없어서 내가 거대 인면어를 속일 수 있는 거겠지.
“구도자님?”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런데 분명 한 놈도 살려두면 안 될 텐데...”
나는 거대 인면어를 떠보기 위해서 일단 그럴싸한 말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놈은 커다란 얼굴에서 당혹감을 드러내더니 내 앞에서 대가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모자라서 모두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하필이면 사살명령이 떨어진 단장대리라는 자가 대처법을 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변명이 쓸데없이 길어. 그래도 단장대리의 대처법이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하구나.”
“구도자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거대 인면어는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씨발. 지금 말을 잘못하면 들키겠는데.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사태를 모면할 수 있을 법한 말을 꺼냈다.
“난 원래 좀 더 남쪽에서 그 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이 바빠서 다른 이들의 계획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그래도 너희 계획은 기본적인 개요까지 알고 있었다만 너 같은 훌륭한 개량품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다.”
“죄송합니다. 부디 생각이 짧고 어리석은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알았으니 개요만 간단하게 설명해봐.”
아, 이 새끼 은근히 순진해서 마음에 드네.
앞으로 가면쟁이들을 습격할 때는 이 가면을 쓰고 당당하게 들이대면 되겠네.
“저는 눈을 마주치는 것뿐만 아니라 페로몬을 통해서도 적을 현혹시킬 수 있습니다. 구도자님께서 알고 계셨을 루드비히 같은 시제품에게는 없는 능력이지요.”
“훌륭하구나. 그런데 루드비히라는 녀석은 믿을만한 것이냐?”
“적에게 생포된 뒤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엘카렌님께서는 이번 작전을 통해 루드비히의 충성심을 재확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흐음... 아무래도 불안하네. 루드비히는 어디로 갔지?”
“지하감옥 3층의 독방입니다.”
“내가 직접 놈의 충성심을 확인하겠다.”
나는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루드비히의 본심이 무엇인지, 에리카를 향한 마음에 거짓은 없었는지 반드시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왜 살아있는데도 지도창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지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구도자님. 저는 이곳을 방비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
“넌 아주 헌신적인 자로구나. 이름이 뭐지? 내 특별히 기억해주마.”
“윌리엄입니다. 미천한 제 이름을 물어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살다 살다 인면어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다행히 놈은 연기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서 그런지 밧줄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가르탱과 기사단원들에게 돌아가자, 나를 반기는 것은 사람들의 환영이 아니라 총구였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가면의 방어막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인데도 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레베카, 당신 맞소?”
“네, 보다 시피요.”
나는 가면을 벗어서 신원을 확인시켜주었고 그제야 총을 치우는 가르탱에게 불만 섞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하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소.”
“그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셨어요.”
“정말 미안하오. 나중에 어떻게든 답례를 해드리리다.”
“후훗,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요망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눈웃음을 쳤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람.
남자한테 꼬리치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동을 하다니 역시 나도 현혹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그나저나 무엇을 알아냈소?”
“거대 인면어는 페로몬으로도 사람들에게 현혹마법을 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선글라스와 방독면을 함께 착용하면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지금당장 병력과 장비를 재정비해서 놈을 사냥하도록 하겠소.”
“아, 그 전에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제가 생포했던, 거대 인면어였던 사람이 첩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거대 인면어에게 그 자의 충성심을 확인한다고 했고 놈은 그때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했으니 어디로 도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방금도 말했듯이 어차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릴 시간은 충분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다시 가면을 쓰고서 루드비히가 있다는 지하감옥을 향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면쟁이들이 루드비히를 지하감옥으로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루드비히를 혼자 보낼 정도라면 너무 크고 무거운 물체를 옮기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 루드비히가 에리카의 믿음을 배신했다면 난 녀석을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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