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02화 (102/271)

〈 102화 〉 101화

* * *

나는 제르디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숲 속에 텐트를 치고 루드비히를 눕혔다.

그리고 알몸인 그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루드비히는 치타족답게 호리호리한 체격에 발달된 다리근육을 가졌고, 키는 라우라와 비슷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다.

“오빠! 루드비히 오빠!”

에리카는 정신을 잃은 루드비히의 몸을 흔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오빠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이 기묘한 일에 얽혔다는 것보다 당장 눈을 뜨지 못하는 게 더 마음이 아픈 모양이다.

“에리카, 조금만 기다리면 깨어날 거야. 그러니까 진정하고 기다려보자.”

“흑, 흐윽. 네, 레베카님.”

에리카는 가녀린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애써 울음을 참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아보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고, 그녀를 정성껏 안아주었다.

다행히 에리카는 내 품에서 안정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꽤나 복잡했다.

내가 루드비히를 제르디아 기사단에 바로 넘기지 않고 일단 자리를 피한 이유는 단순히 에리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가면쟁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먼저 루드비히를 심문하여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캐내어 기사단과 노먼보다 유리한 고지에 설 생각이다.

내가 노먼에게 협조하기로 한 것은 의협심 때문이 아니라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니 그에게 딱히 미안할 건 없었다.

하지만 손님으로 초대를 받은 마당에 미움을 사면 곤란하니 적당한 변명거리를 고안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리스, 에리카를 부탁할게.”

“네, 레베카님.”

나는 에리카를 사람 좋은 이리스에게 맡기고 텐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이는 더러워진 마법갑옷을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더러워서야 내 치트가방에 넣을 수도 없다.

나는 마법갑옷을 입고서 근처의 개울가로 이동했고 대검과 방패부터 씻어서 반듯한 바위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다시 마법갑옷을 벗고 옷을 입었는데 당장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옷을 찾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내가 옷을 찾아서 입는 사이에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라우라가 내게 다가왔다.

“레베카님, 마법갑옷을 씻으시게요?”

“응. 도와줄래?”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 전에 이걸 받아주세요.”

라우라는 나에게 이제는 익숙해진 형태의 하얀 가면을 내밀었다.

가면의 색을 보니 전투원의 것이고 금빛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것을 보면 구도자의 소유임이 분명하다.

“이건 어디서 났니? 혹시 거대 인면어야?”

“네, 죽은 인면어의 시체에서 회수한 가면이에요. 레베카님이 그 남자를 챙기는 사이에 제가 챙겼어요.”

“잘했어!”

나는 라우라에게 포상으로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내 입술을 탐하며 만족할 때까지 나를 음미했다.

결국 나는 유두가 한계까지 솟아오르고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후훗, 정말 만족스러운 키스였어요.”

“조금만 더 했으면 이 자리에서 널 덮쳤을 지도 몰라.”

“야외노출섹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우리 다음에 진짜로 해봐요.”

라우라는 내 가슴을 노골적으로 만지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이건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네.

“이런 곳이라면 괜찮겠지.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 루드비히가 문제야. 이리스랑 에리카만 두고 와서 걱정이네.”

“제가 이리스에게 여차하면 죽여 버리라고 했어요. 이리스가 착하고 마음이 여린 친구이기는 하지만 레베카님과 우리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나도 이리스를 믿어. 그리고 네 판단은 분명 유용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중요한 일은 나한테 먼저 말을 해줬으면 해. 알았지?”

“아... 죄송해요. 제가 레베카님의 수고를 덜어드린다는 게 감히 월권을 하고 말았군요.”

“에이, 그렇게 심각하게 굴 필요는 없어. 우리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말이야. 방금처럼 예쁘게 웃어봐.”

“이렇게요?”

“그래! 바로 그 사랑스러운 미소야.”

나는 내 말에 순종적으로 따라주는 라우라가 기특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가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얼마 전에 루시벨이 챙겨주었던 검은 가면과 비교해봤지만 무늬를 제외하면 별다른 차이가 없어보였다.

가면쟁이들의 물건들은 대부분 분석스킬이 통하지를 않으니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렇다고 직접 써서 확인을 해보자니 혹시나 나도 거대 인면어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이건 당사자인 루드비히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지.

“루드비히가 협조적으로 나올까요?”

“생사여탈권을 우리가 쥐고 있으니까 광신도가 아닌 이상에야 살기위해서라도 협력할 거야. 그리고 여전히 에리카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다면 자발적으로 협조하겠지.”

“만약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 가요?”

“그땐 전문가인 너한테 맡길게.”

나는 이미 라우라가 갱단원을 상대로 고문을 해서 정보를 캐내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비협조자에 대한 심문은 그녀가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여린 이리스나 루드비히를 친오빠처럼 여기는 에리카에게는 차마 그런 잔혹한 짓을 맡길 수는 없다.

그런데 라우라가 유혈로 가득한 심문에 능하다고 해서 계속 그녀에게 그런 일을 맡겨도 되는 걸까?

이미 해달라고 부탁해놓고 뒤늦게 후회하는 내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레베카님, 루드비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얼른 마법갑옷을 깨끗하게 만들고 텐트로 들어가도록 해요.”

“그래. 일단 장갑부터 분리해볼까?”

나는 라우라와 함께 마법갑옷을 부위별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각 장갑의 무게는 혼자서도 어렵사리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많았지만 흉갑은 둘이서도 낑낑거리면서 겨우 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수심이 어느 정도 깊었더라면 마법갑옷을 입고 그냥 들어가서 적당히 움직여주면 됐을 텐데 겨우 정강이까지 오는 수심이라서 그럴 수는 없었다.

마법갑옷을 입은 상태로 누워서 몇 바퀴 구르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자갈이 갑옷 사이사이에 끼어버리고 모래가 그 틈으로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서 포기했다.

장갑을 모두 벗겨낸 마법갑옷은 마치 매끈매끈한 가죽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거구의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상태라면 총알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장갑이 없다고 출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무력하다고는 볼 수 없다.

나와 라우라는 장갑을 물로 씻어낸 뒤에 마른 걸레로 물기를 제거하고 마법갑옷전용 특수기름을 살짝 먹인 걸레로 열심히 문질러서 광을 냈다.

그리고 마법갑옷의 내피에 묻어있는 오물을 닦아내는 일도 있지 않았다.

이런 단순한 작업만으로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니, 정말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다 닦았다. 수고했어, 라우라.”

“레베카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재조립만 하면 되겠네요.”

“일단 흉갑은 제외하고 조립하자. 그건 마법갑옷을 입고 조립하는 게 훨씬 낫겠어.”

“아! 우리가 왜 분리할 때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역시 뭐든지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허탈감이 담긴 미소를 짓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재조립도 분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사나 부품을 빠뜨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경을 바짝 썼다.

기껏 마법갑옷을 입고 자신 있게 나섰는데 허무하게 장갑이 떨어져나가는 사태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나는 라우라와 함께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들의 조립을 끝낸 뒤에 마법갑옷을 착용한 채로 흉갑을 들어 올려 라우라가 조립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라우라가 마지막 나사를 단단히 조이는 것으로 재조립도 끝났다.

내 멋진 중량 마법갑옷은 처음 하사받았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번쩍번쩍 광이 났다.

“그래, 이래야지 마법갑옷이지.”

“엄청 기분이 좋아보시네요. 꼭 어린 아이 같아서 귀여워요.”

“너도 네 마법갑옷이 생기면 분명 나랑 같은 반응을 보일거야. 두고 보라고.”

“기대할게요.”

라우라는 이제 막 마법갑옷을 벗고 나온 나에게 옷을 건네면서 미소 지었다.

만약 내 사랑들에게 모두 중량 마법갑옷을 입혀줄 수만 있다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겠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레베카님, 루드비히가 깨어났어요.’

‘알았어. 금방 갈게.’

나는 이리스의 텔레파시를 듣자마자 마법갑옷을 벗어서 치트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대체 오늘 몇 번이나 알몸이 되는 건지 모르겠네.

“저는 뒷정리를 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세요.”

“부탁할게.”

나는 라우라를 뒤로 하고 서둘러 텐트로 향했다.

텐트로 가까이 가니 벌써부터 에리카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누워있는 루드비히를 껴안고 엉엉 울고 있는 에리카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울음소리였다.

에리카는 루드비히를 다시 만나서 기뻐했고, 루드비히도 그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네. 에리카, 루드비히와 나눌 대화가 있으니 잠시만 나와 주겠니?”

내 부탁에 에리카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나 앉아서 이리스의 돌봄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 앉는 루드비히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유약해보이고 겁을 먹은 눈빛이었지만 악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은 안전해보이지만 모든 게 연기일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자.

“당신이 절 구해주신 분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몸에 이상은 없고?”

“네, 덕분에 멀쩡한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면 좋겠어.”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적어도 내 손으로 에리카를 슬퍼하게 만들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 가면을 쓴 놈들과 무슨 관계야?”

“저는 고아원에서 가출했다가 노예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전 그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온갖 생체실험을 당했고, 결국 그런 괴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루드비히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동자에는 그동안 당했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 했다.

어떤 일을 당했었는지 자세하게 물어보면 왠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일단 호기심을 억누르고 다름 질문으로 넘어갔다.

“단체의 이름은 알고 있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 만큼은 철저한 놈들이라니깐... 아,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이 가면은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라 구도자라는 높은 신분의 조직원들이 착용하는 거야. 그런 게 왜 네가 변했던 괴물의 얼굴에 붙어있었던 걸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의 기억은 거의 나질 않는지라... 죄송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괴물이 되었을 때의 기억은 남아있어?”

내 질문에 루드비히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침묵을 지키다가 에리카와 한 번 눈을 마주친 뒤에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컸습니다. 그리고 다른 거대 인면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너처럼 변한 사람들이 또 있다고?”

“네, 그건 확실한데 다들 정확히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거 큰일이네. 자칫하면 제국 전체의 수상무역이 단절될 지도 몰라. 뭐, 그건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들 하시겠지. 거대 인면어의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니?”

“음... 작은 인면어들을 통제할 수 있고 사람들을 한꺼번에 물에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것만큼은 기억납니다.”

나는 애써 별로 남아있지도 않은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최선을 다해서 내 질문에 응하는 루드비히의 태도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자꾸 가면을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뭔가 찝찝했다.

그래서 난 하얀 가면을 가방에 집어넣어서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

“마지막 질문이야. 네가 사람들을 죽였던 기억은 남아있어?”

“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죽어도 모자랄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루드비히는 주먹을 꽉 쥐면서 이를 갈았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차라리 기억을 하질 못하는 게 루드비히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게 마냥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처벌을 받는 것은 루드비히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니 내가 간섭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나 대신에 에리카가 루드비히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그건 오빠가 원해서 저지른 일이 아니잖아.”

“그래도 결과가 중요한 거야. 내가 죽인 사람만 하더라도 1백 명이 훨씬 넘어. 그 유족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하지만 오빠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것 이상으로 내가 죽인 사람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불쌍한 거야. 에리카,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은 좋지만 선을 넘어서는 안 돼.”

“루드비히 오빠...”

에리카는 자신의 과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루드비히를 보면서 결국은 또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겨우 다시 만났는데, 그 사람이 괴물로 변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잔뜩 죽인 상황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다 함께 에리카와 루드비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피가 아니라 정으로 이어진 남매는 함께 슬피 울면서 운명의 장난을 원망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