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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99화 (99/271)

〈 99화 〉 98화

* * *

어제 에리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후로,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에리카의 몸짓 하나하나에 관심이 갔고, 그녀의 목소리만 들리면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그녀가 날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그런 나를 보면서 살짝 질투를 하면서도 보통 중증이 아니라고 놀리며 키득거렸다.

에리카는 나의 바보 같은 태도를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나를 대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제르디아가 보이네. 오늘은 좋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겠어.”

나는 저 멀리에 있는 제법 큰 도시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인류의 적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도시의 성벽만큼 믿음직스러운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르디아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도시들처럼 강을 끼고 있었고, 그 강을 통해서 물자를 실은 배들이 오가는 모습이 작게 보였다.

인류연합제국의 영토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많고 그 강들이 모두 수도로 향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물길을 통해서 세금과 물자, 사람이 운송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여행했던 도시들은 서로를 연결하는 강이나 운하가 없어서 어떤 식으로든 육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 간의 육로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은 3백 년 전에 인류연합제국이 인류세력권을 통일한 뒤부터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통일국가가 없고 각 지방의 도시국가들이 알아서 생존을 도모하던 시대라서 수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도시 간의 거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육로를 통한 여행은 위험한 편이지만 그때는 출발하기 전에 무덤부터 만들어놓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위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나마 마법갑옷은 인류연합제국이 통일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통일을 완수한 뒤로 도시 간의 육로를 개척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아, 베로니카 언니에게 배운 역사에 대해서 곱씹어보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고 얼른 도시로 들어가야겠다.

아까부터 배가 고파도 고급식당에서 먹을 생각에 꾹 참고 있었단 말이야.

“레베카님, 저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좀 수상해요.”

“어디에?”

“10시 방향에 있는 강이요.”

나는 망원경을 들고서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사단과 함께 얕은 강에 뛰어들어서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무언가를 열심히 건지고 있었다.

그 정체가 뭔지 궁금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시체였다.

수십 구에 이르는 익사체들이 강을 떠다니는 모습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상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체들이 엄청나게 떠내려 오고 있고 사람들이 그걸 도시로 흘러가지 않도록 건지고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들은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는 동시에 표정이 굳어버렸다.

내가 하는 말이니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인면어 때문일까요?”

“설마. 인면어는 단독생활을 하고 먹기 위해서만 사냥을 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아. 애초에 그럴 신체능력도 없고. 저건 누군가 학살을 벌이고 시체를 상류에서 유기한 게 분명해.”

나는 인면어의 특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에리카의 질문에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인면어는 사람이나 짐승을 현혹시켜서 물에 빠뜨려 목을 졸라 죽인 뒤에 그 살점을 뜯어먹는, 분명 아주 위험한 물고기이다.

하지만 한 번에 한 사냥감만 현혹시킬 수 있고, 사냥이 성공하면 반드시 보금자리로 끌고 가서 먹기 때문에 물어뜯긴 흔적이 없는 익사체는 인면어의 소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막시안의 사례처럼 또 다른 ‘불청객’의 설정이 개입했다고 가정한다면, 인면어가 참극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한 번 확인해보시겠어요?”

“음... 그래, 혹시 모르니까 가보자.”

나는 일행을 이끌고서 혼란스러운 사건현장으로 향했다.

불청객과 관련된 일이라면 막시안처럼 놈을 처리하고 특별한 스킬을 얻어내고 저런 사태를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가면쟁이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발뺌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정의감만 가지고 나서기에는 이득을 얻을 수 없는 게 놈들과의 싸움이니 말이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말을 달려서 도착한 사건현장에는 끔찍한 악취가 풍겼고, 사람들이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강가에 부서진 나무 조각이나 기둥, 넓은 천 같은 것들이 널브러진 것을 보니 아마도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 같다.

나는 좀 더 사태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말에서 내려서 현장으로 접근하려고 했지만 길목을 지키고 있는 중량 마법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를 막아섰다.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을 할 수 없소.”

“어떤 상황인지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조사 중이오. 잠깐, 그 목에 난 자국은...”

기사는 투구 너머에서 피곤한 목소리로 응대하다가 내 목에 아직도 남아있는 인면어의 기분 나쁜 흔적을 보더니 태도를 바꿨다.

나는 목을 쓰다듬으며 어제 있었던 무서웠던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어제 계곡에서 세수를 하다가 인면어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목이 졸려서 익사할 뻔 했었지만 제 일행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그것 참 다행이오. 여기에 죽어있는 이들은 그대처럼 운이 좋지 못했소.”

“설마 이 사람들이 전부 인면어 때문에 죽었다는 건가요?”

“그렇소. 생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대한 인면어가 배를 전복시키고 그것이 이끄는 인면어 무리가 물에 빠진 사람들을 목을 졸라 죽인 뒤에 그대로 버렸다고 하오.”

“그게 말이 되나요? 배를 전복시킬 정도로 큰 인면어가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죽인 뒤에 먹지도 않았다고요?”

“우리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었지만 희생자들의 목에 그대처럼 인면어의 지느러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믿을 수밖에 없었소.”

기사는 흥분하는 나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내가 알던 설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되뇌며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한테도 시신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앞서 말했지만 관계자가 아니면...”

“전 리제르카의 명예기사인 레베카입니다. 부디 협조해주세요.”

나는 새로운 신분증을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는 신분증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보다 더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상상 이상으로 반가워하면서 악수를 청하는 기사의 손을 한 번 잡아주었다.

“설마 리제르카의 영웅이 우리 도시를 방문할 줄이야! 참으로 영광이오.”

“소문이 제 생각보다 엄청 빠르네요.”

“기사단끼리는 연락망이 항상 돌아가니 이웃영지의 소식은 금방 알 수 있다오. 따라오시오, 바로 단장대리님께 안내해드리리다.”

나는 기사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에 보이는 익사체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살면서 익사체를 보는 건 처음인지라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지나가면서 세어본 시신만 하더라도 거의 20구에 달했고 그 앞으로도 수습된 시신들이 쭉 눕혀져있었다.

죽은 사람의 수를 감안하면 제법 큰 유람선 같은 게 침몰한 것 같다.

기사는 어느 천막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좀 더 화려한 디자인의 중량 마법갑옷을 입은 젊은 불곰족 남자가 서류를 들고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분석스킬을 써보니 베로니카 언니와 비슷한 레벨이었지만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인물은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지만 약간 험상궂게 생겼고, 눈매는 강렬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단장대리님, 리제르카의 영웅인 레베카경이 사건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비극이 벌어진 와중에 희망의 상징이 방문하다니 창조신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것 같군. 내가 직접 안내할 터이니, 자네는 원래 자리로 복귀하게.”

이 사람들이 나를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야? 굉장히 낯간지럽네.

아무튼 단장대리는 나를 안내해준 기사를 돌려보내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불곰족은 원래 덩치와 키가 커서 그런지 그가 입은 마법갑옷은 다른 기사들이 입고 있는 것보다 좀 더 큰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내 앞에 서니 그늘이 졌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만나서 반갑네. 나는 제르디아 기사단의 단장대리를 맡고 있는 노먼 로트라본이라고 하네. 자네가 리제르카에서 펼친 활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네.”

자신을 노먼이라고 소개한 단장대리는 나를 안내한 기사와 마찬가지로 악수를 청했고 나는 이번에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제 일행과 함께 싸운 전우들이 없었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프랑카 기사단의 베로니카 부단장이 보낸 편지의 내용처럼 꽤나 겸손한 사람이로군. 헌데, 자네는 어째서 우리가 맡은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베로니카 언니, 나한테 여행일정을 구체적으로 물어본 이유가 이거였어?

신경 써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이건 과보호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보시다시피 저는 어제 인면어에게 목숨을 위협받았고, 사건의 경위가 제가 아는 인면어의 특성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목에 난 지느러미 자국을 노먼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 자국은 생각보다 빨리 없어지질 않아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재료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군. 자네의 말처럼 이번 사건을 일으킨 인면어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일세. 그래서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명성이 자자한 자네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으니 좋은 징조로 여겨진다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저 같은 외부인이 기사단의 조사에 깊이 관여해도 괜찮은 겁니까?”

“오히려 명성이 자자한 외부인인 자네가 누구보다도 더 믿음직스러운 상황일세. 초면에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부디 날 도와주게나.”

노먼은 초면인 나에게 머리를 숙여가면서 도움을 청했다.

단장대리씩이나 되는 사람이면 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가문에 속한 사람일 텐데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무릅쓰고 나에게 부탁을 하다니 정말 절실한 모양이다.

“제가 목숨을 위협받은 일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니 적어도 제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만이라도 조사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터이니 오늘은 이만 가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기사단 본부의 내 집무실로 오게나. 아, 그렇지. 숙소는 구했는가?”

“도시로 들어가면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르디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내 저택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는가? 기꺼이 방을 내어주겠네.”

기사단에 속한 사람들은 남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

베로니카 언니도 보호가 목적이라면서 날 저택으로 데려갔었지.

흠... 이걸 어쩐다.

귀족의 저택에서 지내면 여러모로 편한 게 많기는 하지만 은근히 자유가 제약된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래도 에리카에게 귀족의 삶을 체험시켜주는 셈치고 받아들이도록 하자.

“노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네, 잠시만 기다려주게.”

노먼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종이에다가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겨 쓰고 도장을 찍었다.

나도 악필이긴 하지만 노먼은 거의 정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글씨가 엉망이다.

“이걸 가지고 내 저택으로 가면 그쪽에서 알아서 그대를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해 줄 걸세. 주소도 같이 적어두었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건현장을 조사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게.”

“네, 노먼님.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노먼에게 인사를 한 뒤에 천막에서 나왔고, 일행과 함께 바깥에 메어둔 말들을 향해 돌아갔다.

얼떨결에 좋은 숙소를 얻게 되었지만 노먼에 노골적으로 내 도움을 청하고 있어서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내가 리제르카에서 나름 활약을 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줄 수 있을까?

인면어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관찰하다가 단서라도 하나 얻으면 다행일 거다.

그리고 외부인이 더 믿음직스러운 상황이라니, 제르디아 기사단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괜히 정치적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제르디아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말아야겠다.

“레베카님, 이번에도 막시안 같은 사람의 소행일까요?”

“글쎄. 나랑 동향 출신이라고 나쁜 짓을 한다는 보장은 없으니 섣불리 판단은 못하겠어.”

나는 라우라의 질문에 뭐라고 확답을 할 수 없었다.

이건 단순히 마법적인 이유로 인해 벌어진 사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면쟁이들일 수도 있겠어요.”

“그럴 가능성이야 언제든지 열려있지.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거대 인면어를 가지고 뭔가 수작을 부리는 건 좀 없어 보이기는 해.”

이리스는 어떤 이상한 상황이든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예시를 들었다.

아직도 정확한 단체명을 모르고, 대체 뭐가 목적인지 종잡을 수 없는 그 사이비집단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충분히 앞장설 수 있다.

물론 내가 한 말처럼 고작 인면어를 가지고 큰일을 도모하려는 건 웃기긴 하다.

현혹마법 같은 걸 쓰는 괴물 같은 물고기라도 선글라스를 쓰는 것만으로도 그 능력을 간단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조사해보시고 두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땐 신속하게 제르디아를 떠날 거야. 노먼이 다른 일에도 날 이용하려는 것 같거든.”

“유명세가 마냥 좋은 게 아니군요.”

“그러게.”

나는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냈다.

그런데 에리카는 내가 손을 떼려고 하자 갑자기 내 손을 꼭 붙잡더니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다시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뭐지? 왜 이렇게 귀여운 거지? 그냥 더 쓰다듬어달라고 하면 될 걸 직접 행동으로 표현하다니 정말 깜찍하다.

“우리 에리카가 레베카님을 엄청 좋아하나보네? 그렇지 않지, 이리스?”

“그러게. 이러다 우리가 레베카님을 뺏기겠는 걸. 후후후.”

라우라와 이리스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장난기가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리카는 엄청 부끄러워하더니 이번엔 아예 내 품에 쏙 안겨들었다.

나는 에리카가 갑작스럽게 연달아 부리는 애교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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