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6화
* * *
이리스는 어제 나랑 섹스를 한 이후부터 내 곁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팔짱을 끼고서 계속 따라다녔다.
그녀의 가슴이 내 팔에 닿는 말랑말랑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라우라는 이리스의 행동을 봐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사실 그녀는 어젯밤부터 내가 빌려준 스마트폰을 들고서 사진 찍는 일에 푹 빠져있다.
주변 풍경이나 셀카는 물론이고 나와 이리스, 에리카의 모습을 찍기도 했다.
라우라는 에리카를 옆에 앉혀놓고 같이 사진앱의 다양한 기능을 살펴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고 그것을 이리저리 편집하면서 재밌게들 놀았다.
내가 처음 스마트폰을 쥐어주었을 때는 터치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원래부터 자신의 물건인 것처럼 익숙하게 행동했다.
“이리스, 너도 같이 사진 찍고 놀고 싶지 않니?”
“전 당분간 레베카님의 곁에서 쭉 지내고 싶어요. 아, 해보세요.”
나는 이리스의 요구에 따라서 입을 벌렸고 그녀는 내 입에 귀한 열대과일을 넣어주었다.
제국의 남부지방에서 재배되는 열대과일을 북부지방에 가까운 리제르카에서 맛보는 건 귀족들이나 즐기는 사치로 통한다.
그리고 그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금 바로 내가 영위하고 있다.
나만 바라보며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미녀들과 함께 아무런 걱정도 없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내가 예전 세상에서 동경했고, 완전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살았던 사치를 실제로 누리고 있으니 꿈만 같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여행경로를 정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지인들에게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특별상점이 있는 대도시에 도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프랑카나 리제르카로 돌아올 수 있지만 그래도 나한테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얘들아, 슬슬 나가자.”
“네, 레베카님.”
내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제안에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나간 김에 맛있는 걸 사먹어야겠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먼저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바로 프랑카로 넘어갈 생각이라서 말을 타고 가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조용한 특수상점은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서 수정구로 필요한 물건들을 검색하여 구입하는 즉시 가방으로 전송시켰다.
치약과 칫솔, 비누, 수건, 물티슈 같은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충분한 양의 마력탄, 야영에 필요한 각종 마법도구, 의약품을 구입했다.
내가 구입한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동으로 설치되고 철거되는 마법텐트다.
마법술식만 작동시키면 10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텐트가 간단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직접 작동이 잘 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구입창에 나오는 자료화면이 제품의 성능을 입증해주었다.
이처럼 마법도구들은 사용법이 자료화면으로 설명되어서 간편했는데, 여기에 출연하는 사람이 왜 하필 나인지는 모르겠다.
난 이런 걸 찍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뭐,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식량만 사면되겠다. 특수상점에서 전투식량 같은 거라도 팔아주면 좋겠는데 먹을 건 물 한 병도 팔지를 않네.’
나는 속으로 특수상점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뒤에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성인용품 코너에서 여러 가지 엄한 물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름 기대되는 부분도 있지만 제발 애널비즈 같은 건 관심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건 몰라도 항문에 넣는 건 생리적인 거부감이 너무 크단 말이야.
다행히 두 사람은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라우라가 촉수생물의 유생이 들어있는 작은 유리통을 들고 관찰하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저건 분명히 나를 덮치기 전에 짓는 미소란 말이지...
설마 저걸 살 생각은 아니겠지? 휴우, 그냥 날 놀리는 거였구나.
나는 유리통을 내려놓고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라우라를 보며 안도했다.
그리고 혼자 동 떨어져있는 에리카 곁으로 다가갔다.
에리카는 어제 반강제로 나와 이리스의 섹스에 참관한 이후에는 조금 서먹한 태도를 보였지만 금방 친근한 태도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들, 특히 에리카와 라우라의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그 이후로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에리카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따금씩 야릇한 숨을 내쉬거나, 자기도 모르게 손을 아랫도리로 내리려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다시 올리거나, 다리를 비비꼬는 모습은 내 성욕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은 에리카를 그 상태로 방치하면서 평범하게 호감도를 올리는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나는 단순히 섹스파트너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섹스가 목적 그 자체였다면 일찌감치 창관을 찾아다녔을 거다.
“에리카, 가지고 싶은 게 있니?”
“뭔가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나는 아까 샀던 동물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마법도구를 에리카에게 내밀었다.
세세한 정보까지는 알려주지 못하지만 말 못하는 동물이 어디가 아픈지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분명 말들을 돌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가지도록 해.”
“감사합니다! 히힛.”
“그렇게 좋니?”
“네! 그동안 말들이 아픈지도 모르다가 갑자기 떠나보내는 게 정말 마음이 아팠는데 이젠 그럴 일이 없어지겠죠.”
에리카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평소에는 감정표현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말과 관련된 일이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그래서 나는 에리카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애정표현을 듬뿍 해주었다.
에리카는 내 손길을 즐기는 듯 했고 내가 손길을 떼자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레베카님. 어제 그... 이리스랑 그걸 하실 때 안에 그냥... 그렇게 하셨잖아요?”
“에리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명확하게 설명해줘.”
“그게, 그, 그러니까... 이리스랑 섹스를 하셨을 때 질내사정을 하셔도 안전한 건가요?”
에리카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인인데도 섹스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는 걸 부끄러워하고, 그런 와중에도 호기심은 많은 에리카가 너무나도 깜찍하다.
“나는 임신하는 것도, 임신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사람이야. 그래서 안심할 수 있지.”
“저는 어제 이리스가 레베카님의 아이를 원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아, 그건 사실이긴 해. 내가 이루어줄 수 없는 꿈이지.”
“언젠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난 당분간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충분히 자유를 즐기고 싶거든.”
“그렇군요. 제가 주제를 넘은 질문을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그럼 이제 다른 애들이랑 합류하자.”
나는 에리카의 손을 잡고 라우라와 이리스를 우리 쪽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의 손에는 종이가방이 하나씩 들려있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나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리는 바람에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대충 감이 잡히기는 하지만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서 아껴두어야겠다.
어쨌든 나는 사랑스러운 미녀들과 함께 워프기능을 사용하여 프랑카로 이동했다.
내가 프랑카에서 할 일은 엠마와 칼스란 부부를 만나서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엠마에게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고 서로 얽혔던 일도 제법 있으니 무시하고 넘어가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일단 모험가길드로 가서 엠마부터 만나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치는 프랑카의 길을 걸어서 도착한 모험가길드에는 예전보다 많은 모험가들이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모험가들이 대부분 E급 의뢰게시판 앞에 몰려있는 걸 보니 내가 없는 사이에 신입이 늘어난 모양이다.
나는 세 사람을 로비에 두고 마침 응대하는 모험가가 없는 엠마에게로 서둘러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엠마 씨?”
“어머나, 레베카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저번 비상사태 이후로 처음 뵙네요. 그동안 소식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죄송해요. 뭔가 일이 자꾸 터져서 모험가길드에 들를 틈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원래라면 오랜만에 의뢰를 받아볼까 했었는데 갑자기 멀리 여행을 갈 일이 생겨서 미리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정말요? 그럼 또 오랫동안 만나기 어렵겠군요.”
엠마는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친절했고, 내가 곤란한 일을 해결해준 뒤로는 굉장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혹시 나를 좋아하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나는 엠마에게 줄곧 성적인 관심을 두긴 했었지만 사귈 생각은 없어서 지금도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돌아올 거예요.”
“말만 들어도 기쁘네요. 사실 제가 한 달 뒤에 결혼을 하는데 레베카 씨께서 꼭 와주셨으면 해요.”
나는 결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혹감마저 느꼈지만 겉으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태도는 무의미한 질투가 아니라,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축하해주는 일이다.
“결혼이요? 정말 축하드려요!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부러울 정도네요.”
“제 소꿉친구에요. 저번 비상사태가 일어난 날에 레베카 씨가 야수족에게서 구출한 사람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에요. 혹시 기억나세요?”
“아! 그 사람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힘든 와중에도 저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죠. 그땐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어요.”
“프란시스라고 해요. 동안이라서 어려보이는 편이죠. 제가 결혼을 결심한 건 그 날 이후로 언제 이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서로 사랑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거든요.”
“두 분이면 분명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보증할게요.”
“후훗, 고마워요.”
“청첩장은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 분명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거예요.”
“이 주소는... 베로니카 부단장님의 저택이군요.”
엠마가 베로니카 언니의 집주소를 알고 있을 줄이야.
하긴, 모험가길드 입장에선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은 해두고 있어야겠지.
“네, 베로니카 언니랑은 정말 관계가 좋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행을 간 동안에 편지 같은 걸 대신 받아준다고 했어요.”
“혹시 명예기사작위를 받으셨나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그야 평민이신 분이 부단장님을 감히 언니라고 대놓고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리제르카에서 공을 세운 대가로 수여받았어요. 아, 제 뒤로 줄이 좀 길어졌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네, 여행길이 안전하기를 기도할게요.”
나는 엠마의 미소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칼스란 부부의 마법무기점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멋진 미중년 칼스란이 나를 반겼다.
“레베카 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 탈 없으셨나요?”
“복잡한 일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극복할 수 있었어요.”
“다행이군요. 저번에 저희가 만들어드린 총기세트는 어떤가요?”
“아, 그건 문제없이 아주 잘 쓰고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베카 씨가 부탁하셨고 이리스가 쓰는 물건이니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한 명 더 늘었군요.”
칼스란은 에리카를 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노예가 아니라 딸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도로테아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말을 사러갔다가 양도받았어요. 이름은 에리카이고 말에 대해서는 전문가에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구나, 에리카.”
칼스란은 에리카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녀는 바로 그 악수를 받아들였다.
내가 이래서 다른 마법무기점이 있어도 여기만 오는 거다.
내 노예들을 자식처럼 대해주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혹시 한손쇠뇌도 판매하시나요?”
“판매중인 것은 없고 도로테아가 쓰던 게 하나 남아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걸 챙겨드리지요.”
“네? 하지만 그건 차마...”
“괜찮습니다. 도로테아가 가지고 놀다가 질려서 창고에 넣어둔 거니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칼스란은 2층으로 올라가더니 조금 있다가 한손쇠뇌를 들고 내려왔다.
생각보다 깔끔했고, 마치 새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희들이 줄곧 관리를 해서 바로 쓰셔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에리카, 이건 이제부터 네 거야. 칼스란 씨에게 소중한 따님의 물건이니까 잘 간수하도록 해.”
나는 머뭇거리는 에리카의 손에 직접 한손쇠뇌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에리카는 마치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분명 예전에 쓰던 물건에 내가 모르는 추억이 담겨있는 거겠지.
“칼스란 씨, 제가 곧 멀리 여행을 떠날 거예요. 오늘은 그걸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저번에도 전국을 돌아보는 게 목표라고 하셨지요?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음... 그런 셈이라고 쳐도 될 것 같네요.”
“그렇다면 가시기 전에 제대로 된 식사대접을 해드려야겠어요. 마침 시간도 딱 맞으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고 식사를 드시고 가시지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희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기왕이면 같이 요리를 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좋은 제안입니다. 하하하!”
칼스란은 크게 소리 내어 웃고는 아내인 미스테린을 불렀다.
우리는 함께 2층으로 올라가 정성을 다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훌륭한 점심식사를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음 같아서는 하룻밤을 자고 가고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