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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95화 (95/271)

〈 95화 〉 94화

* * *

나는 알리시아의 저택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명예기사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알리시아의 은인이라서 허용된 게 아니라 엘레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좋아해주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첫경험 상대로 날 점찍어버렸다.

나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엘레나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와서 위협마저 느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엘레나를 멀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나이에 험한 일들을 연달아 겪었던 엘레나에게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이 필요했고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짧은 시간 만에 중요한 인물로 올라서버렸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엘레나에게만큼은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고 싶다.

‘엘레나가 바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아, 마침 저기 있네.’

나는 저택의 널찍한 복도를 걷다가 코너를 돌자마자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나를 발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여운 동생을 보자마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안녕, 엘레나?”

“레베카!”

엘레나는 내 방문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는지, 나를 보자마자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녀는 위험하다고 말리는 하녀들의 말은 무시하고 복도를 후다닥 뛰어오더니 나에게 몸을 날려서 안겨들었다.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그 모습을 본 알리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지만 딱히 잔소리는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대신 나를 향해 고마움과 원망이 뒤섞인 듯한 애매한 눈빛을 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서와! 오늘은 무슨 일이야? 나랑 놀아줄 거야? 그게 아니면 설마 데이트?”

“진정해. 조만간에 여행을 떠나게 되어서 너한테 미리 말해주려고 왔어.”

한껏 기대한 채 빠르게 말을 늘어놓으며 미소 짓던 엘레나는 내 말을 듣자마자 정색을 해버렸다.

아니, 너무 그렇게 반응이 확 바뀌면 좀 무섭다고.

“갑자기 웬 여행이야?”

“라우라의 고향에 가야할 일이 생겼거든. 그래서 늦어도 일주일 안에 출발할 거야.”

내 말을 들은 엘레나는 풀이 잔뜩 죽은 표정을 지으며 날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는 게 무척이나 싫은 게 분명했다.

오죽하면 눈물까지 글썽일까?

아, 멀찍이서 알리시아가 굉장히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른 도망가야지.

“우리 일단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복도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건 실례잖아.”

“알았어, 따라와.”

휴우, 다행이다. 엘레나는 내 손을 잡고서 알리시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엘레나의 방으로 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방 대신에 응접실로 날 데려가서는 문을 쾅 닫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걸어 잠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나를 반강제로 소파에 앉히더니 맞은편에 떡하니 앉아서 꼭 남편에게 따지는 아내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엘레나,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말아주렴.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는데?”

“일정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널 만나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게 말이 돼?”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에겐 그럴 능력이 있어. 그러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알았지?”

“거짓말 아니지?”

“그럼. 내가 너한테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니?”

“알았어. 믿어줄게.”

엘레나는 의외로 순순히 내 말을 믿어주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겐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말조차 믿어주는 걸 보면 나에 대한 신뢰가 참 큰 것 같다.

엘레나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

“라우라의 고향은 어디야?”

“노르헤임이야.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잘 모르겠어. 거리가 얼마나 돼?”

“제국 영토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인데, 여기서 프랑카까지의 거리보다 대충 10배는 더 먼 곳이야.”

“그럼 가는데 몇 달은 걸리겠다. 라우라는 되게 멀리서 왔구나.”

“고향이 오크 놈들에게 멸망당해서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다고 들었어. 그래서 이번에 가능하다면 고향을 되찾아주고 싶어.”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라우라는 네 사랑을 받아서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 네 사랑을 받을 후보가 한 명 더 생겼고.”

엘레나는 굉장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리카는 귀족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했는지 바짝 겁을 먹고 말았다.

“얜 누구야? 그 사이에 또 노예를 산거야?”

“이름은 에리카라고 해. 구입하지 않고 양도받은 사람이야.”

“그게 그거지. 아무튼 넌 여자를 너무 밝히는 것 같아. 예쁘기만 하면 다 좋은가보네.”

“엘레나, 오해하지 말아줘. 내가 너처럼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수집하는 느낌으로 에리카를 받아들인 게 아니야. 여행을 하려면 말이 필요하고, 그 말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마침 에리카가 내 취향과 목적에 모두 부합한 사람이었을 뿐이야.”

나는 핑계가 아니라 엄밀한 사실을 말했다.

애인이야 당장 라우라와 이리스만 있어도 충분했고 두 사람을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가끔씩 벅찬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세 번째 하렘멤버는 최대한 느긋하게 맞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필요가 우연을 불러들였고 우연이 필연이 되었다.

내가 에리카를 만나게 된 것은 감히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안, 내가 괜히 흥분해버렸네. 에리카, 널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네, 엘레나님.”

“그런데 너희 뱀파이어족은 사람 피를 먹는다던데 그거 사실이야?”

“아니요. 소문이 잘못 퍼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동족과 함께 생활해본 적이 없어서 왜 그런 잘못된 소문이 퍼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헛소문이라서 다행이네. 진짜로 사람의 피를 마시는 종족이면 무섭잖아. 그치, 레베카?”

“그런 괴물이 실존하면 총으로 쏘면 돼. 간단한 해결법이지.”

나는 허공에다가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엘레나가 킥킥거리면서 웃었고 에리카도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뭐야? 이게 그렇게 웃긴가?

흐음...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니 좀 오글거리긴 하네.

“그만 웃어.”

“히힛, 다 큰 어른이 어린 남자애들처럼 행동하니까 너무 웃기잖아. 하하하!”

“뭐? 에리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푸흡!”

“나 참, 괜히 나만 유치한 사람이 되어버렸네.”

나는 결국 엘레나가 웃음을 완전히 멈출 때까지 팔짱을 끼고서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를 향한 경쾌한 비웃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레베카, 나중에 내가 시간이 생기면 나도 네 여행에 데려가줄 수 있어?”

“물론이지.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아. 남작이 되고 본격적으로 시장업무를 시작하면 바쁠 테니까 그 전에 가야할 거야.”

“알리시아 언니는 20살이 되기 전에 여행할 시간을 준다는데 5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러나 몰라.”

“그 분 입장에서는 널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겠지. 네 입장에서는 자유를 박탈당한 기분이겠지만 말이야.”

“맞아. 그래도 그 괴물에게 억압되어서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던 시절보다는 훨씬 낫지.”

엘레나는 방금 전까지 신나게 웃던 밝은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엘레나가 웃을 수만 있다면 놀림 받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기사단과 함께 우리 가족의 저택과 별장을 다 뒤져봤지만 부모님의 행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어. 알리시아 언니와 알론 오라버니는 돌아가셨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나는 두 분의 시신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런 일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에야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지금까지 살해당한 언니, 오빠들의 시신을 모두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 전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짓을 당했지만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둘째 언니는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살아있었다고? 난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난 엘레나의 이름 모를 둘째 언니가 살아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지도창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촉수에서 해방된 희생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숨을 잃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존자가 있었고 그게 엘레나의 둘째 언니라니,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어. 둘째 언니의 뱃속에 들어있던 그 역겨운 괴물들을 제거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었어.”

“너 설마 그걸 직접 봤니?”

“응. 앞으로 남작이 될 사람이니까 내 식구에게 일어나는 일을 모두 봐야한다고 생각했었거든. 볼 때 많이 힘들긴 했지만 후회는 없어.”

“엘레나, 넌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나였더라면 도저히 볼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엘레나의 말을 들으니 숨이 턱 막히고 손이 떨렸다.

당사자인 엘레나는 담담하게 말하는데 도리어 듣기만 했을 뿐인 내가 엄청 힘들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난 별로 대단하지 않아. 막시안에게 휘둘리기만 했고, 그 괴물이 우리 가족에게 저지르는 짓을 막지도 못했는걸. 그래도 둘째 언니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얼른 눈을 뜨면 좋겠어.”

“분명히 금방 정신을 차려서 널 안아줄 거라고 믿어.”

“응. 창조신께서 이번에는 꼭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좋겠어.”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품에 스스로 안겼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편이라도 결국엔 어른의 위로가 필요한 어린 나이인 것이다.

나는 엘레나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없이 그녀를 달래주었다.

“이제 좀 괜찮니?”

“응,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다행이네.”

“레베카, 온 김에 밥 먹고 가. 저번처럼 식사시간에 무서운 말은 하지 않을게.”

“아하하하. 그땐 정말 곤란했었어. 베로니카 언니는 그 사실 모르지?”

“아예 기억 못하시더라. 그래서 너한테 약속했던 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잘했어! 어쩐지 아까 만났을 때 평소랑 다르지 않더라고.”

나는 말 잘 듣는 엘레나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엘레나는 씩 웃더니 눈을 감고서 내 부드러운 손길을 즐겼다.

“에리카, 네 몫도 준비할 테니 부담가지지 말고 먹도록 해.”

“제 분에 넘치는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레나님.”

“에이, 고작 밥 같이 먹는 거 가지고 뭘. 레베카의 애인은 내 친구나 마찬가지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

“노력하겠습니다.”

엘레나는 이미 에리카가 내 여자가 되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아직은 애인까지는 아닌데 말이지.

얼른 오해가 아니라 현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아서 수다를 떨다가 엘레나가 대접하는 맛있는 식사를 얻어먹고 저택에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엘레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개인수업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오전에도 스케줄이 꽉 차있었지만 알리시아가 엘레나를 위해서 특별히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레베카, 다음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잘 지내.”

“응.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가면서 공부해. 알았지?”

“걱정 마. 알리시아 언니가 얼마나 나한테 잘해주시는데. 다음에 또 보자.”

엘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도망치듯 멀어졌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볼을 만지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엘레나님은 아무래도 레베카님을 사랑하시는 것 같네요.”

“나보다 좋은 정혼자를 찾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직 어리지만 몇 년이 지나면 곧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되겠지.”

“두 분이 서로 감정이 상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에리카는 고맙게도 우리 사이를 걱정해주었다.

나도 엘레나와 다투는 일이 생기지를 않기를 바라고 있다.

엘레나는 나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그게 진짜 사랑인지 다른 감정과 착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입장에서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고마워. 아직 시간은 많은데 하고 싶은 거 있니?”

“음... 아니요. 오늘은 특별히 없어요.”

“그래? 그럼 호텔로 돌아가서 쉬자.”

“네, 레베카님.”

나는 뭔가 일부러 원하는 걸 숨기는 것 같은 에리카와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객실에는 라우라와 이리스가 있었는데, 우리보다 일을 더 빨리 끝내고 돌아온 모양이다.

“레베카님, 마침 잘 오셨어요.”

“무슨 일인데?”

“후후후, 일단 눈부터 가려주세요.”

라우라는 다짜고짜 나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부터 선물을 드릴 거예요.”

“정말? 기대되는 걸.”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그럼 얼른 보여줘.”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우라는 나를 어딘지 모를 곳에 세워놓고는 어디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이리스가 뭐라고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선물을 주려고 저러는 걸까?

나는 너무 궁금해서 안대를 벗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손으로 슬쩍 올리려는 걸 에리카가 다시 내려버렸다.

“레베카님, 조금만 더 참으세요.”

“아직 멀었니?”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나는 에리카의 말을 듣고 끈기를 가지고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체감 상으로는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라우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다 준비가 되었어요. 안대를 벗어주세요.”

나는 라우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대를 훌렁 벗어던졌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적응을 마친 내 눈에 보이는 건, 알몸으로 붉은 리본에 묶인 채로 중요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이리스의 섹시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선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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