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3화
* * *
나와 에리카는 아침을 먹고 조금 쉬다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갑자기 둘이서 할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버려서 에리카랑 단 둘이서만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에리카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건 좋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둘이서 사고를 치거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에리카는 제하트와 드라쿠스를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어제 배운 대로 제하트 위에 올라탔고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며 목을 친근감 있게 두드렸다.
에리카는 내가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자신의 말을 탔다.
그렇게 알리시아의 저택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불러 세웠다.
바로 함께 막시안과 맞섰던 루시벨이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아주 건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여전히 노출이 심했다.
나야 보기 좋았지만 에리카는 부담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안녕하세요? 레베카 씨.”
“좋은 아침이에요. 루시벨 씨.”
“못 보던 사이에 새 노예를 들이셨네요? 후훗, 욕심도 많으셔라.”
루시벨은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에리카를 보자마자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좀 아쉬워하는 듯한 눈빛도 보냈다.
역시 루시벨은 나와 하룻밤을 보내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섭섭한 모양이다.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봐주면 좋겠다.
“제가 말을 구입한 업체의 사장님이 말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에리카를 추천해주더라고요. 마침 내 취향이라서 얼른 데려왔죠.”
“레베카 씨는 솔직해서 좋다니까요.”
“적어도 친한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제게 할 말이라도 있나요?”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바로 이거에요.”
루시벨은 가방에서 비단보자기에 싸여있는 물건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보자기를 풀자 아주 상태가 좋아서 새것 같은 스마트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막시안이 죽으면서 놈이 만들어낸 현대적인 문물들은 모두 가루로 변했을 텐데 왜 이게 남아있는 거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예요?”
“기사단 조사원들이 확보한 증거물을 슬쩍 했어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막시안의 시체에서 나온 것 같아요.”
“증거물을요?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루시벨은 용감한 걸 넘어서서 너무 무모한 사람이다.
기사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보통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범죄자에게는 한 치의 자비도 없는 집단이다.
그런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기관을 상대로 대놓고 중요한 증거물을 도둑질하다니 간덩이가 붓다 못해서 아예 터져버린 게 분명하다.
슬럼가에 살면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바뀌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사냥을 한 뒤에 장식용 뿔을 챙기는 느낌으로 그랬어요.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내가 가져서는 안 될 물건 같아요.”
“휴우,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기껏 막시안을 죽여서 마음이 편해졌는데, 괜히 놈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기념품으로 삼으니까 볼 때마다 놈에게 당했던 날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이 물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당신에게 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 핑계로 당신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요.”
“기사단에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뭐, 제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얼굴이 보고 싶으면 그냥 날 찾아오면 돼요. 전우 사이에 핑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전우라는 말이 참 듣기 좋네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어제부터 가게를 옮길 곳을 찾느라 바쁘거든요. 다음에 봐요.”
루시벨은 나에게 손키스를 날리더니 요염한 자태로 걸으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길가에서 루시벨을 보고서 휘파람을 불거나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루시벨의 섹시한 뒷모습을 충분히 감상한 뒤에 그녀가 준 스마트폰에 분석스킬을 써봤다.
다른 정보들이 온통 물음표로 뜨는 와중에 파괴불과, 자동세척, 회수, 반영구가동, 저장용량무제한이라는 치트나 다름없는 기능만큼은 확실하게 나타났다.
막시안의 시체가 끔찍한 상태로 변해서 불에 타서 새까맣게 재로 변하는 와중에도 멀쩡하게 보존된 이유가 있었네.
반영구가동 기능으로 배터리 용량표시가 의미가 없었고, 자동세척 기능 덕분에 막시안의 더러운 흔적도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접속은 물론이고 원래는 가능했던 통화도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막시안이 죽으면서 내용물이 모조리 초기화되었는지 놈이 찍었던 사진이나 동영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음악이나 통화내역, 문자메시지도 없었다.
이런 상태라면 사실상 터치액정이 달린 가벼운 디지털카메라에 불과했다.
‘가면쟁이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실망스럽긴 하지만 우리 애들 사진을 마음껏 찍어줄 수 있어서 좋네. 용량이 무제한이면 기껏 찍은 사진을 지울 필요도 없을 테고.’
나는 우선 셀카부터 찍었다.
예전 세상에서는 셀카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의욕이 막 샘솟았다.
역시 사람은 예쁘고 볼 일인 걸까? 내가 봐도 정말 예쁘긴 해.
“레베카님? 그게 뭔가요?”
“원래라면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는 마법도구 같은 거지만 지금은 사진과 동영상만 찍을 수 있어.”
“제가 아는 사진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작네요. 흑백도 아니고요.”
“아, 흑백은 이렇게 필터를 씌우면 돼. 봐봐, 변했지?”
“우와! 레베카님, 이런 것도 다룰 줄 아시고 대단하세요.”
에리카는 내 셀카사진이 흑백으로 변하는 걸 보더니 감탄사를 크게 내면서 신기해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추켜세워지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에리카가 날 대단하게 생각해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리카, 이건 누구나 배우면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어. 나중에 너한테도 가르쳐줄게.”
“저도 사용해도 되나요?”
“물론이지. 그래도 순서가 있으니까 좀 기다려야할 것 같아.”
“저도 그건 잘 숙지하고 있는 부분이니 걱정 마세요. 어젯밤에 라우라가 저한테 가르쳐줬거든요.”
역시 라우라가 내 여자들 사이에 서열을 확실하게 잡고 있구나.
나는 그녀의 느슨하면서도 칼 같은 서열정리를 필요악쯤으로 여기고 있다.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잘 지내면 좋겠지만 사랑이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이 끼어있으니 순서를 제대로 정하지 않으면 불상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원래라면 내가 주도적으로 정리해야하는 일이지만 첫 번째 노예인 라우라가 알아서 잘하고 있고 이리스와 에리카도 그녀의 말에 순종적이니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이리스와 섹스를 할 차례네.
설마 이리스도 스트랩온 딜도로 날 덮치려고 들지는 않겠지?
라우라에게 당할 때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은근히 무서웠단 말이지.
“간단한 거니까 금방 네 차례가 돌아올 거야. 앞으로 이걸로 우리들의 추억을 잔뜩 남기도록 하자.”
“네, 레베카님. 엄청 기대돼요.”
“그 정도로 좋아해주니까 나도 기분이 좋은 걸. 이제 슬슬 출발하자.”
나는 시간을 확인한 뒤에 에리카와 함께 알리시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어제 승마스킬을 얻어서 느린 속도에서는 적응을 완전히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을 볼 여유가 없는 걸 보면 아직은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나와 달리 에리카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변을 구경하거나 나를 신경 써주었다.
솔직히 얼떨결에 에리카를 떠맡다시피 하긴 했지만 그녀를 내 잠재적인 하렘멤버로 받아들인 건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막시안을 죽인 이후로는 마치 누군가 나에게 일부러 보상을 떠먹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고난이 그만큼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누구든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리면 막시안처럼 만들면 그만이야.
아니면 촉수로 능욕해버려도 되고.
나중에 시간나면 촉수소환스킬을 시험 삼아서 써봐야겠다.
쓰는 방법을 알아야 그걸로 적을 상대로 제대로 쓸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잠시 살벌한 고민을 하는 사이에 우리는 알리시아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에 중량 마법갑옷을 착용한 베로니카 언니가 마침 저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언니의 곁에는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 함께하고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언니를 큰 소리로 불렀다.
“베로니카 언니!”
“어머, 레베카! 내 귀여운 동생. 혹시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
베로니카 언니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언니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헤실헤실 웃고 말았다.
음... 나 아직 정체성이 남자 맞지? 아닌가? 슬슬 헷갈리는 것 같다.
말투나 하는 짓을 보면 정체성까지 여자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간에 아직은 남자인 부분이 더 큰 것 같아. 그렇게 믿을래.
“레베카?”
“아, 미안. 실은 언니랑 의논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래? 중요한 일이니?”
“어느 정도는.”
“그럼 가면서 이야기하자. 내가 오늘은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거든.”
나는 말을 탄 상태로 베로니카 언니와 나란히 길을 나섰다.
말이 네발로 평범하게 걷는 속도는 사람보다 조금 더 빠르지만 마법갑옷을 입은 사람과는 비슷해서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중량 마법갑옷을 입으면 키가 말을 탄 사람의 눈높이보다 조금 작아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대화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레베카, 그 아이는 새로운 노예니?”
“응. 이름은 에리카라고 해. 어제 말을 사러 갔다가 내가 맡게 되었어.”
“그렇구나. 에리카, 만나서 반갑구나. 나는 프랑카 기사단의 부단장인 베로니카 파라이네라고 한다. 네 주인인 레베카의 절친한 친구지.”
베로니카 언니는 말투는 딱딱해도 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덕분에 조금 겁을 먹었던 에리카가 용기를 내어서 언니에게 인사를 했다.
“레, 레베카님의 친구 분을 마, 마,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래, 앞으로 레베카를 잘 보필하도록 해라. 레베카는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데 레베카, 의논하고 싶은 말이 뭐니?”
베로니카 언니는 언제나처럼 멋진 미소를 에리카에게 지어주며 친근감을 보인 뒤에 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곧장 언니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언니, 노르헤임이라는 마을에 대해서 알고 있어?”
“네 입에서 그 마을에 대한 질문이 나올 줄이야. 거긴 10년 전쯤에 코르셰핑 기사단이 오크의 카간 콜탄구트라가 이끄는 군대와 싸우다가 전멸한 비운의 장소야. 그 바람에 코르셰핑 지방의 절반이 오크 놈들의 손에 불타버렸지.”
베로니카 언니는 마법갑옷의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언니의 눈동자는 오크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사실 라우라가 그 마을 출신이야.”
“정말? 그래서 네가 노르헤임에 대해서 물어봤구나. 잠깐, 너 설마 거기로 찾아가려고?”
“응. 어제 별장을 뒤져보다가 마법통로를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서 발견한 쪽지의 좌표가 노르헤임이었거든.”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다른 마족들이면 몰라도 오크들의 세력권에는 웬만해선 가면 안 돼. 놈들은 총을 다룰 줄 안단 말이야. 마력총보다 훨씬 비효율적인 화승총이긴 해도 물량이 많으니 충분히 위협적이지. 괜히 기사단 하나가 전멸한 게 아니야.”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봤던 마족들은 마인족, 마수족 가릴 것 없이 총을 다루는 경우가 없었고 석기나 초보적인 형태의 철기를 다루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크는 화승총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문명수준을 가지고 있다니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오크에 대해서 설정했을 때는 지능이 다른 마족보다 높거나 화약을 다룰 줄 안다는 식의 설정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내 탓은 아니다.
오크가 역사를 거치면서 스스로 문명을 발달시켰겠지만 막시안의 사례를 보면 누군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건 널 위해서 준비된 함정이야. 분명 라우라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는 자의 소행이겠지. 난 그게 엘카힘이라고 생각해.”
“그럼 잘 됐네. 가서 그 년의 목을 비틀어버리겠어.”
“레베카, 현실적으로 생각하렴. 너한테 딸린 식구가 이제 셋이나 되는데 무모한 행동은 자제해야지.”
“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난 라우라에게 고향을 되찾아주고 싶어.”
나는 인연퀘스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으니 고집을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베로니카 언니는 결국 언제나처럼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네가 정 그러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중에 추천장을 써줄 테니까 코르셰핑 기사단 본부에 가거든 단장이나 부단장에게 보여주도록 해. 하지만 너무 큰 도움은 기대하지 않도록 해. 아직도 전력을 복구중인 기사단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일이니.”
“고마워, 언니!”
“얘도 참,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진정하고 똑바로 앉아.”
베로니카 언니는 언니를 껴안는 시늉을 하는 나를 붙잡아주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이번에도 내 편을 들어주는 베로니카 언니가 너무 고맙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거니?”
“늦어도 일주일 뒤에는 갈 생각이야.”
“네가 없으면 쓸쓸하겠어.”
“걱정 마. 나름 방법이 있는 거 알잖아.”
“저번처럼 날 놀라게 만들지는 마렴. 그땐 조금만 더 놀랬어도 방아쇠를 당겼을 거야.”
베로니카 언니는 살벌한 말을 하면서 웃었다.
언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언니의 귀여운 동생인 내 머리에 구멍이뚫릴 뻔 했다고...
“레베카, 가기 전에 엘레나한테는 잘 말해주도록 해. 그 애는 이제 너 밖에 없어.”
“알리시아님이나 다른 친척들이 있잖아. 언니의 남편분도 엘레나에게 엄청 잘해주던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아이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혈육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엘레나가 처음 사귄 친구인 네 역할이 중요해. 부탁할게. 아, 벌써 도착해버렸네. 너랑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너무 잘 간다니깐. 다음에 보자.”
“알았어. 내가 노력할 테니까 엘레나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약속했고, 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제르카 기사단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에리카를 데리고서 엘레나를 만나러 다시 알리시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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