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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93화 (93/271)

〈 93화 〉 92화

* * *

노르헤임은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리제르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대충 봐도 프랑카에서 리제르카까지의 거리보다 거의 10배는 더 멀어보였다.

프랑카도 나름 위도가 높은 지방인데 노르헤임은 아예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해있어서 봄보다 우리가 더 빨리 그곳에 도착할 것 같다.

지도창에는 프랑카와 리제르카를 제외하면 상세한 길이 나타나지 않아서 노르헤임으로 향하는 경로도 정확하지 않았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새로운 지방에 진입할 때마다 모험가길드에 들러서 지도창을 업데이트하고 되도록이면 노숙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또한 가는 길에 마주칠 수도 있는 마족이나 무법자들에 대해서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다들 기본적으로 마법방어구를 착용하고, 나에겐 중량 마법갑옷도 있지만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서는 언제 어떤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거기다 가면쟁이들이 여전히 나를 노리고 있을 테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시 사이를 오가는 상단이나 여행자들과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그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금전적인 문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돈까지 부족했더라면 노르헤임으로 가는 여정이 굉장히 지체되었을 것이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지.”

나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이른 아침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라우라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아침운동을 하러가고 그 다음에 이리스가 깨어났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리는 어제 더 크고 침대가 많은 방으로 객실을 옮겼다.

이유야 당연히 새 식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고급스럽고 푹신푹신한 침대를 보며 굉장히 기뻐했었다.

하지만 샤워를 하다가 라우라와 이리스가 엄한 곳에 피어싱을 한 것을 본 이후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썩 좋지 않게 변했다.

그래,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어제 에리카의 호감도를 확인했을 때는 1이었다.

원래 얼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피어싱을 보자마자 떨어진 건 분명하다.

그래도 0 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노예를 들일 때는 이 부분을 좀 더 신경 써야겠다.

‘그래도 에리카가 날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니까 앞으로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 될 거야. 어차피 전투력이 약하니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나는 어제 확인했던 에리카의 스테이터스가 문득 떠올랐다.

에리카의 힘과 건강은 D랭크, 지구력과 민첩성은 C랭크, 마력은 E랭크였다.

종족특성상 타고난 힘은 약해도 말을 타고 돌보는 일을 꾸준히 해서 전체적인 신체능력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스테이터스는 종족마다 보정치가 달라서 같은 랭크라도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걸 에리카가 낑낑거리면서 들던 물건을 라우라가 거뜬히 드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둘 다 힘이 같은 D랭크라도 뱀파이어족 여자는 유독 힘이 약하게 태어나고 수인족은 전체적으로 신체능력이 강한 편이라서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에리카는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원래 가지고 있던 쇠뇌사격과 어제 배운 총기사격 스킬 2개가 전부였고 모두 스킬레벨은 1이었다.

비전투스킬은 고통내성은 있어도 회피는 없었고 기마술과 재생력강화 스킬이 있었다.

즉, 에리카는 전투원으로서의 능력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다.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은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에리카는 기본적인 스테이터스가 좋은 편인데다 기마술과 재생력강화의 스킬레벨이 일반적인 한계치인 8이기 때문에 꾸준히 사격연습을 시키면 수준급의 전투원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당장 전투원이 부족한 건 아니니까 에리카는 천천히 성장시켜도 될 거야. 지금은 그것보다 호감도 회복이 더 중요해.’

나는 산책을 끝내자마자 호텔로 들어가려다 혹시나 싶어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따뜻한 마구간에는 우리가 맡겨둔 말들이 에리카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받고 있었다.

에리카는 말들을 빗어주고, 먹여주고, 넓은 마구간을 몇 바퀴씩 이끌면서 녀석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거나 포옹을 해주었다.

지금의 에리카는 정말 행복해보였고 그녀의 명랑한 모습을 보는 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어서 지켜볼 수는 없어서 에리카가 놀라지 않도록 일부러 인기척을 내면서 그녀에게 접근해 말을 걸었다.

“흠흠, 저기 에리카?”

“레베카님, 좋은 아침이에요.”

에리카는 내 예상보다 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아침에 나에게 꼭 키스를 하라는 명령이 신경 쓰이나 보다.

“어제는 잘 잤니?”

“네, 덕분에 엄청 좋은 침대에서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기, 그런데 키, 키, 키스는...”

“난 키스나 섹스 같은 건 자발적으로 하는 걸 원하기 때문에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에리카는 엘레나보다도 키가 작지만 성인이라서 그런지 동생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귀여움보다는 성숙한 분위기가 더 큰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부터 말을 돌봐주고 있었구나?”

“네, 제 의무이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거든요.”

“그렇구나. 일은 다 끝나가니?”

“이제 뒷정리만 하면 돼요.”

“내가 도와줄게.”

“배설물을 치우는 일이니까 제가 할게요. 냄새나니까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에리카는 내 도움을 정중히 거절하더니 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라서 도와주고 싶은 건데 말이야.

나는 결국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에리카가 뒷정리를 다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레베카님, 저 왔어요.”

“수고했어. 춥지? 이쪽으로 와.”

나는 내가 어제 준 마법방어구를 차지 않아서 아침의 추위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에리카를 내 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에리카는 선뜻 나에게 다가오질 않았다.

역시 피어싱 때문인가?

“방금 더러운 일을 해서 제 몸에서 악취가 날지도 몰라요.”

에리카가 걱정하는 것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난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단이 있는 사람이다.

“걱정 마. 나한테 탈취제가 있거든. 그리고 난 네가 어떤 상태이든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다음부터는 일단 안기고 봐. 알았지?”

“네, 레베카님.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는 에리카에게 신체에 무해하다고 적혀있는 탈취제를 곳곳에 뿌려주었다.

솔직히 에리카한테서 나쁜 냄새는 하나도 나질 않아서 굳이 뿌릴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안심하고 나한테 오도록 해.”

나는 에리카의 얇은 팔목을 잡고 내 품으로 끌어들여서 꼭 안아주었다.

에리카는 처음에는 뻣뻣하게 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 팔을 들어서 나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 아름다운 가슴 위에 얼굴이 반쯤 묻혀서 거의 코로만 숨을 쉬었는데 그녀의 숨결이 3분의 1정도 노출된 가슴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미 2명의 아름다운 애인을 두고 있어도 미녀에게 또 설레는 나도 참 웃긴 사람이다.

“레베카님, 민감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뭔데? 부담가지지 말고 말해도 돼.”

“피어싱도 반드시 지켜야할 규칙인가요?”

“아니. 그건 분명 내 취향이긴 하지만 강제는 아니야. 결과적으로는 나름 큰 혜택이 주어지는 거지만 네 말대로 민감한 사안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에리카는 작은 목소리로 안도했다.

내 입장에선 좀 아쉬운 상황이긴 하지만.

“라우라와 이리스는 레베카님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가 봐요. 그런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맞아. 그래서 나도 그만큼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만약 네가 내 애인이 된다면 널 다른 애들과 같은 수준으로 사랑해줄 거야.”

나는 에리카의 반들반들한 이마에다 입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에리카는 또 다시 얼굴이 빨개졌고 그녀의 뜨거워진 체온이 내 몸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전 여자랑 사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레베카님을 사랑하게 될까요?”

“그건 나도 뭐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성별을 떠나서 사람 그 자체를 봐주면 좋겠어. 물론 내가 그렇게 잘난 사람도 아니고 연애에 능숙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능력이 있다고 장담해.”

나는 에리카에게 허세를 한껏 부렸다.

최상위권 외모에다가 지갑까지 두둑해지니까 자신감이 마구 커지는 것 같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해야 한다지만 내 노예에게는 이 정도 허세는 부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 그렇지. 아침 먹고 알리시아님의 저택으로 갈 건데 같이 갈래? 아직 혼자 말을 타는 건 좀 불안해서 말이야.”

“물론이죠. 사실 저도 레베카님을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해요.”

“그럼 방으로 돌아가자. 지금쯤이면 라우라와 이리스도 깼을 거야.”

나는 에리카와 함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객실로 들어갔다.

라우라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있었고 이리스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하품을 해댔다.

“레베카님, 에리카랑 단둘이서 어디 갔다 오셨어요?”

“난 산책하고 있었고 에리카는 말을 돌봐주고 있었어.”

“전 우리 몰래 데이트라도 한 줄 알았네요.”

“내가 그런 사람 아니란 거 잘 알잖니.”

“농담이에요. 키스 받으세요.”

라우라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는 열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아침키스치고는 진하게 이어져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꽉 잡아버렸다.

라우라는 키스 끝에 얕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입술을 뗐다.

“그럼 이제 제 차례에요.”

이리스는 내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내게 기대듯 키스를 했다.

나는 이리스의 등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면서 키스를 이어나갔고, 그녀 역시 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키스를 마무리 지었다.

라우라와 이리스가 나에게 키스를 하는 것을 본 에리카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아직 차가운 손으로 식히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듯 했다.

내가 에리카의 볼을 쓰다듬자 그녀는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싫은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급할 게 없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다.

에리카는 내 귀에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고 짧은 탄식을 하더니 얼른 세면대로 향해서 격정적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이고 라우라와 이리스도 그녀의 귀여운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리스가 나에게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레베카님, 에리카를 상대로는 뭔가 기다리시는 느낌이네요?’

‘누구나 적응기간이 필요한 법이잖아. 그리고 에리카는 스스로 내게 다가올 때까지 애를 태워볼 생각이야.’

‘그러다 에리카가 삐치면 어쩌시려고요?’

‘음... 그건 생각해본 적 없어. 뭐,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리스, 너 어제 에리카를 무슨 인형처럼 끌어안고 자더라. 이젠 나보다 에리카가 더 좋은 거야?’

‘아,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요. 그냥 제가 뭐든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하하, 장난이야. 앞으로도 에리카를 많이 귀여워해주도록 해.’

‘네, 레베카님. 히힛.’

이리스는 내가 그녀에게 에리카를 맡기는 듯한 발언에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했다.

그녀가 무해함 그 자체라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레베카님, 오늘은 베로니카님을 뵐 거라고 하셨죠?”

“응. 노르헤임으로 가기 전에 인사는 하고 가야지. 엘레나도 그렇고. 그리고 다른 지인들에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생각이야.”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저랑 이리스가 구입할 테니 에리카랑 같이 마음 편하게 다녀오세요.”

“안 그래도 에리카한테는 같이 가자고 부탁했어. 혼자 말을 타는 건 아직 좀 불안해서 말이야. 그런데 라우라, 너는 이제 괜찮은 거니?”

“뭐가요?”

“노르헤임의 좌표가 나온 뒤로 계속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아, 그건 이제 괜찮아졌어요. 어제는 그냥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어차피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또 힘들어지면 나한테 꼭 말해줘.”

“네, 레베카님.”

라우라는 또 나에게 키스를 했지만 이번에는 방금처럼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번 일에 엘카힘과 연관이 있다면 반드시 그 괴물을 잡아다가 라우라 앞에 무릎을 꿇리고 말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그 좌표를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그곳까지 찾아올 거라고 확신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발견한 걸까?

마법진을 지우고 상자의 내용물을 싹 치웠으면서 좌표만 남겨놓다니 이상하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싶었다면 굳이 노르헤임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가면쟁이라도 조직에 반발하는 사람이거나 놈들과 적대하는 사람의 소행이겠지. 뭐가 되었든 어차피 인연퀘스트 때문에라도 가야하는 곳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나는 적당히 생각을 정리하고 내 사랑들이 씻고 나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오늘은 서로 일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침식사만큼은 같이하고 싶었다.

“레베카님,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럼. 그런 사소한 건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돼.”

에리카는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내 어깨에 몸을 슬쩍 기대었다.

“전 사실 오빠가 있었어요. 친오빠는 아니지만 고아원에 있을 때 저를 친동생처럼 돌봐준 사람이죠. 레베카님과 같이 있으면 자꾸만 그 오빠가 생각나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니?”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납치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네 오빠는 분명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야. 나한테 사람을 찾는 능력이 있으니까 들르는 도시마다 찾아보도록 할게. 오빠의 이름은 뭐니?”

“루드비히라고 해요. 나이는 저보다 3살 더 많고 종족은 치타족이에요.”

“알았어. 만약에 찾으면 바로 너를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에리카는 짐짓 망설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볼에 뽀뽀를 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직접 상태창을 열어보지 않아도 그녀의 호감도가 한단계 더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오빠가 가면쟁이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기를 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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