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0화
* * *
나는 에리카를 위해서 그녀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공원묘지로 에리카를 데려가 겨우 찾아낸 베네사의 묘비 앞에 헌화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덕분에 내가 에리카를 만날 수 있게 되어 고마웠다.
에리카와 함께 베네사를 추모한 우리들은 원래 목적지였던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 다시 리제르카로 돌아왔다.
호텔의 마구간에는 내가 구입한 4마리의 말들이 얌전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위기만 봐서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제법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레베카님, 말을 다루는 법을 에리카에게 배우시는 게 어떨까요?”
“너한테 배우기로 했었잖아.”
“저보다는 전문가인 에리카가 훨씬 더 잘 가르쳐드릴 거예요.”
라우라는 에리카의 등을 슬쩍 떠밀면서 말했다.
그녀는 나와 에리카의 사이가 빨리 진전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럼 날 가르쳐주라.”
“좋아. 여기는 좁으니까 우린 저쪽으로 가자.”
라우라는 이리스를 데리고 먼저 마구간에서 나갔다.
갑자기 나와 단 둘이 남게 된 에리카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라벤더와 같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내가 에리카를 빤히 쳐다보니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그녀의 볼에 손을 올려 다시 내 쪽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친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고혹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이대로 키스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도록 하자.
“에리카, 내가 뭐부터 배우는 게 좋을까?”
“레베카님은 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에리카는 갑자기 적극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면 신이 나기 마련이다.
“그냥 가장 타기 좋은 동물이라는 게 전부야.”
“말은 단순히 탈 것이 아니에요. 교감이 필요한 동료라고 할 수 있죠. 말은 보기보다 똑똑하고 사람처럼 성격이 다양한 동물이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어요.”
“그렇구나. 새로 친구를 사귀는 느낌이네.”
“맞아요. 저도 힘들었을 때 말들 덕분에 기운을 차린 적이 많아요. 특히 이 친구는 제 단짝이나 마찬가지에요.”
에리카는 나에게 사달라고 부탁했었던 진회색 말이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밀자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얼굴도 에리카가 저렇게 정성스럽게 만져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으으... 내가 하다하다 말에게 질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레베카님, 우선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름? 이름이라...”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 말은 검은색이긴 하지만 굳이 색에서 이름을 따고 싶지는 않다.
뭔가 근사하고 멋진 이름 없을까? 정말 고민이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마구간 밖에 있는 라우라와 이리스가 각자의 말에게 이름을 붙이고 직접 불러주는 소리가 들렸다.
라우라는 ‘슈나이더 2세’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었고 이리스는 또 ‘샤리’라고 붙였다.
암컷에서 남자이름을 붙이고 수컷에서 여자이름을 붙이는 내 사랑들의 센스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둘의 사례는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으니 에리카에게 물어봐야겠다.
“에리카, 네 말의 이름은 뭐니?”
“드라쿠스에요.”
“멋진 이름이네. 이름의 유래 같은 게 있니?”
“유명한 뱀파이어족 부족장이에요. 친구와 함께 2백 마리의 오크들을 베어내어 자신의 부족을 지킨 영웅이죠.”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그럼 내 말의 이름도 그런 식으로 지어줄 수 있을까?”
“음... 제하트는 어떠세요? 드라쿠스와 함께 싸웠던 친구의 이름이에요.”
“난 마음에 들어. 제하트, 난 레베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지금까지 나한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흑마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제하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인지하는지 즉시 내 쪽으로 기다란 고개를 돌렸다.
긴장되는 순간이 몇 초 정도 흐르고, 제하트는 큰 머리를 나한테 들이대면서 쓰다듬어 달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손을 올려서 녀석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는데 생각보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제하트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네요. 이 솔로 몸을 빗어주면 더 좋아할 거예요.”
나는 에리카가 가방에서 꺼내준 큼지막한 솔을 받아들고서 조심스럽게 제하트의 목과 어깨를 빗어주었다.
그러자 제하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푸르륵 소리를 내면서 나한테 또 머리를 들이댔다.
나는 한참동안 제하트를 쓰다듬어주면서 녀석과 교감을 했는데 이렇게 큰 동물과 마음이 쉽게 통할 줄은 몰랐다.
“그럼 이제 간식을 줘서 호감을 좀 더 산 다음에 타는 연습을 해볼게요.”
“으, 응.”
나는 이번에는 에리카에게서 당근을 받아서 제하트에게 내밀었고 녀석은 얼른 입을 벌려서 맛있게도 씹어 먹었다.
손에 뜨거운 입김이 지나가고 침이 좀 묻어서 찝찝하긴 했지만 제하트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다.
“레베카님, 이제 제하트의 고삐를 잡고 앞으로 천천히 끌어보세요.
나는 즉시 에리카의 지시에 따랐고 다행히 제하트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날 따라왔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괜히 긴장되고 작은 성과에도 성취감이 크게 느껴지는 게 재밌었다.
“갑자기 올라타면 놀랄 수 있으니 이번에도 천천히 움직이도록 할게요. 먼저 등자에 발을 올리세요. 그리고 한 손으로는 여기 있는 뿔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장을 잡고 올라타세요.”
“알았어. 일단 등자에 발을 올리고...”
나는 에리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 제하트의 위에 단번에 올라타는데 성공했다.
그럼 이제 말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배울 차례다.
“고삐는 말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역할을 해요. 그리고 제가 지금 보여드리는 이 박차를 이용해서 말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제가 끌어드릴 테니까 말의 움직임에 적응해주세요.”
에리카는 제하트의 고삐를 잡고서 널찍한 마구간을 몇 바퀴 돌면서 나에게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왠지 승마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학생의 입장이니 마냥 즐기기만 할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직접 고삐를 잡으시고 뒤꿈치로 말을 차서 앞으로 가게 해보세요.”
“으, 응.”
나는 긴장감에 살짝 떨리는 손으로 고삐를 잡았고 발로 제하트의 배를 툭툭 찼다.
그러자 제하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내가 고삐를 당기는 방향에 따라서 움직였다.
아직 뛰게 만드는 건 좀 무섭지만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좋아요. 잘 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이대로 도시 밖까지 가보도록 할게요.”
“벌써?”
“괜찮아요. 제가 옆에 바로 붙어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에리카는 작은 키에도 가볍게 말에 올라타면서 여유를 부렸다.
나는 보기보다 날렵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에리카의 매력에 또 한 번 홀딱 빠졌다.
에리카가 입고 있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과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좋아하는 캐릭터를 닮은 미모 또한 날 바보로 만들었다.
“레베카님? 말을 타고 계실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안 그러면 크게 다치거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아, 응. 조심할게.”
나는 내 팔을 붙잡고 흔드는 에리카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지금 출발한다고 알렸다.
나와 에리카는 앞장서는 두 사람을 따라서 말을 몰았다.
제하트는 자기가 후방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는데 내가 목을 손으로 두드리며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금방 진정했다.
“레베카님, 말을 직접 몰아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뭔가 되게 신기해. 성취감도 느껴지고 시야도 더 넓어진 기분이야.”
“나중에 승마가 익숙해지시면 더 많은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을 달리며 봄의 향취를 느끼거나, 말과 함께 빗방울을 가르며 여름의 변덕을 피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가을의 고독함을 음미하고, 적당히 쌓인 눈길 위에서 뽀드득 소리를 내며 겨울의 소리를 감상하실 수 있지요.”
“에리카, 넌 되게 감성이 넘치는 사람이구나? 난 계절의 변화를 그냥 자연현상의 일부로만 받아들였는데 넌 좀 더 고차원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
“그런가요? 혹시 제가 하는 말이 부담스러웠나요?”
“아니야, 오히려 듣기 좋았어. 꼭 시를 낭독해주는 것 같았어.”
“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시를 쓰는 취미가 있어요. 남들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지만 레베카님이라면 조금 보여드려도 될 것 같아요.”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제가 하는 말을 비웃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레베카님이 처음이거든요.”
에리카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나는 딱히 호감도를 올리려고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내서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우리 둘만 있을 때 한 번 보여줘.”
“네, 기대할게요.”
에리카는 나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씩 웃었다.
난 당장에라도 에리카를 껴안고 그녀에게 뽀뽀를 퍼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말에서 떨어지기 딱 좋으니 꾹 참았다.
이윽고 우리는 도시의 성벽 밖으로 나왔고,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나타났다.
여기서 별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말의 속도를 올릴 필요가 있다.
“우선 저기서 말을 빨리 달리는 연습을 한 뒤에 가도록 해요.”
에리카의 말에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가 지정한 넓은 공터로 향했다.
그곳은 이리스와 함께 말을 달리는 법을 배워도 될 정도로 공간이 넓었다.
나는 가는 길에 조금 욕심을 내서 제하트의 배를 조금 더 세게 차봤는데 녀석의 발걸음이 그만큼 빨라졌다.
그걸 본 에리카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베카님, 벌써 감을 잡으신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이 속도에 적응한 뒤에 속도를 조금씩 높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급하실 것 없으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천천히 진행하도록 해요.”
“그래, 그러자.”
나는 제하트와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에리카의 조언에 따라 단계적으로 속도를 올려갔다.
체감속도가 엄청 빨라지자 조금 겁이 났지만 옆에서 에리카가 보조를 맞춰주어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곧 전력질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필요한 속도까지는 낼 수 있었다.
난 내가 이렇게 빨리 말이 달리는 속도에 적응할 수 있을 줄은 몰랐었다.
예전 세상에서는 워낙에 운동신경이 둔해서 애를 먹었었는데 새로운 인생에서는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트레이너 덕분에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적당히 말을 달린 뒤에 고삐를 뒤로 당겨 제하트를 멈춰 세웠다.
제하트는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고 더 뛰고 싶은 듯했다.
“에리카, 덕분에 말을 그럭저럭 잘 탈 수 있게 된 것 같아. 고마워.”
“저도 레베카님이 빨리 배우셔서 기뻐요. 다음에 같이 말을 타고 소풍이라도 가실래요?”
“그거 좋지. 봄이 되면 다 함께 가자. 따뜻한 햇볕도 쬐고 꽃을 구경하면서 너희들이랑 같이 놀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나는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웠다.
사랑스러운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즐기는 소풍은 천국이 부럽지 않을 거다.
“그럼 이제 전력질주를 체험시켜드릴게요. 조금만 뒤로 앉아주실래요?”
“이렇게?”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에리카는 드라쿠스에서 내리더니 내가 만든 공간으로 올라탔다.
등자를 밟을 필요도 없이 작은 키로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레베카님, 고삐는 저에게 넘기시고 제 허리를 꼭 잡아주세요.”
“알았어.”
나는 에리카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에 심취하며 그녀의 등에 기대었다.
“그럼 출발할게요.”
에리카가 박차가 달린 부츠로 제하트의 배를 차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감에 말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에리카를 더 강하게 껴안았다.
에리카는 이랴, 이랴하는 소리를 가끔씩 내면서 제하트를 재촉했고 녀석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었다.
느낌상 1분 정도 달린 뒤에 제하트가 멈춰 섰고 에리카는 녀석의 목을 두드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와, 방금은 진짜 대단했어. 휴우.”
“그렇죠? 전 이렇게 달릴 때마다 짜릿한 해방감이 느껴져요. 속이 다 후련해지죠.”
“난 솔직히 좀 무서웠어. 하하하.”
“어쩐지 제 몸을 아플 정도로 잡으시더라고요.”
“많이 아팠어?”
“아니요. 딱 좋았어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이리스도 충분히 익숙해진 것 같으니 추,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너무 늦으면 곤란하잖아요. 아무튼 빨리 가요.”
에리카는 갑자기 말을 더듬으면서 서두르는 척을 했다.
그녀는 얼른 제하트에서 내려서 드라쿠스에 올라탔고 반쯤 도망치듯 먼저 가버렸다.
딱 좋게 아팠다는 거 보니까 마조히스트의 기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뭐, 그건 나중에 섹스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나는 에리카의 늘씬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사랑들과 합류했다.
‘레베카님, 에리카는 마음에 드시나요?’
‘갈수록 매력적이라서 좋아. 친절하기도 하고.’
‘당분간 에리카에게 관심을 많이 주도록 하세요. 저희들은 이미 레베카님의 여자라서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요.’
라우라는 마치 정실부인과 같은 여유를 부리더니 나에게 다가와 볼에 입을 맞추었고 이리스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반대쪽 볼을 차지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답례로 짧게 키스를 해준 뒤에 에리카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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