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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89화 (89/271)

〈 89화 〉 88화

* * *

넓은 가축시장에 온갖 종류의 가축들과 그것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붐볐다.

곳곳에서 짐승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외침이 들렸고 배설물과 볏짚이 뒤섞인 듯한 불쾌한 냄새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

아무리 청결 옵션을 끝까지 올렸다 하더라도 우리에 갇혀있는 짐승들의 불결함은 어쩔 수 없다보다.

시장에는 이미 익숙한 가축인 소나 돼지, 양, 닭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타조나 알파카처럼 보기 드문 가축들도 제법 많았다.

가축들은 판매되는 즉시 구매자의 손에 넘겨져 각각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송되었고 가축시장 바로 옆에 있는 도축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죽기 싫어서 뒤로 내빼는 모습이 좀 불쌍하긴 했지만 예전 세상처럼 배양육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맛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레베카님, 말은 저쪽에서 팔고 있다고 해요.”

내가 가축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에 라우라는 자진해서 시장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고 왔다.

지도창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시장의 배치도도 나오지만 정확히 어떤 가축을 어디서 파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아서 아는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지도창의 배치도에서 가장 넓게 표시된 장소였다.

“제일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구나?”

“다른 가축들과는 달리 뛰는 모습도 보여줘야 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얼른 가보자.”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 말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말들의 울음소리와 그것들이 다그닥다그닥 거리며 걷거나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말을 파는 곳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대체 어떤 말이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제일 비싼 거 달라고 하면 되려나?

마침 상인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눈치껏 나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한 번 물어봐야겠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세계여행에 타고 다닐 말을 사려고 하는데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는 리제르카에서 가장 흔한 종족인 엘프족 상인을 따라서 주변에서 제일 큰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마구간 안에는 제법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아이들도 탈 수 있을 법한 작은 조랑말부터 어깨가 내 키만큼 높은 커다란 짐말에 이를 정도로 품종이 다양했다.

“레베카님, 레베카님! 이 말은 진짜 귀엽지 않나요? 꺄아아, 너무 귀여워!”

이리스는 대형견과 비슷한 크기의 털이 복슬복슬한 말을 보더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것을 쓰다듬거나 껴안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 작은 말보다 이리스의 행동이 훨씬 귀엽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귀엽기는 한데 우리한테는 쓸모없어.”

“라우라, 우리 이 애를 데려가면 안 돼? 응? 레베카님이 용돈도 주셨잖아.”

“안 돼. 우린 그런 큰 애완동물 키울 형편이 안 되는 거 잘 알잖아.”

“히잉, 미안해. 샤리.”

벌써 이름까지 지어버렸을 줄이야.

실망하는 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속으로 라우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개는 몰라도 개 크기의 말은 쓸모가 없는데다 고작 애완동물이 이리스의 관심을 내게서 뺏어가는 것도 싫다.

어젯밤에 술 먹고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칠 뻔 했던 사람이 말하기엔 뻔뻔한 소리지만 내 기분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혹시 여기에 군마도 파나요?”

“죄송하지만 군마는 민간거래가 불법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군마를 기사단과 제국군에 납품하는 업체라도 고객님께는 판매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군마를 납품할 정도로 뛰어난 업체라면 분명 좋은 말들을 판매할 거라고 생각해요. 제 말 맞죠?”

“물론입니다. 저희 업체의 종마들은 모두 유명한 군마의 혈통이고 황실에 납품되는 명마에 비견될 정도라고 자부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저한테 추천해주실 말들도 기대되는 걸요.”

“분명 기대를 충족하시리라 감히 장담합니다. 우선 마구간에 있는 말들 중에서 몇몇을 소개시켜드리고 마음에 드시는 개체가 있으시다면 뛰는 모습도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자부심이 넘치는 상인을 따라서 그가 추천해주는 말을 보러갔다.

상인이 발을 멈춘 곳은 딱 표준적인 크기의 말들이 있는 구역이었다.

모두 털가죽에서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갈기가 찰랑거리는 것이 내 고운 머릿결에 비견될 정도였다.

좋은 혈통은 물론이고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관리를 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다들 좋아 보이는데 어떤 말이 고르는 게 좋을까요?”

“여행용 말은 종합적인 신체능력이 우수해야 합니다. 속력이 빨라도 지구력이 약하면 금방 지쳐버리고 힘이 좋아도 민첩하지 못하면 위급상황에 빨리 대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잘난 것이 없어보여도 모든 능력이 준수한 말이 필요합니다.”

상인은 내게 말들을 한 마리씩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사러왔는데 마침 친절한 상인을 만나서 다행이다.

“사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여행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면 도망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희 업체의 여행용 말은 군마혈통을 가졌기에 정말 용감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하신 고객님들도 많지요.”

“그것 참 위안이 되는 말이군요.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희 업체가 다른 업체에 비해서 조금 가격대가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값어치를 가졌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업체에서 판매하는 여행용 말의 경우에 최소 30만 라기르에서 최대 50만 라기르를 받고 있습니다.”

50만 라기르는 쓸 만한 노예 5명을 살 수 있는 가격이다.

말이 가격이 비싸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한 마리가 사람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가 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격에 따른 차이는 뭔가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혈통의 차이입니다. 말은 어느 종마의 자식이냐에 따라서 가치가 크게 달라집니다.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습성과 성격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최소 가격에 판매되는 개체라도 충분히 우수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기왕이면 더 비싸도 좋은 혈통의 말이 좋겠죠. 50만 라기르짜리로 3마리를 살 생각이니 좋은 녀석들로 골라서 뛰는 모습을 좀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상인은 처음부터 내게서 거금의 냄새를 맡고 접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치 간식을 사는 사람처럼 가볍게 거금을 써버리려는 태도를 보이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원래부터 열의가 넘쳤던 상인은 부하직원들과 의욕적으로 합심해서 거의 20마리에 가까운 말들을 축사에서 꺼내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터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더니 한 마리씩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전부 다 멋져보여서 뭐가 더 나은지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내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노력이 가상했다.

“얘들아, 너희들은 어떤 말이 마음에 드니?”

“저는 저처럼 하얀 녀석이요.”

라우라는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백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털이 하얀색이니 뭔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고 왠지 신비로운 것이 라우라와 잘 어울렸다.

“이리스, 너는?”

“저는... 음... 하얀색 아이 바로 뒤에 있는 밤색 아이요.”

이리스가 고른 말은 털색은 흔한 편이지만 기품 있게 뛰는 모습이 귀족의 예법에 익숙한 그녀와 닮은 것 같다.

라우라와 이리스가 고른 말들이 서로 친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둘의 관계를 보는 듯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나는 지금 나오는 검은 녀석으로 골랐어. 검은색은 뭔가 대장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아.”

우리는 모두 마음에 드는 말을 골랐지만, 나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남아있는 말들이 모두 뛰는 모습을 감상한 뒤에 상인에게 다가갔다.

상인의 눈에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개체가 있으신지요?”

“다들 마음에 들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말들이 있었어요. 우선 저기 있는 검은 말과 저쪽에 있는 하얀색과 밤색으로 살게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데리고 나가시기 전에 저희가 마지막으로 관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매하신 이후에도 언제든지 저희 업체를 찾아오시면 무상으로 각종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거 정말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도 말을 살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야겠어요.”

“저희로서는 고객님께서 재방문하시는 것 자체를 삶의 보람으로 여깁니다. 그야말로 저희들의 노고가 인정을 받는 순간이니 말입니다.”

나는 상인으로부터 일종의 직업정신을 배웠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고객들에게 최대한 좋은 말을 제공해서 업체의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게 분명하다.

“정말 멋진 자세네요.”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말을 관리해보신 경험이나 휘하에 말을 관리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있으신지요?”

“그건...”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라우라를 바라보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마를 가르쳐줄 정도면 말도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레베카님, 전 기본만 알지 전문가는 아니에요.’

라우라는 말이 아니라 텔레파시로 나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내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는 걸 남들이 아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부끄럽지만 경험도 없고 전문가도 없어요.”

“그렇다면 감히 노예를 하나 소개해드리고 마음에 드신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넘겨드리고 싶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아름다운 노예들을 선호하는 것 같으시니 제가 말하는 노예도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제가 미인들을 좋아하긴 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말을 아주 잘 다루는 모양이네요.”

내가 노예를 그냥 사람이라고 지칭하자 상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랐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습니다. 북방유목민 출신이라서 전문교육을 이수한 저희 직원들보다 더 나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이도 고객님의 노예들과 비슷해서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유목민이라... 혹시 뱀파이어족인가요?”

“맞습니다. 소문과는 달리 피를 빨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 그 종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뱀파이어는 내가 설정을 많이 건드려서 흔히 알려진 설정과는 거의 이름만 똑같은 수준의 전혀 다른 종족이다.

사실 나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오니 캐릭터를 참고해서 별도의 오니 종족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양 판타지 세계에 일본식 요괴가 들어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고 흔히 대체품으로 사용되는 오우거는 이미 마족으로 설정해버린 뒤였다.

그래서 만들다가 폐기했던 뱀파이어 설정과 섞어버리는 선택지를 쓰게 되었다.

내가 만든 아르카디아의 뱀파이어는 성별에 따른 체격 차이가 큰 종족이다.

남자는 다른 종족보다 키와 덩치가 크고 그만큼 힘도 세지만 여자는 오히려 평균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라 힘이 약한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힘든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마족과 마찰을 빚기 때문에 성별에 따른 역할이 확실하게 나뉘어져있고 서로의 일을 돕되, 간섭하지 않는다.

반면에 외모적 특징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

오니처럼 매끈한 피부로 덮인 뾰족한 뿔 한 쌍이 이마에서 자라나고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졌으며 위쪽 송곳니가 길쭉하다.

머리카락은 파란색 계열이고 눈동자는 보라색이다.

뱀파이어족은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유제품과 선지를 즐겨 먹는다.

그리고 자신이 도축한 가축의 피를 끓인 뒤에 술과 섞어 마시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가축의 피를 마신다는 설정이 다른 종족에게는 흡혈귀라는 오해를 받게끔 만들어버린 것 같아서 걱정이다.

모든 종족이 인류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인류연합제국이지만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뱀파이어족에 편견이 없으신 분은 처음이군요.”

“전 모든 종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안심하고 노예의 얼굴을 보여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에리카! 에리카! 당장 이리로 오너라!”

상인은 에리카라는 이름의 뱀파이어족 노예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자 곧 키가 대충 150c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성이 상인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내가 설정한 뱀파이어족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건강상태는 양호해보였고 상처나 멍이 없고 상인을 향한 눈빛이 호의적인 것으로 봐서는 대우를 잘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에리카가 미인이라는 것이다.

깊은 바다처럼 검은빛이 감도는 파란색 단발머리는 잘 다듬어져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귀여움보다 성숙함이나 섹시함에 더 가까웠다.

가슴은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아담했지만 골반과 엉덩이가 적당히 크고 키가 작아도 완벽에 가까운 비율을 가진 날씬한 몸매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분석스킬을 쓰니 역시나? 20살이고 레벨은 고작8로 평범한 사람보다 약한 수준이었다.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임시주인님?”

“그 호칭은 여전히 어색하구나. 다른 게 아니라 네 새로운 주인님이 되실 수도 있는 분께 보여드리려고 불렀다. 자기소개를 하도록 해라.”

상인은 에리카의 머리에 붙은 볏짚을 떼어준 뒤에 그녀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에리카는 소심한 태도가 전혀 없었고 호기심 어린 보랏빛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리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뱀파이어족이고 여기서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레베카야. 넌 말을 잘 다룬다고 들었어.”

“가장 자신이 있는 분야입니다. 전투경험은 적지만 스스로의 몸은 지킬 수 있고 가사전반은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병에 걸리지 않아 건강하고 처녀이니 안심하고 안으셔도 됩니다.”

나는 에리카의 적극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런데 굳이 처녀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솔직히 기분은 좋지만.

“라우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다른 건 몰라도 저희들의 말을 돌봐줄 사람으로서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아까 살펴봤는데 말들이 이 친구를 가장 잘 따르더라고요.”

“이리스는?”

“저는... 작고 귀여워서 좋아요.”

“이리스, 그거 진심이야? 그게 전부라고?”

“네, 아까 라우라가 샤리는 데려가지 못하게 했으니까 이 친구라도 데려가요. 네?”

이리스는 벌써부터 에리카를 끌어안고서 한껏 기대를 품었다.

정작 안겨있는 에리카의 기분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리스, 에리카는 애완동물이 아니란다. 그래도 너희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니 다행이네. 에리카, 우리랑 같이 갈래?”

“애완동물 취급만 아니면 좋습니다.”

“걱정 마. 그냥 장난이니까. 그리고 널 위한 말도 있어야겠다. 넌 어떤 말이 좋니? 돈은 충분하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말하렴.”

내 제안에 에리카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우리랑 같이 가게 된 것보다 원하는 말을 고르라는 내 제안이 훨씬 더 충격적인 모양이다.

“저는 예전부터 이 친구랑 제일 친했습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에리카는 진회색 여행용 말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고른 말의 가격은 50만 라기르였지만 여기서 50만 라기르를 더 쓴다고 해서 내 재산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흔쾌히 사주도록 하자.

나는 금괴 두 개를 가방에서 꺼내 상인에게 내밀어 간단하게 계산을 끝냈다.

상인은 고삐와 안장은 물론이고 말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용품들은 한껏 챙겨주었고 개인적으로 에리카에게 용돈도 쥐어주었다.

“고객님, 에리카를 잘 부탁드립니다.”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보살펴줄 테니 염려마세요.”

상인은 거의 부모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에게 간곡한 자세로 부탁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부탁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에리카, 넌 여기서 평생을 보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고객님께서는 노예를 사람으로 대하시는 분이니 안심하고 이 분과 함께 세상을 여행하고 네 뿌리를 찾도록 해라.”

“그동안 저를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상인과 에리카는 서로 포옹하고 등을 토닥여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상인은 내가 세계여행을 한다는 말과 노예를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는 모습을 보고 나에게 에리카를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내가 계산을 끝내고, 에리카가 다른 직원들과도 작별인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말을 끌고서 가축시장 밖으로 나왔다.

얼떨결에 잠재적인 하렘멤버가 생기기는 했지만 에리카가 예쁘니 일단 마음에 든다.

그리고 태도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성격도 그럭저럭 좋은 것 같다.

앞으로 라우라와 이리스랑 같이 친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주인님, 반드시 지켜야할 행동지침이 있습니까?”

“일단 날 주인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노예를 구속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평소에는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지내면 돼. 다만, 나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레베카님.”

“그리고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어. 다른 애들처럼 편하게 말해. 또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웬만하면 다 사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해.”

“네, 레베카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우리 같이 즐겁게 지내자.”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에리카는 처음엔 약간 거부감을 느꼈지만 곧 내 손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에리카에게 새로운 예속각인을 새겨주기 위해서 노예시장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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