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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88화 (88/271)

〈 88화 〉 87화

* * *

윽!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강한 숙취에 시달렸다.

분명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설마 또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얼른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단 난 커다란 침대의 한 가운데에서 속옷 바람으로 누워있고 내 양옆에 베로니카 언니와 엘레나가 자고 있었다.

베로니카 언니는 무려 팬티만 입고 있었고, 엘레나는 잠옷을 입긴 했지만 상의만 입었고 그마저도 풀어헤쳐져서 브래지어가 슬쩍 보였다.

아니, 왜 둘 다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은 건데? 왜!

‘망했다! 알리시아가 날 죽이든, 알론이 날 죽이든, 라우라가 날 죽이든 누군가는 날 죽이려고 들 거야!’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손톱을 씹었다.

베로니카 언니도 모자라서 이제는 새파랗게 어린 엘레나까지... 난 쓰레기다.

리제르카의 영웅이 아니라 리제르카의 죄인이다.

이제 어쩌지? 도망칠까? 아니야, 그래봤자 평생 도망치다 결국엔 잡히고 말 거야.

씨발, 미치겠네! 제발 불러오기 기능이라도 나타나라.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사이에 잠에서 깨어난 엘레나가 나에게 안겨들었다.

“으으음... 레베카, 너 왜 그래?”

“엘레나, 그게... 내가 어젯밤에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니?”

나는 어제 엘레나와 합의했던 대로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벌벌 떨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내 심정을 꿰뚫어봤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술 취한 뒤로 나한테 계속 뽀뽀를 하면서 귀엽다거나 동생이 되어달라고 억지를 부렸던 것 말고는 특별한 일 없었어.”

“정말? 그럼 옷을 왜...”

“아, 이거? 내가 잠버릇이 좀 안 좋아서 그런 거야. 자고 일어나면 항상 이런 식이야. 뭐야? 설마 날 덮쳤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레베카, 변태.”

나는 엘레나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던지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엘레나에게 손을 대질 않아서 정말, 정말 다행이지만 변태라는 단어 하나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분 나빴어?”

“아니, 내 언니랑 오빠들 중에서 날 그렇게 예뻐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그래서 술냄새가 고약하긴 해도 기분 좋았어. 헤헤헤.”

엘레나는 겉으로는 웃기는 했지만 눈동자는 좀 슬퍼보였다.

그래서 나는 엘레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내가 베로니카 언니에게는 무슨 짓을 한 거니?”

“특별한 불상사는 없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걱정해?”

“자고 일어났는데 양 옆에 자고 있는 사람들이 옷을 헐벗고 있으니까 혹시나 싶었지.”

“흐음... 왠지 아닌 것 같은데.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엘레나는 뭔기 미심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베로니카 언니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까지 하는 걸보면 이대로 계속 잘 것 같다.

“레베카, 오늘은 별장에 갈 거라고 했었지?”

“응. 보물찾기를 해보려고.”

“나도 가고 싶은데 오늘부터 남작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지 뭐야.”

“알리시아님은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힘들어도 꾹 참고 배워야 네가 말하는 훌륭한 남작님이 될 수 있어.”

“나도 알아. 그냥 너랑 같이 가고 싶을 뿐이야.”

엘레나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데려가고 싶지만 알리시아가 날 못마땅해 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

그녀는 엘레나의 후견인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새로운 부모님이라도 된 것 마냥 행세했는데 엘레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알리시아로부터 엘레나를 물들이는 나쁜 친구는 취급은 받기 싫어서 그녀에게 공부를 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재밌는 거라도 찾으면 너한테 줄게. 그런데 정말 날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을 거니?”

“친구끼리 굳이 나이로 그래야해?”

“그건 아니지만 뭐랄까? 언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울림이 있다고나 할까?”

“뭐라는 거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야. 아마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냥 네가 이상한 어른인 것 같은데. 몰라, 언젠가 내키면 언니라고 불러줄게.”

“약속한 거다?”

“무슨 약속씩이나 하려고 그래? 나참, 알았어. 약속!”

나는 엘레나의 통 큰 결정에 바보처럼 기뻐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런 나를 보는 엘레나의 표정은 처음엔 약간 한심해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나를 향해 귀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랑 아침은 먹고 갈 거지?”

“물론이지. 베로니카 언니는 그냥 자게 놔두자.”

“응.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 놀아주셨던 걸 보면 널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

“나도 베로니카 언니를 많이 좋아해.”

“알론 오라버니가 질투하시겠다. 히힛.”

그래, 질투만 하면 다행이지.

내가 술김에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면 세상 끝까지 쫓아와서 날 죽이려고 들 거라고.

손에 칼이 들려있든 숟가락이 들려있든 간에 말이야.

나는 진실을 모르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엘레나와 함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방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기사인 베로니카 언니와 달리 몸을 쓸 일이 별로 없는 귀족들은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편이라서 우리를 위해 준비된 아침식사도 간소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아침식사 뒤에 이어지는 대화는 공포 그 자체였다.

“레베카, 사실은 나 아까 거짓말했어.”

“푸흡! 커허억! 콜록, 콜록! 뭐라고?”

나는 마시던 생수가 코로 역류할 정도로 격하게 놀라고 말았다.

아니, 거짓말이라니? 이 요망한 꼬맹이가!

“너 말이야. 술은 적당히 마셔. 베로니카님도 실망이야. 둘이서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그게...”

“상반신에서 끝나서 다행이지 아래까지 내려갔으면 내가 집안어른들한테 다 일러바쳤을지도 모르겠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연히 불륜이라고, 불륜!”

나는 저번에 베로니카 언니와 술김에 섹스를 해버린 이후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기로 해놓고는 결국 또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본격적인 섹스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엘레나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겠지.

“미안해.”

“흥, 나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너, 나한테도 막 키스를 하고 옷을 벗기려다가 내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하니까 멈추더라. 웃기지도 않아.”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엘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쓰레기다! 술만 먹으면 발정난 개만도 못한 쓰레기다!

“알면 됐어. 난 이미 널 용서했어. 그리고 넌 내 친구이고 은인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번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거야. 하지만 조건이 있어.”

“뭐든지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내가 어른이 되면... 내 첫경험은 너랑 하고 싶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날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무, 물론이지! 잠깐, 첫경험?”

나는 내 귀를 의심했지만 내가 잘못들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엘레나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과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나는 엘레나의 과감한 말에 충격을 받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 나이면 알 거 다 알고도 남는 나이란 말이야. 아직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정혼자 문제는 어쩌고?”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랑 그런 짓을 한 주제에 아직 있지도 않는 내 정혼자를 걱정해주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장난이야. 막시안 때문에 난 정혼자를 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거야. 어른이 되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몰라. 그러니까 평생 내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어.”

“내가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데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의 인연을 쭉 이어나갈 거야. 내가 멀리 여행을 가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가 멀어질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어.”

“응. 난 전적으로 널 믿을 거야. 그리고 너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아까도 내가 말했지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거니까. 베로니카 언니도 기억 못하고 있으면 그냥 모른 척 할게.”

“나 같은 구제불능을 믿어줘서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레나를 와락 껴안았고, 엘레나는 대답 대신에 내게 뽀뽀를 하며 애교를 부렸다.

아,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덮치려고 했었다니? 정말이지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엘레나의 넓은 자비와 아량 덕분에 살아남은 나는 그녀와 함께 아침의 티타임까지 마무리했다.

그리고 반쯤 도망치는 기분으로 엘레나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에서 나왔다.

나는 길을 걷다가 심리적으로 지쳐서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맹세컨대 앞으로 술은 입에도 대질 않을 거다.

저주받을 술이여! 세상에서 썩 사라져라!

씨발, 결국은 내 잘못인데 괜히 술 탓을 하고 있네.

‘레베카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잘 들려, 라우라. 어젯밤에는 잘 잤니?’

‘네, 조금 외롭긴 했지만 이리스랑 같이 있어서 괜찮았어요.’

‘나 혼자 즐겨서 미안해.’

‘아니에요. 레베카님은 그럴 자격이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런데 레베카님은 지금 어디세요?’

‘이제 막 저택에서 나온 참이야. 오늘은 막시안의 별장에 가볼 생각이니까 지금 바로 외출준비를 해서 중앙광장으로 나오도록 해.’

‘네, 레베카님. 나중에 봐요.’

텔레파시가 편하긴 하네. 정신을 집중하면 바로 연결이 가능하니까.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약속장소인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중앙광장은 리제르카에 있는 여러 개의 광장중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내가 중앙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라우라와 이리스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내달려서 내 사랑들을 와락 껴안았다.

“레베카님!”

“보고 싶었어요.”

라우라와 이리스는 활짝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주었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아침키스를 해주었다.

난 주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기면서 마음껏 키스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은 먹었니?”

“네, 저희가 밥은 잘 챙겨 먹잖아요. 그런데 어제는 사고치지 않으셨나요?”

“어? 아, 결론부터 말하면 반쯤 미수로 끝났다고나 할까...”

“레베카님, 제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라우라는 조금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괜히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미안해. 그래도 선은 넘지 않았어.”

“그 선이라는 거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베로니카 언니는 상반신에서 끝났고 엘레나는 그... 키스만 했다고 하는데 기억은 전혀 안나.”

“그렇군요.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였다니 어쩔 수 없네요.”

“용서해주는 거야?”

“노예가 주인님을 용서하니 마니 하는 말은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도 아직 어린 엘레나님을 덮쳤다면 많이 실망했을 거예요.”

“내가 다시는 술김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깨버려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제가 사랑하는 주인님은 죄 많은 여자니까요. 후후후.”

라우라는 내 얼굴을 잡더니 다시 한 번 키스를 했다.

아침키스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키스를 하는 바람에 숨을 쉬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라우라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날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리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질문을 던졌다.

“레베카님은 혹시 베로니카님과 엘레나 아가씨를 사랑하시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둘 다 소중한 친구이고 동생이라고 생각해. 베로니카 언니를 상대로는 좀 설레는 일도 많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래서도 안 되고.”

“결국 술이 문제네요. 앞으로 아예 술을 끊는 게 좋겠어요. 정 어려우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맞아. 난 술을 마시면 안 되겠어. 특히 다른 여자들이랑 같이 있을 때 말이야.”

“그래도 레베카님은 참 솔직하신 분이세요. 보통 그런 상황이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서 모른 척을 할 텐데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희들한테만큼은 큰일을 거짓말로 덮고 싶지 않아.”

“그래서 저희들이 레베카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항상 믿음을 주시니까요.”

이번에는 이리스가 나에게 두 번째 키스를 했다.

라우라처럼 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주도권은 이리스에게 있었고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나를 이끌면서 또 한 번 호흡이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리스가 날 좋아주자마자 그녀와 라우라의 이마에 신뢰를 담은 뽀뽀를 해주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하자. 오늘은 우리 셋만 있으니까 말을 타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마차를 빌려서 타고 가는 게 좋겠다.”

“이참에 승마를 배워보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럼 아예 말부터 사러가자.”

나는 라우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려면 무조건 말을 탈줄 알아야 하니까.

마차를 타는 선택지도 있지만 마차가 가지 못하는 길이나 고장하는 상황도 대비해서 말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좋은 말은 엄청 비싸지만 지금은 돈 걱정은 할 필요 없으시겠네요. 가축시장에 가면 말을 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얼른 가보자. 남들이 좋은 말을 다 사가기 전에 말이야.”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손을 잡고서 가축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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