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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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알리시아는 저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들은 그녀에게 미리 지시를 받았는지 급한 일이 있다는 내 말에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알리시아의 방으로 뛰어가다시피 했고 그녀를 만나자마자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좋은 소식이로군. 드디어 그 비열한 자식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겠어. 자네가 내 예상보다 빨리 움직여준 덕분이야.”
“그래도 시간이 촉박합니다. 막시안이 내일 범행을 저지를 예정이긴 하지만 오늘은 이제 몇 시간도 남지 않았고 그 자가 연구소가 제압당한 것을 눈치 채면 지금 당장에라도 실행에 옮길 게 분명합니다.”
“진정해라. 엘레나에게 사정을 전해들은 직후부터 도시의 상수원은 물론이고 상수도에 접근이 가능한 모든 구역에 기사단 병력이 배치했고 철저하게 감시중이다.”
“역시 대처가 빠르시군요.”
“엘레나는 어려도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 아이가 남작이 된다면 이 도시에 만연하고 있는 문제가 많이 해결될 거야. 아무튼 지금부터 기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막시안의 별장으로 출동시키도록 할 텐데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기사단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가능하다면 잠입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알겠다. 곧 해가 질테니 잠입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기사단에는 내가 말해둘 테니 행운을 빌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알리시아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서둘러 그녀의 저택에서 나와 호텔로 향했다.
경량 마법갑옷을 입고서 라우라와 크라우젠을 양팔에 한 명씩 들고서 도로를 달려가는 내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라우라는 재밌어했지만 크라우젠은 굉장히 수치스러운 기분을 느끼는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내가 객실의 문을 벌컥 열자 이번에도 엘레나가 나를 마중 나왔다.
겨우 몇 시간 전에 헤어졌는데도 나를 엄청나게 반가워하는 것이 역시 강아지 같다.
“레베카, 어땠어? 연구소는 찾았어?”
“네, 그리고 지금 바로 막시안의 별장으로 가서 모든 일을 끝내려고 해요.”
“다행이다. 그런데 왜 크라우젠이 너랑 같이 있어?”
엘레나는 내 뒤에 어색하게 서있는 크라우젠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크라우젠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크라우젠은 엘레나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엘레나님, 저는 당신을 지키지 못하고 적의 세치 혓바닥에 놀아난 어리석은 죄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곁을 지켜야하는 사명을 등진 채, 지금까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수도 없이 저질렀습니다.”
“날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오라버니에게 복종했었잖아. 나는 오라버니가 너희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라버니가 무서워서 너희들에게 전해주지 못했어. 너희들이 저지른 죄는 결국 다 용기가 없었던 내 탓이야.”
“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자책하지 말아주십시오.”
“크라우젠, 레베카를 도와서 반드시 오라버니를 막아줘. 나머지 이야기는 그 다음에 천천히 하도록 하자.”
“전력을 다해서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크라우젠은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엘레나에게 충성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엘레나는 얇은 팔을 뻗어서 크라우젠을 안아주었고, 크라우젠은 덩치와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난 여전히 크라우젠을 막시안에게 부역한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으로 여겼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를 살려서 엘레나에게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레베카님, 이번에는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도 네 도움이 필요하던 참이었어.”
“바로 준비할게요!”
이리스는 내가 그 말을 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우당탕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싸움에 적합한 옷을 입고 나왔다.
늘 순둥이 같은 이리스의 눈매가 지금은 결의에 찬 강렬한 기세를 보였다.
도미닉이 죽고 난 뒤에 보였던 바로 그 분위기였다.
이리스 입장에선 가족을 파멸시킨 장본인에게 철저하게 복수할 기회이니 각오가 남다를 만도 할 것이다.
“나도 갈 거야.”
“엘레나님, 제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가야 오라버니의 폭탄을 무력화시킬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보실래요?”
“악마기생충의 알은 그냥 상수도에 부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폭탄을 써서 별장의 지하와 연결된 정수시설을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뿌려질 거야. 그 폭탄은 오라버니와 내 음성에만 반응하기 때문에 무조건 내가 가서 작동을 중지시켜야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거군요.”
“맞아. 나도 위험하다는 건 잘 알고 있고 너희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폭탄을 끄기 전에 오라버니가 죽거나 도망치면 그땐 나만이 도시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니 부디 날 데려가줘.”
엘레나의 각오는 정말 인정할만했다.
15살 소녀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위험한 현장을 내던질 각오를 다지는 모습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레나가 총에 맞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고, 그래서 막연한 추측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있던 제안을 꺼내들었다.
“저한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그게 뭔데? 얼른 말해봐.”
“이게 뭔지 아시죠?”
나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엘레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러자 엘레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오라버니가 매일같이 하루 종일 가지고 노는 마법도구야. 그걸 보면서 낄낄거리는 게 주요일과 중 하나인데 나한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어.”
엘레나의 말을 듣고 나니 막시안은 인터넷에 접속이 가능하고 그걸로 원래 세상 혹은... 현실과 실시간으로 연결이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자기가 저지른 죄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미친놈일 가능성도 높지만.
“이건 먼 거리에 있어도 사람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마법도구에요. 이걸 제 생각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엘레나님이 우리와 함께 움직일 필요 없이 안전한 곳에서 폭탄을 정지시킬 수 있어요.”
나는 엘레나에게 설명을 하는 와중에 각각의 스마트폰에서 알아낸 고유의 전화번호를 각각의 스마트폰에 교차로 저장했고, 하나를 엘레나에게 줬다.
“크라우젠, 엘레나님께 전화 받는 법을 알려드리도록 해.”
나는 크라우젠에게 교육을 맡기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는 엘레나의 스마트폰에다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안 될 가능성이 제법 높다고 생각했었지만 다행히 신호가 갔다.
막시안은 뭔가 특별한 능력으로 친위대원 간의 통화를 막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곧 엘레나는 전화를 받았고 내 목소리를 듣더니 엄청나게 신기해했다.
“우와! 이거 진짜 신기하다. 이것만 있으면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럼요. 그러니까 싸움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세요.”
“응! 고마워, 레베카.”
“고맙다는 말은 일이 다 끝난 뒤에 듣도록 할게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한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 엘레나와 크라우젠을 대동하고서 호텔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레나를 알리시아의 저택으로 데려가서 다시 만난 알리시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녀로부터 목숨을 걸고 엘레나를 지켜주겠다는 보장을 받은 뒤에야 안심하고 저택을 떠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우리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주었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특히 엘레나는 나를 포옹하고서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는데 내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과감하게 이마에 뽀뽀까지 해주자 그제야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내주었다.
“그럼 이제 막시안을 박살내러 가는 일만 남았네. 기사단의 지원이 올 때까지 막시안의 얼굴을 못 볼 수도 있겠지만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간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자.”
“네, 레베카님! 그런데 저 사람은 아는 분인가요?”
“음... 루시벨 씨?”
나는 이리스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멀리서 뛰어오는 루시벨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루시벨은 마력권총 뿐만 아니라 마력소총을 두 자루씩이나 등에 메고서 우리가 모여 있는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완전무장을 하고서 우리에게 합류하러 올 줄은 몰랐었다.
“혹시나 싶어서 달려왔는데 다행이네요. 휴우.”
“현장은 어떻게 됐어요?”
“기사단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연구원들은 모두 연행되었어요.”
“그렇군요. 어쨌든 루시벨 씨를 다시 만나니 좋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까는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꼭 보여주도록 할게요. 그리고 이건 여러분을 위한 선물이에요.”
루시벨은 가방에서 검은색 가면을 꺼내서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난 증거물이라고 생각해서 건드리지 않고 현장에 놔뒀었는데 루시벨은 그런 절차 같은 걸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나보다.
“내가 직접 확인해봤는데 아무나 써도 작동하더라고요.”
“직접이라고요?”
“뭐, 상상에 맡길게요.”
루시벨은 나를 향해 매혹적인 눈웃음을 짓더니 휘파람을 불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크라우젠에게 마력소총을 한 자루 쥐어주고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향하려다가 이리스와 눈을 딱 마주치더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엘레나님 옆에 있던 그 꼬마하녀구나! 내 말 맞죠? 그쵸?”
“네, 맞아요. 그런데 누구시죠?”
“날 기억하지 못하다니 정말 아쉽네요. 10년 전쯤에 엘레나님이 구해주신 여자가 바로 나라고요.”
“아! 그 분이셨구나. 죄송해요,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에이, 죄송할 것까지야. 그런데 어쩌다 엘레나님의 하녀가 아니라 레베카 씨의 노예가 된 건가요?”
“말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막시안 때문이에요.”
“아, 그 새끼는 사방에서 지랄이네... 흠흠, 나도 모르게 용병시절의 험한 말이 나왔네요.”
“루시벨 씨라고 하셨죠? 이번에 막시안을 물리쳐서 함께 원한을 풀도록 해요.”
“좋은 태도네요. 당신의 긍정적인 자세가 참 마음에 들어요.”
루시벨은 이리스에게 악수를 청했고, 이리스는 기꺼이 악수를 받아들였다.
10년 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두 사람이 같은 인간쓰레기 때문에 죽다 살았고 지금은 힘을 합쳐서 복수를 꿈꾸다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출발하도록 해요.”
“저쪽에 보이는 건물 뒤편에 친위대가 쓰는 마구간이 있으니 거기서 말을 타고 가면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거다.”
크라우젠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상가건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마침 해도 떨어지고 있으니 잘 됐다 싶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난 말을 탈 줄 몰라. 이리스도 그렇고.”
“그럼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의 뒤에 같이 타면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서두르자고.”
“간단한 해결책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알았어, 얼른 가자.”
우리는 크라우젠을 따라서 마구간으로 향했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원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말을 뺏어 탔다.
나는 자연스럽게 라우라의 뒤에 탔고, 이리스는 뭔가 부러워하는 눈빛과 함께 루시벨의 뒤에 탔다.
크라우젠은 우리 중에서 두 사람을 합친 것만큼 무거워 보이는 사람이니 대충 밸런스가 맞는 것 같다.
“내가 앞장서서 달려갈 테니까 뒤쳐지지 않게 정신 바짝 차려서 따라오도록 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안전하게 다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
“걱정 마세요. 오히려 내가 앞지를지도 몰라요.”
“길은 알고 있어요?”
“앗!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부끄러우니까 빨리 출발해요.”
루시벨은 크라우젠 앞에서 잘난 척을 하다가 그에게 핵심을 찔리자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크라우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선두에 섰다.
도시나 마을 내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게 불법이지만 긴급한 상황이니 누군가 앞에 갑자기 튀어나오지를 않기를 바라면서 내달렸다.
나는 라우라의 허리를 꼭 붙잡고 그녀의 등에 바짝 기댄 상태로 고속으로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마법갑옷을 입고 있어서 크게 다치지는 않겠지만 괜히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우리는 순식간에 도시를 빠져나와서 위병들의 거친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막시안의 별장을 향해서 흙길을 빠르게 내달렸다.
말들은 사람이 따라할 수 없는 거친 숨소리를 마구 내뱉으며 쉬지 않고 달렸고,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에 막시안의 별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창으로 살펴본 별장은 생각보다 경계가 허술했고 병력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막시안의 이름은 별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다가 벽으로 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분명히 비밀연구소처럼 지도창의 능력을 차단하는 자동문이 설치된 공간으로 들어간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막시안이 기생충폭탄을 가동하려는 것 같아. 당장 진입하자.”
“별장에는 마력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도 있으니 마법갑옷을 과신하지 않는 게 좋다. 우선 내가 가서 입구를 열겠다.”
크라우젠은 당당하게 친위대원 둘이 지키고 있는 별장의 대문으로 다가갔다.
친위대원들은 아직 비밀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해 듣지 못했는지 크라우젠을 반갑게 맞이했다.
크라우젠은 그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뒤에서 친위대원들의 목을 팔로 감싸서 강하게 졸라 기절시켰다.
위병들을 간단하게 처리한 크라우젠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대문을 열었고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최대한 사뿐사뿐 그리고 빠르게 이동해서 대문을 통과했다.
“최대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막시안에게 가야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뒤를 바짝 따라와.”
나는 동료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지도창을 연 상태로 앞장서서 움직였다.
우리들의 어깨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막중했지만 반드시 막시안을 잡아서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의 복수를 달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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