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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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관의 지하실에는 아무런 물건도 없었지만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로가 하나 있었다.
통로에는 마법으로 작동하는 등불이 줄지어 있었고 지하실에서는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깊이 땅굴을 팔 생각이었다면 굳이 창관 밑에다 비밀연구소를 만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통로의 끝에 적들이 있어. 둘이서 나란히 서있는 걸 보면 지하실 입구를 지키던 놈들처럼 막시안의 부하가 분명해.”
“당신은 그런 걸 어떻게 아나요?”
“일종의 마법이라는 것만 알고계세요.”
“그러면 더 궁금해지는데 말이죠.”
“중요한 국가기밀이라서 말해줄 수가 없어요.”
나는 이번에는 고향타령을 하지 않고 국가기밀이랍시고 핑계를 댔다.
기밀이라는 말을 들은 루시벨은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딱히 첩보원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뭐,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그냥 믿어드릴게요.”
“파고들지 않아서 참... 고맙네요.”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네요. 그럼 잡담은 그만하고 가볼까요?”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라우라에게 확인을 맡기도록 해요.”
“나도 함정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 같이 볼게요.”
루시벨은 라우라와 함께 통로에 있을 지도 모르는 함정을 확인했고 나는 두 사람이 안전을 확인하는 대로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함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우라는 칭찬을 받을 기회를 날려서 아쉬운 것 같고 루시벨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심통이 난 것 같다.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채로 계속 전진했고 적들과 불과 10미터 거리의 모퉁이 뒤에서 멈춰 섰다.
모퉁이만 돌면 바로 적들과 눈을 마주칠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지만 아직 들키지 않았는지 적들이 잡담을 시작했다.
“슬슬 교대시간이네. 넌 오늘도 창녀들 따먹고 갈 거냐?”
“아니,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려고. 이틀 연속으로 떡치면 생활비가 부족하거든.”
“다들 남작님이 주는 선물로 즐기는데 너 혼자 거부하고 창녀만 따먹는 건 신기하단 말이지.”
“난 팔다리 멀쩡하게 달려있고 정신도 제대로 있는 애들이 훨씬 더 좋아. 창녀들은 돈을 밝혀도 돈을 받은 만큼 날 제대로 위로해준단 말이다.”
“야, 그 까다로운 창녀들 따위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조임이 미쳤다니까. 너도 속는 셈치고 딱 한 번만 그것들 보지를 써봐. 움직일 때마다 경련하면서 물 뿜어내는 거 경험하면 너도 그것들만 쓰게 될 거다.”
“지랄하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침 질질 흘리는 그게 사람이냐? 그냥 고깃덩어리지. 아, 씨발 내가 빚만 없었어도 너희들처럼 미친 새끼들이랑 같이 일하지도 않았을 텐데.”
“병신새끼, 지 혼자 존나 고상한 척 하네. 남작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쫄보새끼가.”
“좆까! 남작님한테서 전화 왔으니까 닥치고 있어.”
전화? 지금 전화라고 했어? 단순한 무전기 같은 마법도구도 없는 세상에 휴대폰이라니?
나는 진짜 휴대전화가 맞는지 궁금했지만 머리를 조금만 내밀어도 바로 들킬 거리라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네, 남작님. 지하는 이상 없습니다. 지상팀이 말입니까? 제가 바로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래?”
“지상팀 새끼들이 연락이 안 된다는데?”
“씨발, 좆됐다. 또 개같이 까이겠네.”
“우린 그래도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하지는 않잖아. 말로만 까이고 시말서 쓰는 걸로 끝이니까 엄살 부리지 마.”
“하, 새끼 또 자기 혼자 잘난 척이네. 빨리 가서 확인해보자.”
대화를 끝낸 적들은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라우라와 루시벨에게 눈과 손짓으로 뜻을 전했고 적들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다함께 덮쳐서 순식간에 제압했다.
분명 우리보다 힘이 세고 덩치고 큰 남자들이었지만 기습을 당하고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지거나 목에 칼날이 드리워진 상태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가방에서 밧줄을 꺼내서 라우라에게 넘겼고, 전직 현상금사냥꾼인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적들을 꽁꽁 묶어버렸다.
“씨발, 지상팀 새끼들이 연락이 안 되는 이유를 알겠군.”
“묻는 말에나 잘 대답해. 이건 어떻게 손에 넣었지?”
“남작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다. 그것 말고는 몰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너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니까 내가 가질게.”
나는 전화를 받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인 호랑이족의 몸을 뒤져서 스마트폰을 찾아냈고 불평 많았던 목소리의 소유자인 휴먼족에게서도 휴대폰을 압수했다.
놀랍게도 적들이 사용하는 휴대폰은 스마트폰이었고 내가 이 세상으로 넘어오기 몇 달 전에 출시되었던 최신형 모델이다.
우리나라,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출시된 한정판 모델이니 막시안은 나처럼 한국출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 말고 다른 지구인이 있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미친놈인지 모르겠다.
‘막연한 추측만 하지 말고 일단 스마트폰을 확인해서 단서를 찾아보자.’
나는 액정이 조금 깨진 스마트폰을 켰다.
스마트폰에는 지문인식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호랑이족의 손가락 지문을 찍어 잠금을 해제하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인터넷 연결이 불가능해서 기본적인 앱만 깔려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화와 문자가 가능했고 그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내가 문자메시지를 쭉 훑어보면서 알아낸 특이한 점은 막시안으로부터 떨어지는 지령만 있을 뿐, 놈에게 답변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메세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막시안은 모종의 방법으로 얻어낸 스마트폰을 부하들에게 지급하고 그것을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것이다.
이게 막시안의 가진 능력의 한계인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제한을 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막시안이 대체 어디서 스마트폰을, 그것도 한정판만 구해서 부하들에게 뿌릴 수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일종의 치트능력이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설명이 되겠지만 숨겨진 스킬이라도 찾아낸 것일 수도 있으니 놈을 죽이기 전에 잡아서 적절하게 심문을 할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니, 잠깐만! 가면쟁이들이 준 것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가면쟁이들의 수장이 지구인이라는 건데 그게 사실이라면 난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 세상의 게임시스템을 즐겨온 썩은 물에게 찍혀버린 것이다.
으으... 제발 스마트폰이 막시안의 치트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빌어야겠다.
‘그런데 업무지시라고 해봤자 특별할 것도 없네.’
나는 실망감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꺼버렸다.
그냥 언제 어디서 근무를 서라는 수준에 불과한 내용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자신을 경호하는 일에 동원하거나 노예를 수급해서 보급하라는 명령이 전부였다.
아, 그리고 우리에게 제압당한 놈들이 말했던 ‘선물’을 마음껏 즐기라는 내용과 함께 사진이 첨부된 문자메시지가 몇 개 있었다.
넌 그걸 보자마자 호랑이족이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매춘부들은 팔다리 멀쩡하게 달려있고 제정신이라서 좋다는 말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불쌍한 여자들은 마족의 씨받이로 전락한 피해자와 상태가 거의 같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나를 열 받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막시안은 이 세상 사람들을 같은 사람이 아니라 NPC정도로만 여기는 게 확실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잠깐일 뿐이었고 지금은 당연히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막시안의 악행에 이가 갈린다.
“레베카님, 갑자기 왜 화가 나셨나요? 그 납작한 마법도구 때문인가요?”
“아니야. 이건 그냥 고향에서 쓰던 일종의 장거리 대화수단이야.”
“저번에 말씀하셨던 무전기 같은 거군요.”
“그것보다 훨씬 더 기술적으로 진보된 거라고 할 수 있어. 내가 화가 난 이유나 이 마법도구에 대한 건 나중에 더 말해줄게.”
나는 라우라의 질문에 최대한 간단하게 대답한 뒤에 호랑이족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해.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마법도구는 막시안이 준 거야? 아니면 가면을 쓴 놈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남작님이 우리 친위대에게만 주신 물건이다. 출처 같은 건 모른다.”
“그래? 그렇다면 저 문 너머에 있는 건 뭐하는 곳이지?”
“연구소다.”
“마물을 연구하는 곳 맞지?”
“이미 알고 온 모양이군.”
“대강은 말이야. 엘레나님이 막시안의 미친 계획을 알려주신 덕분이지. 엘레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시안을 막고 싶어 하시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엘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호랑이족은 깜짝 놀라더니 곧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옆에 있는 휴먼족은 아주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족을 노려봤다.
“야, 씨발. 너 전부 털어놓으려는 거 아니지? 어?”
“난 엘레나님만큼은 배신할 수 없어.”
오호라, 엘레나가 여기서도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모양이네.
엘레나는 여러 사람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고 그게 다시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고 있는 형세다.
어쩌면 엘레나의 선한 마음씨가 막시안을 저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정작 저 휴먼족이 엘레나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불쾌했지만 말이다.
“미친 새끼야! 그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가 뭐라고 우릴 전부 배신하려는 건데? 너도 우리랑 똑같이 좆같은 일을 저지른 주제에 이제 와서 빠져나가려고? 말해봐 병신아!”
“그래 이 씨발새끼야! 난 분명 인간쓰레기이지만 너희들은 그 이하잖아! 뭐? 조임이 좋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선물은 씨발 멀쩡한 여자들 팔다리 다 자르고, 어? 존나 미친 짓에 써먹다가 폐기한 거라고!”
“아, 진짜 귀 존나 아프네. 어차피 노예인데 무슨 상관인데? 자기도 실컷 끌고 와놓고는... 아아악!”
휴먼족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놈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일단 넌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을 것 같네.”
“자, 잠깐만! 잠깐!”
나는 마력산탄총을 꺼내들고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겨서 놈의 머리통을 아예 날려버렸다.
정말 속이 시원한 장면에 라우라는 박수까지 쳤고 루시벨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피와 살점, 뼛조각을 잔뜩 뒤집어 쓴 호랑이족의 표정은 심각했다.
“나도 죽일 건가?”
“아니, 넌 최소한의 인간성이 남아있는 것 같으니까 곧 남작이 될 엘레나에게 직접 처벌을 받게 하려고. 그래봤자 사형이겠지만.”
“흥,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이름은?”
“크라우젠이다.”
“좋아, 크라우젠. 엘레나님을 위해서 이 문을 열어주지 않겠어?”
“손바닥으로 인식해야 열린다. 그리고 안에는 연구원들이 있으니 총을 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연구원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지?”
“그래.”
“그렇다면 놈들의 약점을 알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놈들의 마법방어막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는 것만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한 명이 시선을 끌고 다른 사람이 사각지대를 노리는 식으로 공격해야해. 그리고 명치 부근에 있는 인조마핵을 부서야 완전히 죽어.”
나는 루시벨은 물론이고 크라우젠에게도 가면쟁이들의 약점을 가르쳐주었다.
크라우젠이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를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총알받이 정도로 이용해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크라우젠에게 분석스킬을 써서 레벨을 확인해보니 루시벨과 비슷한 수준의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니 총알받이 이상의 성과를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라우라, 이 사람을 풀어줘. 문을 열어야지.”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책임질게. 그러니까 풀어주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라우라는 내 명령에 따라서 크라우젠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크라우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정작 크라우젠은 어떠한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넌 정말 사람을 잘 믿는군.”
“몸을 사리는 것도 좋지만 의심이 너무 많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거든.”
“하! 무슨 높으신 분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네. 적어도 지상으로 나갈 때까지는 확실하게 협조한다고 약속할 테니 마력권총이라도 돌려주지 않겠어?”
“일단 기다려봐.”
나는 크라우젠의 말을 들어주기에 앞서서 가방에서 마법갑옷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이젠 마법갑옷을 입어야할 때는 남들 앞에서 옷을 다 벗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적응이 빠른 생물인 것 같다.
“당신은 설마...”
“곧 명예기사가 될 사람이지.”
크라우젠은 물론이고 루시벨도 내가 마법갑옷을 입은 모습을 보더니 바짝 긴장했다.
마법갑옷은 원칙적으로 기사 혹은 기사단의 병사들만 입을 수 있으니 평민인 두 사람의 반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넌 분명히 엘레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제 어머니를 살려주신 분이니까요.”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그냥 편하게 말해. 그런데 엘레나님이 네 어머니를 어떻게 살려드린 거야?”
“나는 원래 엘레나님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작자가 빚만 떠넘기고 도망치는 바람에 어머니의 병원비를 더 이상 지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하지만 엘레나님께서 무력한 나 대신에 병원비를 대신 지불해주시고 어머니가 다 나으실 때까지 보살펴주셨다.”
“그렇게 엘레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정작 막시안의 친위대나 하면서 나쁜 짓에 가담하고 있었다니 뭔가 이상하네.”
“막시안은 작년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모두 죽인 뒤에 나를 포함한 엘레나님의 경호원들에게는 복종하지 않으면 엘레나님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했었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서 우린 어쩔 수 없이 그 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랬구나. 그런데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막시안은 엘레나님을 임신시킬 작정이던데.”
“뭐라고?”
“뭐야? 몰랐던 거야? 막시안은 애초부터 엘레나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고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를 닮은 엘레나님을 친동생이 아니라 신붓감으로 여기고 있어. 아무래도 너희들은 모두 속은 모양이네.”
내가 하는 말에 크라우젠은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엘레나 입장에선 남들에게 최대한 알리지 않고 싶은 사실이지만 크라우젠을 완전히 내게 굴복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크라우젠은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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