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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76화 (76/271)

〈 76화 〉 75화

* * *

라우라가 엘레나를 나에게 데려왔을 때는 마치 납치라도 해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엘레나는 라우라의 어깨에 둘러메진 상태로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녀가 아무리 버둥거리며 저항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라우라는 엘레나를 내 맞은편에 내려놓고는 내 옆에 앉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노예가 감히 귀족을 납치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 노예가 당신을 간단하게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큭큭큭.”

“히이익!”

엘레나는 라우라의 장난스러운 협박에 겁을 잔뜩 먹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그게 좀 귀여워보여서 피식 웃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묘하게 베로니카 언니를 닮은 것 같은 엘레나는 나이가 많아봤자 중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특이하게도 드릴모양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엘레나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나와 라우라 사이를 번갈아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라우라, 장난은 적당히 하도록 해. 불쌍하잖아.”

“설마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드셨나요?”

“아니,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이 상태로는 아무런 말도 못할 것 같아서.”

나는 단칼에 딱 잘라서 엘레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에게 손을 댈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거든.

그런 나를 보는 라우라의 시선은 뭔가 미묘했는데 내 태도에 만족하는 것인지,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나서 반가워요, 엘레나 아가씨. 제 이름은 레베카라고 해요.”

“어,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저도 나름의 정보망이 있거든요. 그런데 왜 편지를 보내신 막시안 남작님이 아니라 당신이 약속장소에 오신 건가요?”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오라버니가 아니라 나야. 내가 일부러 그랬어.”

오호라, 이 발칙한 꼬마 같으니라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아가씨의 가짜편지에 홀딱 속아버린 것에 불과했을 줄이야.

갑자기 긴장감이 풀려서 한숨이 다 나왔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엘레나는 황급히 내게 사과하면서 본인의 절박함을 호소했다.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속고 시작했다는 생각에 불쾌한 기분도 들었다.

“시답잖은 일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그런 거 아니야. 오라버니를 막지 않으면 도시가 끝장이 나버린다고.”

“그래요? 대체 막시안 남작님이 무슨 수로요?”

“오라버니는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들과 함께 마물을 연구했어. 그리고 조만간에 도시의 상수도에 악마기생충 알을 뿌려서 사람들을 다 감염시키려고 해.”

엘레나는 막시안이 하려는 미친 짓을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폭로했다.

막시안이 가면쟁이들과 한패라는 사실은 딱히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놈들이 손을 잡고 하려는 짓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막시안을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미친 스토커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엘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막시안은 단순히 미친 놈이 아니라 무슨 욕을 해도 시원찮은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가 분명하다.

“대체 뭐 때문에요?”

“재밌으니까.”

“네?”

“오라버니는 재미로 그러는 거야. 어릴 때부터 약한 동물이나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좋아했고 남작이 된 이후로는 살인도 취미처럼 저지르고 있어. 그리고 이젠 재미로 학살까지 하고 싶어진 거야.”

“별 미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든가, 왜 꼭 이런 식으로 골치 아프게 미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겠다.

평생 정신병원에 갇혀있거나 사형을 당했어야 할 새끼가 작위까지 물려받아서 행패를 부리다 못해서 자기가 돌봐야할 시민들까지 다 죽이려고 들다니 정말 최악이다.

“맞아. 단단히 미친 사람이지. 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 베로니카님을 상대로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나마 정상적인 척을 했었지만 그 분이 알론 오라버니와 결혼한 뒤로는 예전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졌어.”

“베로니카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응. 오라버니는 자기가 사병처럼 부리는 다리우스 용병단을 동원했지만 실패했지. 네 덕분에 말이야.”

이런, 내 예상보다 소문이 참 멀리도 퍼진 모양이다.

막시안의 동생이 알고 있을 정도면 막시안도 뻔히 다 알고 있겠지.

잠깐, 막시안은 분명 형제자매를 다 죽이고 부모님을 감금협박해서 작위를 물려받았다고 들었는데 엘레나는 왜 살아있지?

“막시안이 미친 사람인 건 잘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그게 무슨 말이야?”

“막시안은 작위를 승계 받으려고 형제자매들을 다 죽였다고 들었거든요.”

“나, 난 유일한 동생이라고 죽이지는 않고 감금했어.”

“그 미친 작자가 고작 그런 이유 만으로요?”

나는 의심을 품은 눈빛으로 엘레나를 노려보았고 라우라도 으르렁거리며 엘라나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엘레나는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게... 내가 베로니카님을 닮았다고 나한테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아직은 나한테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엘레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서 나와 라우라는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녀가 하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면 좋겠지만 분위기를 보아서는 진실이 분명했다.

아니, 이렇게 어린 애를 상대로 뭐가 어쩌고 어째?

완전 개씨발! 미친 또라이 근친충 새끼네.

나는 막시안이 하려는 짓거리가 너무 역겨워서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고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당장에라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만하면 됐어요.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날 믿어주는 거야?”

“네, 방금 그게 연기라면 신도 속일 수 있을 거예요.”

“믿어줘서 고마워.”

엘레나는 내가 내미는 새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눈물을 닦았다.

오늘 내 앞에서 우는 여자가 벌써 3명 째다.

“난 오빠가 작위를 강제로 이어받기 전부터 계속 갇혀있었지만 오늘 알리시아 언니 덕분에 저택에서 탈출했어. 그리고 알리시아 언니는 너희들이 다리우스 용병단을 박살낼 정도로 능력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어.”

“알리시아님이 직접 저희들에게 말하면 될 일을 왜 저한테 부탁하라고 하셨나요?”

“언니는 오라버니와 협상해서 날 꺼내준 게 아니라 오라버니가 용병단 때문에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몰래 탈출시킨 거야. 이 도시의 실권은 오라버니가 가지고 있으니까 아직 작위를 이어받지 못한 알리시아 언니의 힘으로는 날 제대로 지켜줄 수 없어.”

뭐야? 생각보다 알리시아의 권력이 약하잖아.

영주의 후계자라서 남작보다 높을 줄 알았더니 어쨌든 작위가 없으면 같은 귀족이라도 권력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막시안은 리제르카의 시장까지 맡고 있으니 적어도 이 도시에서만큼은 가장 권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알리시아가 영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막시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막시안이 영주 후계자 앞에서도 멋대로 날뛰는 이유는 지금의 영주가 방치하고 있거나 아예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막시안이 온갖 비인간적인 악행을 이어나가는데도 계속 이 도시의 시장으로 군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알리시아도 기존의 틀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나에게 외주를 주려는 속셈인 것 같다.

이거 벌써부터 더러운 정치적 함정에 빠진 느낌이 드는 걸.

“그러니까 알리시아님의 힘으로는 엘레나님을 탈출시키는 게 한계고 그 다음은 엘레나님 스스로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마침 알리시아님이 저희들을 소개시켜줬다는 거 맞죠?”

“응. 너희들이라면 적어도 날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킬 수 있다고 그러셨어. 하지만 난 이 도시의 사람들을 재미삼아서 다 죽이려는 오라버니의 행패를 막고 싶어. 오라버니를 죽이는 게 방법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엘레나님, 당시의 숭고한 뜻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를 고용하려면 정당한 대가가 필요해요. 정의감만으로 목숨을 걸 수는 없거든요.”

나는 사실대로 내 속마음을 전달했다.

엘레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가면쟁이와 관련된 일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걸 몸소 겪어봤기 때문에 그녀에게 말했듯 대가가 필요하다.

물론 이리스를 소중히 여기는 마을사람들을 비롯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엘레나가 얼마나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성의를 보일 수 있는지 떠보기 위해서 그녀에게 대가를 요구한 측면도 있다.

“우선 너희들이 날 도와주다가 저지른 죄는 모조리 다 내가 뒤집어쓸 거야. 그리고 오라버니가 죽으면 작위와 재산이 모두 나에게 상속될 텐데, 그것도 너에게 다 양도할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난 무조건 오라버니를 막아야 해. 만약 네가 내 몸도 요구한다면 기꺼이...”

“그만! 그런 말은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마세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세요. 제가 원하는 건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것과 충분한 돈이에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나는 아직 한참 어린 주제에 쓸데없이 각오를 크게 다지는 엘레나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욕심이 많고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하다고 하더라도 미성년자인 엘레나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짓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엘레나를 내 하렘에 넣으려고 시도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당장 너무 어린데다 만약 그녀가 20살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동생 이상의 감정이 느껴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정말 그것만으로 오라버니를 막아줄 거야?”

“저 혼자 정할 일은 아니니까 시간을 좀 주세요.”

“넌 노예들과도 상담을 해?”

“물론이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미안해.”

엘레나는 라우라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했다.

세상에 귀족아가씨가 노예를 상대로 겁을 먹고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서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레나는 처음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만약에 막시안과 싸우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아가씨는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저희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요.”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죠. 나중에 알리시아님께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면 되니까요.”

“고마워, 레베카.”

엘레나는 귀엽게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귀여운 소녀에게 추잡한 욕망이나 품고 있는 막시안을 반드시 끝장내고야 말겠다.

“엘레나님, 일단 밥부터 먹도록 해요.”

“아, 아니야. 괜찮아. 나 배 안고파.”

“우리랑 같이 생활하려면 거짓말은 금지에요.”

“사실은 엄청나게 배고팠어.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거든.”

엘레나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이리스를 처음 봤을 때 같다.

“그럼 제가 사드릴 테니까 마음 놓고 드세요.”

“고마워. 다음에 꼭 갚을게.”

이미 일이 끝나면 나한테 재산을 전부 다준다고 한 사람이 무슨 수로 비싼 음식 값을 갚는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 내가 진짜로 전 재산을 다 가져갈 생각은 없으니 식비는 얼마든지 갚을 수 있겠지.

‘일단 내일 알리시아를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논의해봐야겠어. 그리고 엘레나가 보냈다는 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알리시아는 내가 용병단에서 뭘 챙겨왔는지 다 알고 있는 눈치야. 아마도 알리시아가 원하던 것들이겠지. 협상카드로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고민에 빠졌지만 언제나처럼 잘 먹는 라우라, 그리고 라우라 못지않게 복스럽게 먹는 엘레나를 보고 있으니 겉으로는 미소가 지어졌다.

내일 엘레나를 데려가는 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식사를 끝낸 우리는 엘레나의 모습을 확실하게 가린 뒤에 이리스가 놀고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이리스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친구들과 작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의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니 너무 일찍와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님,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그 편지는 막시안이 보낸 게 아니라 이 아가씨가 보낸 거였어.”

나는 이리스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엘레나의 얼굴을 그녀에게 살짝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엄청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레나 아가씨? 설마 진짜 엘레나 아가씨인가요?”

“응, 오랜만이야. 이리스.”

엘레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했고 이리스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엘레나도 조심스레 손을 들어서 이리스를 포옹했다.

보아하니 예전에 둘이서 제법 친했던 모양이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른 분들처럼 돌아가신 줄로 알았어요.”

“나도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기뻐. 미안해, 우리 가족들 때문에 너랑 너희 부모님들이 그런 일을 겪어서...”

“아니에요. 엘레나 아가씨가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아가씨는 어떻게든 저희들을 지켜주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아가씨, 어떻게 편지를 보내신 건가요?”

“아, 그건...”

엘레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이리스에게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리스는 우리가 막시안을 막으러 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눈빛이 매서워졌다.

분명 복수를 바라고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이성을 챙길 여유는 있는지 내게 먼저 의사를 물어보았다.

“레베카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그 문제를 우리가 함께 논의하려고 너를 데리러 온 거야. 호텔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자.”

“네, 레베카님.”

다행히 이리스는 내 뜻에 순순히 따라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마을사람들과 마저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에 모두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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