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74화
* * *
우리 주변으로 몰려든 인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모두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프라이팬이나 몽둥이, 농기구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혹시 그 용병들의 가족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곤란한데...
“여러분, 진정하시고 무슨 일로 다들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지 말해주시겠어요?”
“당신들, 왜 저 집에 들어간 거지?”
어느 젊은 휴먼족 여자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아, 이 사람들은 우리가 멋대로 이리스의 집에 들어간 것 때문에 화가 난 거구나.
용병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화로 해결이 가능할 것 같다.
“그야 제 애인이 어릴 때 살던 집이라서 들른 거예요.”
“뭐라고? 그럼 저 사람이...”
사람들은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다들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서로 쑥덕거리더니 내 뒤로 숨은 이리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떨구고 앞으로 몇 발자국 나왔다.
“너 정말 이리스니?”
할아버지는 이리스를 원래부터 잘 알고 있는 듯 그녀를 향해서 반가워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 뒤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이리스가 선뜻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리스가 겁을 먹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서는 애초부터 이리스가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이리스는 할아버지를 포옹하고서 재회의 기쁨을 드러냈다.
“네, 저에요. 이리스에요. 제임스 할아버지,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맙소사! 네가 살아있었다니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구나. 우리는 너희 가족들이 모두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단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저는 노예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어요.”
이리스는 스스로 노예라는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겉옷으로 예속각인을 가려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예인지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잘했어, 이리스. 겨우 우호적으로 태도를 바꾼 사람들이 날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사태는 원치 않거든.
저 사람들은 내가 이리스를 상대로 저지른 여러 가지 음흉한 짓들을 알게 되면 당장에라도 날 찢어 죽이려고 할 것 같다.
“너라도 살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할아버지는 눈물을 훔치며 이리스의 생존에 기뻐했고 뒤에 서있는 마을사람들도 모두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이리스에게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리스에게 살아남아서 고맙다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며 좋은 말을 한마디씩 해주었다.
그러자 이리스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마을사람들을 한 명씩 담았다.
“다들 저희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군요.”
“당연하지! 너희 가족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도미닉도, 나탈리아도, 너도 모두 우리 마을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날의 기억은 내가 그때보다 더 늙었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도미닉은 내가 알고 있는 도미닉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모양이다.
가면쟁이의 일원이면서 수많은 모험가들을 죽이고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서 맹금족에게 내다팔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잔악한 생체실험을 벌인 장본인이 바로 도미닉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저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힘썼던 선량하고 리더십이 강한 사람일뿐, 반인륜적인 범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강한 위화감을 느꼈고 그건 라우라도 마찬가지인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심란한 사람은 바로 이리스일 것이니 우리는 그냥 묵묵히 그녀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할아버지나 다른 분들이 저희 가족을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보답을 한 것뿐이에요. 게다가 어린 제가 도움이 되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어요.”
“네가 동네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마을 곳곳을 멋지게 꾸미고 다녔잖니. 그 어린 나이에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때 너희들이 심은 나무들이 지금은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되었단다.”
“저도 마을에 들어서면서 봤어요. 나무가 그렇게 커버릴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러분이 저희 가족을 기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린 네게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단다. 너희 가족의 소중한 집을 저렇게 방치했으니 말이다. 그 놈의 접근금지명령 때문에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단다.”
아, 이 사람들이 왜 우르르 몰려와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는지 이해가 간다.
나름 이리스 가족이 살던 집을 지키려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게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건 누가 내린 명령인가요?”
“막시안 남작님이란다. 시장인 그 분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미안하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다들 명령을 잘 들어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니까요.”
“우릴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네 친구들이니?”
할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은 이제야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지만 라우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 분은 제 주인님이신 레베카님이시고 이 친구는 저와 함께 레베카님을 섬기고 있는 라우라에요. 저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랍니다.”
이리스는 나와 라우라를 마을사람들에게 소개시켜줬다.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좋을 수가 없었다.
“이리스를 해방시켜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비용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그건...”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예속퀘스트로 얻은 혜택이 모두 날아갈지도 몰라서 당장 해방시켜줄 수 없다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망설이자 이리스가 대신 나섰다.
“할아버지, 제가 노예이긴 해도 그것 때문에 힘든 점은 전혀 없어요. 레베카님은 절 차별하지 않고 가족으로 대해주시고 절 진심으로 사랑해주세요. 그러니 그 문제 때문에 괜히 할아버지랑 다른 분들이 고생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리스, 그게 진심이니?”
“네, 저는 레베카님 덕분에 목숨이 걸린 저주에서 벗어났고 아버지와의 문제를 매듭짓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 제가 어떤 신분이든 평생 레베카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레베카 씨, 앞으로도 이리스를 잘 부탁드립니다.”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릴게요.”
나는 아주 거창하게 목숨까지 들먹이면서 할아버지와 마을사람들에게 약조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가식을 떨거나 거짓말을 보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리스, 여기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니? 약속장소에는 우리끼리 갈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걱정 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거니까. 그리고 네 친구들이 너랑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하고 있잖아.”
나는 이리스의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스도 친구들을 많이 보고 싶어 했으니 그녀를 위한 시간을 충분히 주고 싶다.
“이리스, 나도 레베카님과 같은 생각이야.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즐기도록 해.”
라우라는 당연하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 망설이던 이리스도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레베카님, 언제나 절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우라도 늘 날 위해줘서 고마워. 그럼 저는 계속 이 마을에 있을 테니까 일이 끝나면 여기서 다시 만나요.”
“그래, 잘 놀고 있어.”
나는 이리스를 포옹하면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 둘의 입맞춤을 본 이리스의 친구들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이리스에게 추궁하기 시작했고, 나는 거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라우라와 함께 후다닥 인파 속에서 벗어났다.
나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리스는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나를 향해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리스를 이곳에 데려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서 뿌듯한 기분이 든다.
“레베카님, 정말 다행이죠?”
“맞아. 착한 마을사람들이 다들 이리스를 기억해줘서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저도 그래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리스가 너무 부럽기도 해요. 전 저렇게 환영해줄 사람들이 아예 사라졌으니까요.”
라우라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 없이 슬퍼보였다.
그녀는 이리스처럼 부모님을 잃었지만 보다 끔찍한 방식의 이별이었고 고향은 마족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된 지 오래이다.
슬픔을 저울질하는 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라우라는 이리스보다 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이리스에게만 신경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우라에게 너무 미안했다.
“라우라, 내가 요즘...”
“아! 죄송해요. 괜히 좋은 날에 우울한 이야기를 해버렸네요.”
“아니야. 내가 너였어도 그런 기분이 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마.”
“레베카님은 항상 남을 배려해주느라 힘들 것 같아요.”
“나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요. 저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건 좋지만 너무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레베카님이 늘 즐겁기를 바라니까요.”
라우라는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몇 발자국 앞으로 가버렸다.
이건 분명 더 이상 그 주제로 이야기하지 말자는 뜻이겠지.
하지만 나는 라우라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달려가서 손을 잡았다.
라우라의 손은 분명 떨리고 있었고 어깨도 들썩이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야. 힘든 건 너잖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못나서 죄송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나는 라우라를 꼭 안아주었다.
오늘따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많이 보여서 참 마음이 아프다.
내가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두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겠지.
라우라는 내 품에 기대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서럽게 울다가 한참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대한 자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라우라, 내가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데 반드시 엘카힘에게 복수하고 네 고향을 되찾아줄게. 우리가 함께라면 어떤 문제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저도 최선을 다해서 레베카님을 보필해드릴게요. 레베카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적극적으로 수행하겠어요.”
“난 네가 지금처럼만 날 도와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럼 다시 가볼까?”
“네, 레베카님.”
우리는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서로 손을 꼭 잡고서 길을 걸어갔다.
막시안이 지목한 약속장소인 분수광장은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가르는 곳에 위치해있어서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분수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늘어났고 그에 맞춰서 각종 마차의 수도 늘어났다.
나는 일방적인 약속에 어울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바로 분수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그곳이 내려다보이는 고층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기왕이면 저런 곳에서 감시를 하는 게 라우라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 측에서는 예약을 하지 않고 노예까지 대동한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곤란한 눈치였지만 충분한 돈 앞에서는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분수광장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고 덕분에 남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감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의 추천메뉴를 고른 뒤에 지도창을 펼쳐놓고 막시안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막시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로브를 어설프게 뒤집어 쓴 휴먼족 여자애가 분수광장에 나타나서는 눈에 띄게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지도창에 따르면 어린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파라이네다.
파라이네 가문 사람이 이유도 없이 정체를 숨기고 평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홀로 왔을 리는 없으니 막시안과 관련된 사람이 분명하다.
“저 꼬마가 막시안의 대리인일까요?”
“이름이 엘레나 파라이네인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본인이 나올 것처럼 그러더니 어린 애를 내보낼 줄이야.그 자식 완전 겁쟁이잖아.”
“그게 아니라면 저 꼬마의 자작극일지도 몰라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어떻게 할까?”
“우선 식사를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해요. 쟤가 진심으로 우릴 보고 싶다면 몇 시간이고 저기서 기다리겠죠.”
“주변에 적들이 없는 걸 봐서는 함정은 아닐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저 꼬마와 막시안의 관계를 모르는 이상, 함정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네요. 오히려 이용하기 좋다고 해야 할까요.”
“그럼 몇 시간씩 기다리게 만드는 건 좀 그러니까 한 10분 정도만 더 기다리게 하자.”
“역시 레베카님은 정말 착한 분이시네요.”
“아니, 난 착한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생각해서...”
“정말 효율을 중시하시는 분이시라면 애초에 이리스를 마을에서 놀게 놔두지 않았을 테고 이런 사람 많은 레스토랑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건물 옥상에서 상황을 주시하시다가 저 애가 혼자라는 걸 알면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하셨겠죠.”
라우라는 내가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착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라우라와 이리스는 내가 서투르고 무른 모습을 보이는 걸 착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레베카님은 이리스에게 행복을 누릴 시간을 주셨고 굳이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오셔서 저를 위로해주시려 하고 저기에 있는 의심스러운 꼬마를 측은한 눈빛을 바라보고 계세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여기로 데려와서 대화를 하고 싶으신 것 맞죠?”
나는 구구절절 내 속마음을 다 까발리는 라우라를 상대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라우라가 노예인데도 이 정도인데 그녀를 해방시켜주기라도 하면 아내를 못이기는 유부남들처럼 항상 라우라에게 끌려 다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저 애를 여기로 불러야겠어.”
“후훗,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라우라는 일찌감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씩 웃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지도창과 창문 밖을 주시하면서 라우라가 엘레나를 데려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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