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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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가 어릴 때 살던 집의 주소는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평민들이 살아가는 주거지역이었다.
나는 이리스에게서 도미닉이 사냥으로 생계를 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무심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처음 전투를 경험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 마을처럼 말이다.
주거지역에 밀집된 건물들은 대부분 오래되었지만 꾸준히 사람의 손길을 받아서 낡아도 허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엔 귀족들의 저택이나 고급호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평민들이 사는 평범한 집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초라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모습을 보니 이곳을 초라하다고 폄하한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제가 어렸을 때랑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네요. 어라? 저 찻집이 아직도 있구나. 저기서 파는 카스텔라가 참 맛있었는데.”
“그럼 우리 돌아갈 때 들를까?”
“네,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아! 저 공원에 있는 나무는 쟤가 친구들이랑 같이 심었던 나무에요.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커졌네요.”
이리스는 주변을 적극적으로 둘러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우리는 이리스가 이것저것 이야기해주는 것들을 귀담아들으면서 그녀의 소중한 기억을 공유했다.
나는 혹시 라우라가 자기 고향이 생각나서 기분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었지만 다행히 기우에 불과했다.
라우라는 오히려 나보다도 더 이리스의 말에 잘 호응해주었고 난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들뜬 마음에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이리스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깔깔거리면서 뛰어다니는 걸 보더니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이 절 기억하려나 모르겠어요.”
“아직 10년도 안 지났으니까 어느 정도 기억은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겠어요. 다들 좋은 친구들이었으니까요.”
이리스는 두 손을 모으며 작게나마 기대를 품었다.
나도 이리스의 옛 친구들이 그녀를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 섭섭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잠깐 걸음을 멈췄던 우리는 다시 활기찬 길을 걸어가서 이리스가 살던 집 앞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이리스의 옛 집은 아무런 관리도 받지 못해서 허름하기 짝이 없었고 정원에는 온갖 종류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상태다.
또한 집의 현관문은 반쯤 부서진 상태로 덜렁거리고 창문은 다 깨진지 오래인데다 삭아버린 지붕과 벽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옆집에 사는 사람들도 비위생적이고 우범지대나 다름없는 집의 상태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엉망이네요.”
“이리스...”
나와 라우라는 크게 실망한 이리스를 함께 안아주었다.
이리스는 조금 울먹이기는 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꾹 참았다.
난 울지 않으려 애쓰는 이리스가 도리어 안쓰러웠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뭔가 중요한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네, 레베카님.”
나는 지도창으로 주변을 확인한 다음에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서 무너질 것 같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곰팡이냄새와 역한 썩은 내가 물씬 풍기고 쥐와 벌레들이 바닥에 들끓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 삭아서 발을 잘못디디면 바로 부서져서 다칠 것 같았다.
“남아있는 가구가 제대로 없고 술병과 담배꽁초가 굴러다니는 걸 보면 양아치들이 아지트로 삼았던 모양이네요. 여기 있는 쓰레기들은 최근에 버린 것들이고요.”
“그러게. 이리스네 가족이 막시안의 저택으로 이사 간 뒤로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나봐.”
“이렇게 방치할 거라면 차라리 팔아버리지 왜 굳이 붙잡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딱히 이득을 볼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말이죠.”
“뭔가 좋지 않은 걸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리스에게 지하실 같은 게 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라우라는 혼자서 다른 곳을 살펴보고 있는 이리스에게 갔다.
나는 그 사이에 거실로 추정되는 곳을 뒤져보았는데 특별한 건 없었다.
온통 쓰레기와 오물, 해충만 가득할 뿐이었다.
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바퀴벌레들을 보자고 여기로 온 건 아닌데 말이지.
“레베카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나는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이리스에게 얼른 달려갔다.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 라우라와 이리스가 둘이서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열어둔 게 전부였다.
“정말 지하실이 있었구나?”
“네, 예전에는 창고로 쓰던 곳이에요. 위에 짐들이 잔뜩 쌓여있어서 라우라랑 같이 치웠어요. 그런데 제가 알던 지하실과는 분위기가 달라요.”
“어떤 면에서 다르니?”
“원래 계단이 목재였는데 지금은 벽돌로 만들어져있어요. 그리고 벽도 그냥 흙이었는데 지금은 회반죽이 발라져있고요.”
이리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하실과는 다른 모습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어릴 때 살던 집이 폐가로 변했는데 유독 지하실에만 새롭게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아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분명 누군가 지하실에 손을 댔구나. 적은 없는 것 같지만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라우라, 네가 확인해줄래?”
“네, 레베카님. 맡겨주세요.”
라우라는 이동식 본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정의 유무를 확인했지만 다행이 그런 위험한 것들은 없었다.
우리는 안전이 확인된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에는 습기가 하나도 없었고 곰팡이나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1층에 득시글거리는 쥐나 벌레들도 감히 지하실로는 들어올 엄두를 내질 못했다.
해충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특수한 물질 혹은 그러한 마법이 사용된 게 분명하다.
지하실은 텅 비어있어서 여기서도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할 것 같았지만 계단 뒤쪽에 특이하게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문이 하나 있었다.
“이 문은 원래 없던 거예요.”
“용병단의 비밀기지 같은 걸까?”
“아무나 들락거리는 폐가 지하에 그런 중요한 시설을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대체 뭘까?”
“음... 그건 들어가 보면 알겠죠?”
라우라는 그 말과 함께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당연히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힘이 좋은 편이라도 화강암으로 만든 두꺼운 문을 혼자만의 힘으로 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마법갑옷의 힘으로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문은 미동도 하질 않았다.
“이건 대체 뭐야? 왜 안 열리지?”
“마법갑옷의 출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마법적인 방법으로 열어야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만약 후자라면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열 수 없어요.”
“마법이라... 우리 중에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지?”
라우라는 내 질문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법도구는 그럭저럭 널리 쓰이고 있지만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상태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해서 괜히 이리스에게 미안해진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리스에게 너무 많은 희망을 불어넣지 말 걸 그랬다.
“이건...”
“이리스, 뭔가 알 것 같니?”
“이쪽 밑에 엄마의 이름이 새겨져있어요.”
“나탈리아? 이게 네 어머니의 성함이구나?”
“네, 나탈리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어라? 왜 갑자기 문이 열리지?”
여태껏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이리스가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아주 부드럽게 열렸다.
내가 이름을 말했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을 보면 일종의 음성인식시스템으로 열리는 구조인 것 같다.
즉, 이리스의 목소리로 나탈리아의 이름을 말해야 열리는 마법이 걸려있는 것이다.
정확한 원리 같은 것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리스 덕분에 문이 열렸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문 너머에 숨겨진 공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해야겠다.
비밀의 방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석관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석관 주변에는 다 시들어버린 꽃과 완전히 녹아버린 촛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지금까지 쭉 관리가 되다가 얼마 전부터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여긴 무덤이었구나.”
“맞아요. 아마 제 엄마의 무덤이겠죠.”
이리스는 애써 무덤덤하게 말하면서 석관으로 다가갔다.
이 무덤을 누가 만들었는지, 지금까지 누가 관리했는지는 뻔했다.
분명 이리스의 아버지인 도미닉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죽은 뒤로는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집문서가 다리우스 용병단의 금고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도미닉이 용병단에게 문서를 맡겼을 수도 있지만 집문서가 이리스의 손에 쥐어진 이 시점에서는 그러한 경위를 알아내는 게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야겠다.
그리고 지금은 이리스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희생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조의를 표하는 게 먼저인 만큼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
내가 석관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사이에 이리스는 석관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아예 뚜껑을 열어서 내부를 확인하려고 했다.
난 말리고 싶었지만 이리스의 눈빛에서 강한 의자가 느껴져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리스가 낑낑거리자 보다 못한 우리들이 도와주었고 묵직한 석관의 뚜껑이 대각선으로 밀려서 내부가 반쯤 드러났다.
두꺼운 석관 내부에는 이미 미라처럼 변해버린 사람의 유해가 들어있었다.
이 상태로는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보였지만 이리스는 유해와 함께 들어있는 부장품을 보고서 신원을 파악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안대를 통해서 나도 석관에 들어있는 유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리스의 어머니인 나탈리아였다.
“엄마... 나 왔어. 엄마 딸 이리스야. 나 때문에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이리스는 결국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준, 생전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어머니의 유해를 목도한 이리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를 해주어야할지 모르겠다.
이리스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비극을 계속해서 겪어야하는 걸까?
“엄마, 왜 나만 살아남은 걸까? 엄마랑 아빠가 다 떠나버렸는데 왜 나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날 안아주면 좋겠어.”
이리스는 나탈리아의 유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애원하듯 울었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그건 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이리스를 위해서 울어주었고 그녀가 깊은 슬픔에서 벗어날 때까지 꼭 안아주었다.
이렇게라도 이리스를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엄마, 이 사람은 레베카님이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결혼도 하고 싶은 사람이야. 난 레베카님 덕분에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러니까 엄마도 걱정 말고 천국에서 푹 쉬어. 알았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이리스는 나와 팔짱을 끼고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 뭔가를 말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리스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 장모님. 제가 책임지고 이리스를 보살펴줄 테니 믿고 맡겨주세요. 못 미더운 부분이 많은 부족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베카님,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엄마랑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아니야. 우리가 함께 노력한 덕분이지.”
나는 이리스에게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 꼭 안아주었다.
더 이상은 이리스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날이 없으면 좋겠다.
“엄마, 이제 나 가볼게. 다음에 또 올 테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안녕, 엄마.”
이리스는 작별인사를 한 뒤에 다시 석관의 뚜껑을 닫으려고 했고 이번에도 우리가 도와주었다.
비록 짧은 재회였지만 이리스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울만큼 울어서 속이 후련해진 듯 내게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어쩌나 엄청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엄마의 시신을 수습해주셔서 다행이에요. 아빠는 분명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 마음이 놓여요.”
“나도 막시안이 가지고 있을까봐 걱정 많이 하고 있었어. 네 말대로 네 아버지가 마무리를 잘 해주셔서 다행이지. 아참, 우리 이 집을 다시 짓는 건 어때?”
“그보다는 엄마를 다른 곳으로 이장한 다음에 집문서를 팔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 다시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그리고 엄마도 이런 동떨어진 지하실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무덤에 묻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따를게.”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급할 건 없으니까 이번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그렇게 하자.”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리스의 머리를 정성을 다해서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남아있는 집과 아예 결별하기로 마음먹는 건 어려운 일일 텐데 그걸 행동으로 옮기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이 집을 재건축해서 이리스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는데 이젠 나탈리아를 이장하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될 것 같다.
“우리 이제 지하실에서 나가요. 햇빛이 보고 싶어졌어요.”
“응, 가자.”
나는 이리스의 손을 잡고서 밖으로 나와서 폐가에서 벗어났다.
이리스는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리스의 표정이 몇 번이고 바뀌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막시안이 지정한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많이 남아서 이리스가 말했던 카페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권총집에 손을 올렸고 라우라도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이리스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이기에 이리스가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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