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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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리제르카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호텔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불편한 잠자리와 짧은 수면시간 그리고 전투로 누적된 피로를 회복하려면 낮잠을 자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씻자마자 널찍한 침대에 함께 누웠다.
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라우라, 왼쪽에는 이리스가 자리를 잡았고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양옆에서 나를 끌어안고서 자신들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라우라는 기다랗고 폭신폭신한 꼬리를 내 배 위로 올려서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주었는데, 이건 언젠가부터 라우라가 나랑 같이 잘 때마다 항상 하는 행동이다.
만약 내가 수인족 노예를 한 명 더 구입한다면 그 친구도 라우라처럼 꼬리를 나에게 올려줄 지 궁금하다.
이리스는 이와 같은 라우라의 행동을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꼬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나한테 종종 했었는데, 이건 내가 큐버스 종족을 구상하면서 꼬리를 빼버린 탓이다.
내가 꼬리를 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단순한 실수다.
이상한 고집으로 날개만 뺀다는 게 꼬리까지 빼버려서 머리에 뿔만 남게 되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깨달은 건 길거리에서 큐버스족을 처음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였다.
큰 뿔이 있는데 꼬리가 없으니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종족편집기능이라도 어떻게 찾아낸다면 전형적인 몽마의 꼬리를 달아주고 싶다.
‘얘들은 나보다 빨리 잠들었네.’
방금 전까지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라우라와 이리스가 거의 동시에 곯아떨어졌다.
둘이서 어린 아이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끔은 라우라와 이리스가 20살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더 어린 사람으로 여겨질 때가 있는데, 그건 아마도 내 원래 나이가 24살로 설정된 레베카보다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냥 아무런 걱정 없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굴곡이 아예 없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인 이상,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일단 내가 사랑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면쟁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라우라는 부모님의 원수인 엘카힘, 이리스는 아버지인 엘카둔, 베로니카 언니는 가면쟁이들과 손을 잡은 게 분명한 스토커 막시안.
여기서 엘카둔은 죽긴 했지만 아직 이리스는 막시안과 반드시 해결을 봐야할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면쟁이들의 대장은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그 기분 나쁜 놈들을 다 죽이거나 더 이상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게 만들지 않는 이상에야 완전한 평화는 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위대한 지도자’라는 새끼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왜 하필이면 나를 가면쟁이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걸까?
혹시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와 같은 ‘플레이어’라면 간단하게 세상의 진실을 파악했을 테고 나처럼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도 나보다 훨씬 먼저 이 세상에서 살아왔으니 나에 대해서 알아낼 방법이야 많을 것이다.
그 지도자가 단순히 아르카디아의 원주민이라고 하더라도 예언을 봤다느니 신탁이 내려졌다느니 하면서 괜히 자기네들에게 도움도 되지 않을 나를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미친 종자들과는 절대로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
지금까지 놈들 때문에 피해를 본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존재들에 불과한 놈들과 손을 잡느니 그냥 손을 잘라버릴 거다.
‘씨발, 괜히 머리만 더 복잡해졌네. 얼른 잠이나 자자. 알리시아를 만나기 전에 컨디션 조절을 해둬야지.’
나는 갑자기 두통이 강하게 느껴지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 애를 썼고 나를 안고서 잠들어있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따스한 숨결과 체온에서 느껴지는 애정에 집중했다.
곧 내 마음이 아주 편해졌고 두통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사랑하는 연인들 덕분에 나는 정말 편한 마음으로 순식간에 잠들 수 있었다.
특별히 꿈은 꾸지 않았지만 귀에서 총성이 맴도는 기분이 자는 내내 느껴졌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조금씩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밤이 더 길어서 금방 해가 떨어졌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눈을 떴고, 아침이 아닌데도 라우라와 이리스가 순서대로 내게 키스를 해줬다.
“이러니까 꼭 아침인 것 같아.”
“잠은 잘 주무셨어요?”
“응. 너희들 덕분에 아주 잘 잤어.”
나는 라우라의 질문에 미소와 함께 대답하며 그녀와 이리스를 동시에 끌어안고서 각자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알리시아님은 언제 레베카님을 부를까요?”
“글쎄? 우리가 자는 동안에 초대장이 왔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로비로 내려가서 확인해보면 될 것 같아.”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부탁할게.”
라우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빗은 다음에 객실에서 나갔다.
워낙 동작이 빨라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라우라는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가 나서서 알아보려고 해서 고마웠다.
그녀는 노예가 도맡은 일을 하는 걸로 일일이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라우라는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고 언젠가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런가보다.
라우라가 객실에서 나간 뒤에, 나와 이리스는 침대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용병단이 전멸했으니 더 이상은 과할 정도로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창문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을 치우고 밖을 내다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늦겨울의 도시풍경은 제법 운치 있었다.
꼭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서 찍은 사진처럼 느껴진다.
내가 바깥구경에 심취하고 있는 동안, 이리스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경치가 참 좋지요?”
“응, 네 고향은 정말 멋진 도시인 것 같아.”
“제가 어렸을 때는 친구들이랑 같이 저기 보이는 신전의 종탑 위까지 올라가서 놀곤 했어요. 그러다 사제님들에게 걸려서 혼이 난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혼이 나도 높은 곳에서 보는 도시가 너무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내가 보기엔 지금도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이렇게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어요. 레베카님, 저를 구매해주셔서 고마워요.”
이리스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리스를 샀고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여기간이 끝나면 그대로 헤어질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리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주고 막시안을 끝장낸다면 조금이나마 이리스의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겠지.
막시안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벌써 2개가 되었지만 앞으로 이유가 몇 가지 더 추가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레베카님, 우리 내일 저희 집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너한테 하고 싶었어. 아마 거기에 가면 너희 어머니에 대한 단서가 있을 것 같아.”
나는 용병단의 금고에서 이리스가 살던 집의 집문서가 나온 뒤로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문서가 다른 곳도 아니고 금고 안에 중요한 증서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을 리가 없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걱정이에요.”
“괜찮아. 함정 하나 판 것치고는 들어간 비용이 너무 많아. 실패할지도 모르는 함정을 위해서 금괴를 30개씩이나 가져다... 잠깐, 아무리 용병단이 돈을 많이 벌어도 그렇게 많은 금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금괴를 신나게 챙길 때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위화감이 들었다.
대금화 1닢이 대충 50억의 가치가 있는 세상에서 금괴 1kg은 대체 얼마나 비쌀까?
유감스러울 정도로 수학에 약한 내 머리로는 쉽게 계산이 되질 않는다.
아무튼 간에 일개 용병단이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금괴를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너무 수상하다.
막시안이 용병단을 지원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남작의 재산이 그렇게 많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가짜금괴가 아닐까요?”
“가짜? 에이, 그럴 리가 없어. 이게 가짜라면 정말 우울해질 거야.”
난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법도구나 생물체가 아니면 분석스킬을 쓸 수 없으니 금괴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아, 이빨로 깨물어보자! 분명 흠집이 날 거야.
난 다짜고짜 가방에서 금괴 하나를 꺼내서 어디서 본대로 이빨로 힘껏 물어보았다.
금괴는 아주 약간 무른 느낌이 들었고 내가 물었던 곳에 살짝 흠집이 났다.
“음... 일단 가짜는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너무 세게 물어봤나봐. 턱 아파.”
“제가 문질러 드릴게요.”
이리스는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부드러운 손으로 내 턱을 문질러주었다.
내 바보 같은 행동에도 늘 웃으면서 받아주는 이리스가 너무 좋다.
“금괴 때문에 대화가 다른 길로 새버렸네. 이리스, 아무튼 내일은 너희 집으로 가보자.”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이리스는 그 말과 함께 나에게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자주 키스를 주고받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횟수가 많아도 기분이 좋은 게 키스였다.
예전 세상에선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행복을 이 세상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나와 이리스는 라우라가 올 때까지 서로 스킨십을 이어나가면서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레베카님, 저 왔어요.”
“어서와.”
“이건 알리시아님의 이름으로 발송된 초대장이고 이건 발송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편지에요.”
라우라는 편지봉투 2개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우선 알리시아의 초대장부터 읽어보았는데 모레 점심식사에 날 초대한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서 사람들이 찾아와 날 저택으로 데려간다고 하는데 무조건 드레스나 정장을 입고 오라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인 추신도 덧붙였다.
나한테는 그럴싸한 드레스가 없으니 내일 적당한 옷가게를 찾아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초대장에는 당연하게도 귀족들의 체면 때문에 노예인 라우라와 이리스를 초대한다는 말은 없었다.
역시 둘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노예해방으로 예속퀘스트의 보상이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알아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또 나만 초대를 받아서 미안해.”
“괜찮아요. 저희들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부담가지지 마세요.”
“그래도 내가 너희들을 계속 노예로 두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레베카님,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평생 당신의 노예로 살아도 좋은 사람이에요. 왜냐면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건 좀 비틀린 애정 같지 않니? 난 이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더라도 노예라는 최하위에 위치한 신분으로 평생 살아가는 건 본인 입장에서는 서러운 일이 많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예속퀘스트와 관련된 세뇌나 부작용이 의심된다.
“저희들은 제정신이니까 걱정 마세요. 둘 다 스스로의 의지로 레베카님을 기꺼이 섬기는 거랍니다.”
“으, 응.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하하.”
나는 또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라우라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얼굴에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라우라가 내 속을 더 떠보기 전에 화제를 바꿔야할 것 같다.
“그나저나 정체를 숨기고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라니, 정말 의심스럽네.”
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초대장을 뒤로하고 검은색 편지봉투를 손에 들었다.
분석스킬이 통하지 않는 걸 보면 평범한 물건에 불과했지만 예전 세상에서 편지로 생물학 테러를 감행했던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이 안에도 유독성 물질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아예 열어보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난 왠지 모르게 이걸 꼭 열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마법갑옷을 입었고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창문을 모두 열 것을 지시한 뒤에 둘 다 객실 밖으로 내보냈다.
마법갑옷은 시중에 팔리는 방독면보다 더 뛰어난 방독성능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과학수준으로는 본격적인 생화학무기를 제조할 능력은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그럼 꺼내보자.’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내가 호들갑을 떤 게 무안할 정도로, 편지는 무해함 그 자체였다.
객실 바깥에서는 나보고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선뜻 두 사람을 안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추운 복도에 놔둘 수도 없으니 최대한 빨리 마음을 정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얘들아, 내가 좀 과했나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무슨 내용이 적혀있나요?”
나는 편지지를 열어서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직접 읽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막시안 파라이네 남작이다. 그대가 다리우스 용병단을 공격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금괴와 각종 증서를 훔쳐간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사이에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그대와 함께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내 제안에 동의한다면 내일 정오에 분수광장으로 오기를 바란다. 부디 현명한 그대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기를 기대하지.”
나는 막시안이 편지를 보낸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지만 놈에게 우리의 움직임이 대부분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위험한 일이다.
보안수준이 가장 높은 호텔이니 편지로 끝났지 평범한 여관이나 호텔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레베카님, 대화에 응하실 건가요?”
나는 이리스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서 고민했다.
함정의 냄새가 풀풀 나는 편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는 거절이야. 하지만 약속장소를 감시하면서 동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가 내린 결정에 라우라와 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내일은 이리스의 고향집에 먼저 들렀다가 분수광장에서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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