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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72화 (72/271)

〈 72화 〉 71화

* * *

우리는 리제르카 기사단이 뒷수습을 하는 동안에 개울가에서 피를 씻어냈다.

멀리서 저격을 했던 이리스는 옷에 묻은 먼지만 털어내면 되는 수준이었지만 앞장서서 싸웠던 나와 라우라는 몸과 갑옷, 옷이 피로 물들어서 한참을 씻어야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들어갈 수는 없어서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인 다음에 찬물과 적절하게 섞는 방법을 썼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피범벅인 상태로 도시로 들어갈 수는 없고 마법갑옷을 가방에 넣을 수도 없으니 꼭 해야만 하는 조치였다.

더러운 것을 다 씻어낸 우리들은 여전히 사건현장에 머무르고 있는 기사단을 피하기 위해서 숲길을 빙 둘러서 어젯밤에 우리가 나왔던 성문의 정반대편에 있는 성문을 통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에는 이미 다리우스 용병단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서 전멸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여론과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는 여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한 귀로 흘려들었다.

애초에 리제르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로 용병단을 쓸어버린 거니까.

우리는 호텔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특수상점에 먼저 찾아가서 워프기능을 사용해 프랑카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직 리제르카에서 할 일이 남아있지만 내 사랑들을 제외하고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오늘 얻은 정보를 알려주고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서 논의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해서다.

알리시아는 당연히 본인에게 먼저 정보를 주기를 원하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녀보다 베로니카 언니가 우선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게 나름 친절하게 대하면서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베로니카 언니보다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워프기능을 작동시켜 우리를 프랑카로 전송시켰다.

리제르카에서는 뭐든지 조심스러웠지만 프랑카로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프랑카로 돌아오는 게 불가능한 시점이다 보니 이번에도 우리의 신원을 가린 채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나는 먼저 지도창으로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용병들의 동태를 살펴본 다음에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라우라와 이리스를 대동하고서 특수상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침 오늘은 언니가 쉬는 날이니 기사단 본부에 출근하지 않고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는 길에 출출한 배를 달래려고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사먹었는데 처음엔 간단하게 허기를 때울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배가 터지도록 입에 집어넣고 말았다.

웬만하면 과식을 하지 않는 이리스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먹고 말았다.

“레베카님, 우리 이러다 살찌겠어요.”

“걱정 마. 라우라가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 맞아요. 분명 단련이랍시고 우릴 괴롭히겠죠? 히힛.”

이리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웃었다.

확실히 라우라는 우리에게 살이 찔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라우라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이리스의 체력을 단련시키고 필요하다면 식단에도 개입하는 사람이다.

우릴 관리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처음에 맨날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들 때와 비교하면 나도 제법 성장한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훈련메뉴를 개발하고 있어요. 맨날 제가 시키는 상황이면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 저도 함께 참가하는 형태에요.”

“라우라, 네가 같이 한다는 건 그만큼 더 힘들어진다는 소리 아니니?”

“원래 훈련이라는 건 점점 난이도를 올려야 효과가 좋으니까요.”

“오, 맙소사! 이리스, 우린 이제 끝장이야.”

나는 이리스를 껴안고서 우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 하루 종일 운동만 하는 나날을 보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마저 돋는다.

“레베카님, 그래도 저는 할만 해서 괜찮아요. 힘들긴 해도 끝장까지는 아니라고 할까요?”

“하긴 너도 체력이 좋은 편이니까 나만 죽어나겠네.”

“그러게요. 헤헤헤.”

이리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란다.

내가 느끼기에 이리스는 라우라만큼은 아니라도 체력이 좋은 사람이고 충분히 몸이 단련된 사람이다.

그러니 라우라가 훈련강도를 계속 올린다고 말해도 그냥 웃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보다 체력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평범한 사람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앞날을 생각하면 계속 몸을 강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내가 생각하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맞나 싶기도 하다.

“레베카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섹스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은 항상 남겨드릴게요.”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잘 모르겠어.”

“벌써 제가 질리셨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섹스도 훈련만큼 힘든 일이니까 그런 거야. 전혀 네가 질리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푸흡! 장난이에요. 레베카님이 제게 질리실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쉽게 질리는 사람도 아니고요. 갑자기 레베카님이 저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네요.”

라우라는 내게 안기면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난 라우라에게 완전히 홀딱 빠져서 그녀를 사겠다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었다.

수치심이고 나발이고 다짜고짜 손을 들어서 라우라를 낙찰 받고 그녀에게 내 음흉한 욕망을 예속각인이라는 형태로 뒤집어씌웠다.

날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던 라우라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라우라, 그땐 어땠어? 나를 처음 보셨을 때랑 비슷했어?”

“음... 레베카님,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네, 레베카님. 이리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엄청 변태인 줄 알았어.”

“변태? 정말로?”

“응.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나한테 엄청 집착하면서 구입해놓고는 다짜고짜 예속각인을 내 아랫배에다 새기면서 성노예로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 좋은 분이시고 진심으로 날 사랑하고 계셨어.”

라우라는 내게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생긋 웃었다.

그래, 난 이 미소가 보고 싶어서 라우라를 구입한 거야.

“아, 물론 변태인 건 맞아. 너도 했다시피 그런 쪽으로 피어싱을 요구할 줄은 몰랐거든. 그런 요구를 받아들인 나도 만만찮은 사람이지만.”

“라우라, 그냥 칭찬만 해주고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만 솔직히 말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건 그런데. 그래도 그게... 아니다. 다 내가 변태인 탓이지.”

나는 라우라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처음부터 내 성적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라우라를 구입했고 그녀의 음란도를 올리고 피어싱을 달게 만들어서 영원히 예속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우리는 남들에게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주제를 마무리한 뒤에 베로니카 언니가 알려준 비밀통로를 통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언니에게 거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비밀통로는 저택의 서재로 이어지는데, 마침 베로니카 언니가 서재에서 혼자 책을 보고 있었다.

“베로니카 언니.”

“누구냐! 휴우, 너희들이었구나.”

“언니, 일단 총구 좀 다른 곳으로 돌려주라.”

“미안, 미안. 그런데 너희들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

베로니카 언니의 질문에 바로 말문이 막힌 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또 고향 타령하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고민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자 베로니카 언니는 나를 보면서 씩 웃더니 내 곤란을 덜어주었다.

“알았어. 캐묻지 않을게. 성과는 있었니?”

“응. 일단 이 거래증서들을 봐줘.”

“어디 보자, 이건 내무관과 장군은 무고하다는 증거구나?”

“맞아. 우연히 놈들과 거래한 시점이 비슷했던 것뿐이지 우릴 공격하려고 다리우스 용병단에게 사주한 건 아니었어.”

“기사단 정보부가 조사한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라서 다행이야. 고위관료들과 법적으로 다툼을 벌이는 건 엄청 피곤한 일이거든.”

“프랑카가 분열될 일도 없어져서 다행이지. 그리고 이건 우리를 공격한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야.”

나는 대놓고 막시안의 도장이 찍혀있는 거래증서를 베로니카 언니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자세히 읽어본 언니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를 갈았다.

“남의 여자를 탐하는 역겨운 버릇은 아직도 버리질 못했나보네. 이젠 아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구나.”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막시안은 내가 알론과 공식적으로 정혼을 하기 위해서 파라이네 가문의 저택에 들렀을 때 처음 만났어. 그리고 그 뒤로 계속 나에게 집착을 하면서 알론 대신에 자신과 정혼을 하자고 고집을 부렸었지.”

베로니카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사실상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나 마찬가지였다.

“막시안은 알론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뒤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음습한 방식으로 내게 구애를 했었고 남작이 된 뒤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어. 난 시답잖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무시로 일관했었는데 그게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되었을 줄이야...”

“그 쓰레기 자식을 그냥 죽여 버리자. 언니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내가 처리할게.”

“안 돼! 그러다 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넌 그대로 끝장이야.”

“그럼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이건 내가 용병단 본부를 싹 쓸어버리고 얻은 정보야. 언니가 이걸 증거로 내밀어봤자 불리해질 거야.”

“난 잠입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썼단 말이니?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알리시아님이 눈감아주신다고 약속하셨어.”

“그 속이 시커먼 시누이가 또 순진한 사람을... 알리시아는 마침 용병단이 거슬려서 널 이용한 것뿐이야. 네가 실패하면 모른척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그냥 결투 중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끝내면 그만이니 아무런 정치적 부담을 질 필요가 없지.”

“나도 그걸 감안하고 일했어. 그러니 걱정 마.”

베로니카 언니는 내가 하는 말을 듣더니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내게 실망하는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날 걱정하는 시선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레베카, 다음부터는 귀족과 무언가 일을 진행하기 전에 좀 더 고민하도록 해. 나도 귀족이기는 하지만 권력에 가까운 귀족일수록 위험한 법이야.”

“알았어. 언니 말대로 조심할게.”

“항상 내 잔소리를 잘 들어줘서 고마워.”

“겨우 그거 가지고 뭘. 그리고 이건 막시안의 거래증서와 함께 금고에 들어있던 부동산증서들이야. 이 중에 하나는 이리스가 예전에 살던 집문서인데 나머지는 뭔지 모르겠어.”

“음... 이건 막시안의 별장이야.”

“별장이라고?”

“그래, 툭하면 나를 초대했었다가 퇴짜를 맞았던 그 별장이지. 워낙 지긋지긋하게 굴어서 주소를 다 외울 정도라니깐.”

막시안 이 새끼는 알면 알수록 기분이 나쁜 놈이다.

사촌형의 정혼자에게 지겹도록 들러붙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죽이려는 시도까지 했으니 놈을 죽여서라도 베로니카 언니를 해방시켜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른 주소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지만 전부 리제르카에 주소지가 있는 집과 땅들이니까 현지에서 조사를 해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할게. 그런데 언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남편이랑 먼저 상의를 해보고 리제르카에 도착하면 알리시아와도 의견을 나눠봐야겠지. 어떻게든 막시안에게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을 작정이니까 걱정 마.”

내 질문에 베로니카 언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평소 같으면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지금은 언니의 발언이 회의적으로 느껴진다.

“언니, 법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을 지도 몰라.”

“그건 무슨 말이니?”

“저번에 요새에서 내가 확보했던 유충 기억나지?”

“물론이지. 아직도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우리가 이번에 살아있는 유충을 확보했어.”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변종마충이 꿈틀거리고 있는 유리관을 가방에서 꺼내서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생물은 보관할 수 없는 가방이지만 밀봉된 용기 안에 들어가 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이 넣을 수 있었다.

“설마 막시안이 가면쟁이 소속이라는 말이니?”

“그럴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손을 잡았을 수도 있고. 뭐든 간에 법은 막시안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거나 아예 붙잡지도 못할 수도 있어.”

“막시안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다리우스 용병단과 가면쟁이들이 서로 깊은 관계일 지도 몰라. 우연히 둘의 의뢰가 겹쳤을 수도 있으니 속단하긴 어려워.”

“언니, 용병단이 따로 의뢰를 받았다면 굳이 그 때를 노려서 공격할 필요가 없어. 용병단 입장에선 나는 의뢰를 하러 나갔을 때 죽이면 되고 언니는 퇴근길에 죽이는 게 더 편하고 안전한 방법이야.”

“우리가 단 둘이서만 몰래 만났을 때 공격을 당한 건 절대로 우연은 아니란 말이구나?”

“맞아. 우린 함께 엘카힘에게 대항했고 가면쟁이들 입장에선 저항하는 사람들을 함께 죽여서 효과적으로 경고를 남길 수 있고 막시안은 어떤 식으로든 언니를 죽이는 게 목적이니 방식은 전적으로 위임했을 거야.”

“아직은 추측이 더 많은 단계이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리제르카로 가면 알리시아를 대동하고 막시안을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겠다.”

“그럼 나는 언니가 리제르카에 오기 전에 알리시아님에게 우리가 얻은 정보를 보여주고 협조를 구할게. 나는 몰라도 언니는 아끼는 게 분명해보이니까 도움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부디 그러길 바라야지. 레베카,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다싶은 일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마. 괜히 권력자들에게 쓰기 좋은 도구로 인식되면 네 인생이 힘들어져.”

베로니카 언니는 이 와중에도 네 걱정을 해줬다.

언니는 귀족이니, 귀족들의 나쁜 행태에 대해서도 많이 봤을 테고 그래서 내게 진심으로 충고를 해줄 수 있는 거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너무 활약하지는 않으려고.”

“좋은 생각이야. 오늘은 우리 저택에서 쉬고 갈래?”

“아니, 리제르카로 돌아가서 알리시아님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보고를 해야 돼.”

“그렇구나. 어쨌든 네 얼굴을 봐서 기분이 좋네.”

“나도 그래.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에 몸조심하고 잘 지내. 알았지?”

“내 걱정은 말고 네 안전을 먼저 챙기도록 하렴.”

나는 베로니카 언니와 서로 진하게 포옹한 다음에 비밀통로로 다시 들어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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