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70화
* * *
나와 라우라는 전투 후의 키스를 적당히 즐긴 뒤에 이동식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지도창을 통해서 내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기습당할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라우라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지 모른다면서 먼저 본부 안으로 들어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라우라의 말대로 진짜 부비트랩이 있었지만 그녀는 간단하게 함정을 해체하고 안전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식의 함정들은 경량 마법갑옷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충격량이 크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라우라 덕분에 어떠한 함정에도 걸리지 않고 본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딱 봐도 용병단장의 집무실처럼 보이는 방에는 온갖 종류의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고 금고가 5개나 있었다.
서류는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지만 금고를 열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문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게 금고 중 하나에 들어있다면 꽤나 곤란해질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가 단장인지 정도는 알아볼 걸 그랬네.”
“나중에 이리스가 합류하면 같이 시체를 뒤져볼게요. 지금은 서류에 집중하도록 해요.”
“알았어.”
나는 라우라의 제안에 따라서 사방에 널려있는 서류를 뒤져보기에 앞서서 피가 잔뜩 묻은 마법갑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라우라가 모든 함정을 제거했으니 더 이상은 마법갑옷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중요한 증거물을 오염시킬 수는 없다.
“의뢰인들이 정말 많네. 대부분은 의뢰를 수행하느라 본부를 떠난 상태야. 어쩐지 사람이 너무 적더라.”
“이 정도로 큰 용병단이라면 백작령 소속 기사단 수준의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본대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정말 힘든 싸움이 되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다짜고짜 불을 질러버렸을 거야. 방화범이 되는 거지.”
“레베카님의 목숨을 노렸던 쓰레기들이니까 정말 잘 탔을 것 같네요.”
라우라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가 프랑카의 특수상점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마구 적을 찔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라우라가 별로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리우스 용병단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나보다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레베카님, 이 장부를 한 번 보세요.”
“어디 보자... 모슬리는 갱단 토벌작전의 정보수집 대가로 의뢰대금을 지불했고 라리사는 가족을 경호하는데 용병단을 고용한 대가를 지불했구나.”
“이 장부만 봐서는 둘 다 레베카님과 베로니카님을 습격한 배후가 아니에요.
“그러게. 이건 눈속임일 수도 있으니까 계속 뒤져보자.”
“네, 레베카님.”
난 장부 하나로 용의자들의 무고함을 속단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서류를 훑어보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용병단을 고용했던 기록을 쭉 보고 있으니 참 돈을 많이 벌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영 그럴싸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볼 서류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지만 이걸 다 본다고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레베카님? 라우라?”
어디선가 소심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 이리스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린다.
나와 라우라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집무실 문 양 옆에 숨어서 이리스가 안으로 들어오가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리스가 집무실 안쪽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꺄아아악!”
나는 깜찍하게 비명을 지르는 이리스의 반응을 즐기려고 했지만 내 얼굴로 날아드는 개머리판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을 떴을 때는 이리스가 날 보면서 훌쩍거리고 있는 모습과 라우라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레베카님, 정말 죄송해요!”
“아, 아니야. 그냥 내가 당할 짓을 한 것뿐이야. 이리스,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이리스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적진에서 놀라게 만든 내 잘못이지 몸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사람의 잘못은 아니다.
아무튼 무기를 든 사람을 상대로는 절대 함부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여긴 의무실이니?”
“네, 저희들이 레베카님의 가방을 쓸 방법이 없어서 여기로 옮겨와서 돌봐드렸어요.”
“그렇구나.”
나는 가방에서 고속회복캡슐을 꺼내서 물과 함께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거울을 보니 내 미모가 돌아오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휴우, 얼굴을 다쳤어도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저도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너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았어요. 제가 레베카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라우라, 애초에 널 부추긴 내 탓이야.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레베카님이 얼굴을 다치셔서 너무 마음이 아픈 걸요.”
“괜찮아. 봐봐, 벌써 다 나았잖아.”
나는 내 예쁜 얼굴을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번갈아가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볼을 발그레 불들이더니 동시에 내 볼에 뽀뽀를 해줬다.
“자, 그럼 돌아가서 마저 증거를 찾아보자.”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 다시 용병단장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류와 싸우기 전에 금고를 따기로 결정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에서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뒤적거리느니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처음에는 마력산탄총으로 금고의 잠금장치를 쐈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력소총도 쏴봤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았고 마법갑옷을 입고 억지로 열어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포기하려고 했지만 이리스가 다른 금고를 마력저격소총으로 쏴서 잠금장치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잘했어, 이리스!”
“히힛, 더 칭찬해주세요.”
나는 이리스의 요청에 따라서 그녀를 얼싸 안고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다가 이마와 볼, 입술에다가 뽀뽀를 퍼부었다.
이리스가 아니었다면 금고를 하나도 열지 못하고 시체나 뒤지고 있었을 것이다.
“레베카님! 금괴가 가득해요!”
“금괴... 라고?”
나는 라우라가 금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서둘러 금고 쪽으로 다가가서 내부를 확인했다.
필요한 증거 같은 것은 없었지만 금고를 가득 채우는 금괴를 전리품으로 챙길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이 정도 금괴면 평생을 떵떵 거리면서 놀고먹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만들었는지 뻔히 찍혀있는 금괴를 바로 써먹는 건 위험한 일이니 안전하게 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차를 훔치고 금고를 터는 게임에서는 훔친 금괴를 한 번 녹였다가 다시 만드는 방식으로 세탁을 하던데 그런 게 가능한 장소를 내가 찾을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정도 금괴면 귀족신분을 사는 걸 넘어서서 아예 작위도 살 수 있겠는 걸요.”
“돈으로 귀족이 될 수 있는 거였어?”
“네, 제가 태어날 무렵에 즉위하셨던 지금의 황제폐하께서 만드신 법에 의하면 아주 많은 돈을 국고에 기부하면 황제폐하께 남작이나 자작의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어요. 귀족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만요.”
“어차피 사교계에 나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돈으로 신분을 사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자. 지금은 명예기사만 되어도 충분하니까.”
신분제가 이렇게 엄격한 사회인데도 매관매직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황제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면 돈에 미쳐서 나라를 말아먹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충성하는 귀족을 만드는 일은 수월할 것이다.
저번에 루시우스가 언급했던 대로 영주제도를 폐지할 작정이라면 반발하는 귀족에 맞설 다수의 충성파가 필요하겠지.
머지않아서 정치계에 피바람이 불 것 같으니 괜히 돈이 생겼다고 바로 귀족이 되려고 달려가지 말고 정말 절박하게 필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목적은 새로운 인생을 즐기는 것이지 명예와 권력을 추종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내가 금괴를 모조리 챙기는 동안에 이리스는 다른 금고들의 잠금장치도 모조리 총으로 쏴서 열었다.
두 번째 금고에는 역시나 금괴가 잔뜩 들어있었고,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모조리 가방에 집어넣었다.
세 번째 금고는 아쉽게도 텅 비어있었고 네 번째 금고에는 누군가가 구매한 다양한 부동산과 관련된 각종 증서들과 막시안 남작의 도장이 찍힌 거래증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부동산증서들은 무시하고 일단 거래증서부터 살펴보았다.
증서에 적힌 날짜, 간략하게 정리된 의뢰의 내용과 결과를 보니 막시안이 우리를 공격했던 배후라는 게 명백해졌다.
그런데 대체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난 이 세상에 와서 막시안과 직접 만난 적이 없고 그와 관련된 사람과 다투거나 해를 입힌 적이 없다.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이리스의 과거사이지만 자기가 노예로 팔아먹어 놓고 구매자인 나에게 원한을 품는 건 너무 이상하다.
만약 이리스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라면 나와 베로니카 언니를 공격해서 일을 크게 만드느니 우리가 셋이서 도시 밖으론 나갔을 때 납치를 기도하는 게 더 안전하고 성공확률도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막시안을 화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다.
갱단들이 막시안과 연관이 깊을 수도 있고 과장 좀 보태면 찰스 패거리가 그럴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베로니카 언니를 노린 공격이었겠지. 프랑카로 돌아가서 언니에게 막시안과 무슨 관계인지 물어봐야겠다.’
나는 거래증서 다음으로 부동산증서들을 살펴봤는데 대부분 처음 보는 지명들이었지만 딱 하나가 리제르카에 주소지가 있었다.
“그 주소는...”
“아는 곳이야?”
“막시안의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 저희 가족들이 살던 집이에요.”
“뭐?”
이리스의 말을 들은 나와 라우라는 둘 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 왜 이리스의 고향집문서가 용병단의 금고에서 튀어나오는 거야?
설마 루시우스가 말했던 대로 진짜 가면쟁이들이 배후에 있고 막시안도 놈들과 한패라는 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날 죽이려는 가면쟁이들과 베로니카 언니를 죽이려는 막시안이 손을 잡은 결과가 그 날의 습격이라면 최소한 누군지 확실한 막시안이라도 죽여야 된다.
하지만 귀족을 죽이는 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베로니카 언니도, 알론도, 알리시아도 날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 완벽한 암살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빠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던 걸까요? 그럼 그냥 말로 했으면 좋았을 걸...”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니까 미리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런 무시무시한 집단을 등지는 행동은 보통 위험하고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그렇겠죠. 레베카님, 그게... 죄송하지만 저희 가족들이 살던 집에 가 봐도 될까요?”
“그럼, 물론이지. 대신에 이번 사건으로 인한 후폭풍이 잠잠해지거든 가보자.”
“네, 레베카님.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까지 숙이면서 고마워하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복수를 하겠다며 돌아다니는 길에 자꾸만 이리스에게 안 좋은 일이 발견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다섯 번째 금고를 열어보았다.
“이건... 분명히 그때 그 유충이잖아?”
나는 요새에서 보았던 유충이 들어있는 유리관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방금 전까지는 가면쟁이들의 개입이 추측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막시안은 가면쟁이들의 정체를 알든 모르든 간에 그들과 손을 잡은 게 분명하다.
막시안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일이 더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네요. 이건 알리시아님보다는 베로니카님께 먼저 알려드리는 게 좋아 보여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막시안에 대한 정보를 수월하게 얻으려면 알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적절한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금괴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확실히 돈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별로 없지만 꼬투리 잡혀서 전부 뱉어내야할 지도 모르니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일단은 우리가 입수한 정보로 거래를 하도록 하자.”
“네, 레베카님. 그런데 그거 살아있네요?”
“정말? 진짜네.”
나는 의외로 살아있는 유충을 상대로 즉시 분석스킬을 사용했다.
레벨 : 1
종족 : 변종마충
성장단계 : 3령
적합숙주 : 인간여성
변이유발인자 : 야수족
변이성공확률 : 12.73%
유충, 그러니까 이 변종마충이라는 생물이 사람을 마족처럼 변이시키는 건 확실해졌다.
그 과정이나 변이가 일어나는 원리 같은 건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변종마충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분석스킬을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아직 찾질 못해서 이런 단편적이고 부족한 정보에 의존해야하다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변종마충이라면 일반적인 마충도 있다는 소리니까 일단 마충에 대한 정보를 도서관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레베카님, 기사단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슬슬 철수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알리시아가 우릴 보호해준다고 했지만 무작정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탈출로는 내가 확보할게”
나는 피가 묻어서 가방에 집어넣을 수 없는 마법갑옷을 다시 입었고 지도창으로 주변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돌진해서 벽에 구멍을 뚫어버렸고, 뒤를 따라서 나온 라우라와 이리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서 전속력으로 현장에서 도망쳤다.
모든 문서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모슬리와 라리사의 무고를 입증할 거래증서와 금고에서 발견한 금괴와 증서들 그리고 살아있는 변종마충은 확실하게 챙겨 나왔다.
나는 한참을 달려서 리제르카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숲 속에 들어와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라우라, 이리스와 함께 웃으면서 임무성공을 자축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