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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63화 (63/271)

〈 63화 〉 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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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첫 노예로 라우라를 구입한 것 자체가 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라우라는 지난 엿새 동안 영주의 저택을 제외한 나머지 고위관료 4명의 저택에 잠입해서 중요한 정보를 빼오는 특출한 능력을 선보였다.

나는 처음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나중에는 반쯤 안심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마안으로 라우라의 움직임을 지켜봤던 이리스는 라우라가 임무를 완수하는 날이면 그녀가 어떤 식으로 잠입해서 임무를 성공시켰는지에 대해서 내게 재잘거렸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인파에 섞여서 경비들의 옆을 태연하게 지나가거나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건물의 벽을 가볍게 타고 올라가거나 돌멩이를 던져서 시선을 끌고 그 사이에 지나가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곳을 넘어가는 식의 이야기였다.

라우라는 그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절대로 경비나 다른 사람들을 기절시키거나 잠재우지 않았는데, 다른 귀족의 저택에 연달아 잠입하려면 아무도 본인이 잠입했던 것을 눈치 채지 못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언젠가 했던 암살게임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라우라가 입수한 정보의 양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누가 나와 베로니카 언니를 공격한 배후인지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위관료들 중에서 다리우스 용병단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무관 모슬리와 장군 라리사가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계약금을 지불한 사례가 포착되었다.

각각 치안유지와 마족토벌을 담당하는 고위관료들이니 용병단과 관련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예산을 써서 공개적으로 일을 추진한 게 아니라 사적으로 용병단에게 계약금을 주고 비공개로 일을 시키는 건 너무 수상하다.

기밀을 요하는 첩보와 관련된 일이라면 예산을 다른 사업으로 세탁해서 집행하고, 용병단에게 돈을 줄 때도 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명과 집단의 이름을 썼을 텐데 대놓고 본인들의 이름을 쓴 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무래도 다리우스 용병단을 직접 조사해봐야 확실해질 것 같네.’

나는 일단 모슬리와 라리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놓고 좀 더 많은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영주의 저택은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면서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 때 라우라를 잠입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다른 곳보다 훨씬 경비가 삼엄해서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으로서 가장 믿을만한 협력자는 베로니카 언니이지만 아쉽게도 언니는 영주를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있다.

친부모처럼 자신을 아껴준 사람을 의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내 입장에선 곤란하다.

그래서 난 베로니카 언니가 타협할 생각이 없는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 다리우스 용병단의 이동식 본부가 있다는 리제르카로 가는 일에 협조를 구하려고 한다.

말과 마차는 내 돈으로 구입할 수 있어도 믿을만한 경호 인력을 고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베로니카 언니의 인맥을 활용해서 안전한 곳과 계약을 맺는 게 좋아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모험가길드에 직접 의뢰를 올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C급 이상 모험가들은 말 그대로 프로이기 때문에 D급 이하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라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갱단들이 대량으로 모험가길드에 가입하고 있을 때도 그들 중에서 C급 이상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아무리 실력이 좋고 실적을 올렸다 하더라고 수도의 모험가길드 본부에서 인격적인 부분을 인정받지 못하면 C급으로 승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베로니카 언니의 도움을 받는 게 여러모로 편할 거야.’

나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기대를 걸면서 언니가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정말 많은 책들이 있어서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베로니카 언니는 그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읽었다.

언니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평소에 안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잘 어울렸고 지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겼다.

저 상태로 안경을 고쳐 쓰며 전문적인 과학용어를 말하면 엄청 섹시하지 않을까?

나 참,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얼른 엘프족 노예를 구입해서 번뇌를 그쪽으로 풀던가 해야지.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심심풀이로 노예를 사지는 말자.

“안녕, 레베카.”

베로니카 언니는 내 인기척을 느끼자 고개를 들고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언니는 기지개를 켠 뒤에 내게 맞은편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베로니카 언니가 뭘 읽고 있었는지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역사책인 것처럼 보인다.

혹시 카론 왕조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는 걸까?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 집안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레베카, 그동안 성과는 얻었니?”

“모슬리와 라리사가 다리우스 용병단과 사적으로 거래한 증거를 발견했어. 그런데 너무 당당하게 본인들의 이름으로 계약금을 지불한 게 마음에 걸려.”

“용병은 귀족의 사적인 의뢰도 기꺼이 수행하는 자들이니까 이상할 것까지는 없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참 공교롭네.”

베로니카 언니는 내가 보기 좋게 정리한 정보를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역시 언니는 날 의심하거나 라우라가 입수한 정보를 평가절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이 세상으로 와서 베로니카 언니와 친해진 건 정말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적으로 기사단 정보부를 동원할 수는 없지만 평소에 입수하는 정보를 열람하는 건 문제가 없으니 한 번 대조해보도록 할게.”

“고마워.”

“그리고 영주님의 뒤는 캐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사단과 내무부의 정보원들이 너희들을 주시하고 있거든.”

“라우라가 들킨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 거야. 어느 정보부에서도 고위관료의 저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는데다 각 저택에서의 움직임도 달라진 게 전혀 없어. 라우라의 솜씨가 내가 생각한 것을 훨씬 초월하는 모양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현상금사냥꾼이라는 직업이 참 대단한 것 같아.”

“내 생각에 라우라는 단순한 전직 현상금사냥꾼이 아닌 것 같아. 원래 다른 일을 하다가 생계를 위해서 현상금사냥꾼이 된 느낌이 들어.”

“에이, 설마. 노예는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거짓말은 못해도 진실로 다른 진실을 숨길 수는 있지. 그래도 라우라는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

“응. 난 언니가 날 믿어주는 것처럼 라우라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어.”

베로니카 언니는 내 말을 듣더니 기분이 좋은 듯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베로니카 언니의 말대로 라우라가 현상금사냥꾼이 되기 전에 다른 일을 했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날 사랑해주는 귀여운 라우라이지 누군지로 모를 과거의 라우라가 아니다.

“난 너희들이 평생 그렇게 잘 지내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저번에 말했던 도청장치라는 것을 저택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봤는데 발견하지 못했어. 정말 그런 마법도구가 실존하긴 하는 거니?”

“내 고향에는 있었어.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부탁했던 거야. 미안해, 괜히 헛고생만 시켰네.”

“괜찮아. 오랜만에 대청소를 한 셈 치지 뭐. 그리고 실존하는데도 귀찮다고 대충 넘어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아?”

“그건 맞아. 저기, 언니. 이번 기회에 리제르카로 가려고 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들 중에서 우릴 경호를 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

“당장 떠오르는 건 남편의 가문에서 파견된 경호원들이야. 이리스가 엄청 싫어하겠지만...”

젠장, 하필이면 파라이네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언급될 줄이야.

파라이네의 이름을 쓰거나 그 밑에서 일한다고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이리스 입장을 생각하면 그들의 경호를 받기는 어렵지 싶다.

아무래도 모험가길드에다 의뢰를 올려야겠다.

“그냥 나랑 같이 갈래?”

“안 돼. 그러다 괜히 사고라도 나면 언니의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어.”

“어머,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니? 기특해라.”

“당연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목숨이 위협받은 건 물론 끔찍했지만 자칫 베로니카 언니가 과다출혈로 죽을 뻔 했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만약에 특수상점에서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지금 내 앞에 베로니카 언니는 없을 것이다.

“걱정 마. 이번에는 기사단의 업무 때문에 출장을 가는 거라서 호위 병력도 많이 붙어.”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 언제 떠나는데?”

“열흘 뒤에.”

나는 베로니카 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열흘씩이나 아무 것도 못하고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라우라가 한 번 더 저택들을 쭉 잠입하는 것을 돕든가 아니면 섹스밖에 없을 거다.

“뭐? 그건 너무 늦잖아.”

“최대한 빨리 떠나려면 남편의 경호원들에게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어. 모험가길드에 의뢰를 올려도 시간이 제법 걸릴 테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든 상황이라서 말이야.”

“그럼 파라이네 가문은 어떻게 믿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남편은 내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직접 경험해봐서 알아.”

베로니카 언니는 남편인 알론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나도 물론 언니에게 믿음을 받고 있지만 알론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보다 가족을 더 믿을 수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베로니카 언니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경호원들이니 무작정 배척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줄래?”

“물론이지. 나중에 후회할 일이 없도록 이리스와 제대로 상담하도록 해.”

“알았어. 꼭 그렇게 할 게.”

베로니카 언니는 가끔은 나보다 이리스를 더 신경 쓰는 것 같다.

분명 예전에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이리스에게 약속했었지.

“언니, 이리스와 관련된 일은 조사해봤어?”

“남편이 도와줘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야. 노예의 증언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증거를 찾는 일이 중요한데 워낙 용의주도하게 은폐를 해서 쉽지가 않아.”

“이번 기회에 이리스의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려고 하는데 가능할까?”

“막시안 남작의 저택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근 숲에 집단으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돼.”

“나머지 사람들의 시신은?”

“그건 조사 중이야.”

아무래도 이리스의 위해서 인연퀘스트를 진행하는 건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예 막시안 남작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베로니카 언니에게 끼칠 민폐를 생각하면 쉽사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이번에도 라우라의 잠입실력을 믿는 수밖에 없으려나.

아니야, 좀 더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지도 몰라.

“그런데 막시안 남작은 남편 분하고는 얼마나 가까운 친척이야?”

“사촌이야. 작은아버지의 삼남이라더라. 너무 일찍 작위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아주 오만하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사람이야. 그래서 남편도 정말 싫어해.”

알론과 막시안이 서로 사이가 나쁘다면 알론을 이용해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거나 아예 그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을 거다.

마침 은혜를 입혀둔 상태이니 그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알론은 베로니카 언니가 아니니까 좀 더 신중하게 다가가도록 하자.

“언니, 남편 분과 대화를 할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을래?”

“그럼 오늘은 우리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자. 라우라와 이리스에게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소식을 알리도록 할게.”

“응. 부탁할게.”

나는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에 신세를 지고 있는 날이 많지만 아직까지도 언니의 가족과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

일반적인 귀족의 입장에서 노예와의 겸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 입장에선 라우라와 이리스를 떼놓고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내 사랑들에겐 미안하지만 혼자서 호사를 누려야할 것 같다.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니까 다른 일을 하고 와도 돼.”

“아니야, 그냥 언니랑 같이 있을래.”

“내가 그렇게 좋니?”

나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언니와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서재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백과사전이다.

생물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으니 이참에 익혀두면 좋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고향타령을 하면서 변명만 늘어놓을 수는 없다.

처음 기사단장을 만났을 때는 기억상실이라고 둘러댔고 그 뒤로는 제국 바깥에서 왔다고 했다가 졸지에 옛 왕족의 후손으로 여겨질 정도로 일이 커졌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고 결국엔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기 마련이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백과사전을 흥미롭게 읽어보다가 아예 빌려가기로 했고 베로니카 언니는 하녀를 불러다 내가 보던 백과사전을 내 방으로 보내주었다.

베로니카 언니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언니의 뒤를 따라서 저택의 식당으로 향했다.

“언니, 내가 식사예절은 머리로만 배워서 그런데 괜찮을까?”

“남편은 널 충분히 이해해줄 사람이고 마침 오늘은 손님도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손님은 자주 와?”

“사흘에 한 번 정도. 귀족치곤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적은 편이지.”

“내 성격에 귀족은 못하겠다. 친목을 다지는 일에 약하거든.”

“아예 귀족사회와 담을 쌓고 사는 귀족들도 있어. 나도 그런 식으로 평생 기사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가만두질 않네.”

“아직도 후계자가 되기 싫은 거야?”

“난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영주의 후계자가 되면 내 자유가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아. 이렇게 너와 단 둘이서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시간도 거의 없어질 거야. 난 그게 너무 싫어.”

“그럼 영주님에게 솔직하게 말해봐. 언니를 친자식처럼 아끼시는 분이시라면 분명 인정해주실 거야.”

“노력해볼게. 자, 그럼 웃는 얼굴로 우리 가족들을 만나야겠지.”

베로니카 언니는 유리창 앞에서 손으로 얼굴을 마사지하면서 굳은 표정을 풀었다.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가장의 모습 같아서 뭔가 마음이 짠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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