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61화 (61/271)

〈 61화 〉 60화

* * *

나는 어제 베로니카 언니와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 외출허락을 받아냈다.

처음에는 역시나 반대했었지만 언니는 이미 나만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 결국 내 설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덕분에 라우라와 이리스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현상금사냥꾼길드로 갈 수 있었고 나는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내가 특수상점으로 가는 이유는 살 게 있어서가 아니라 어제 포상금으로 소금화 2닢을 받아서 추가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다.

원래 베로니카 언니가 자비로 1백만 라기르를 내게 주려고 했었지만 루시우스가 언니를 대신해서 2배 더 많은 돈을 준 것이다.

‘날씨가 좋네. 얼른 겨울이 끝나면 좋겠어.’

나는 오랜만에 포근한 겨울 햇살을 즐기며 길을 걸었다.

오늘은 이틀 전과 달리 도시에 적들이 멋대로 활보하지 않아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기사단은 평소보다 철저하게 치안을 유지했고 도심에서의 총격전에 한차례 크게 놀랐던 시민들도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도 도시의 분위기는 여전히 밝았고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문득 내가 처음 머무르게 된 도시가 프랑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분위기가 엉망인 도시였다면 이 세상에 대한 첫인상이 굉장히 나빴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감을 많이 잃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프랑카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골치 아픈 적들과 접점이 생기고 말았지만 그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희망을 가졌다.

나는 인정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가기 전에 지도창으로 적들의 움직임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그저께 겪은 일로 난 좀 더 신중해졌고, 좀 더 안전함을 지향하게 되었다.

마음껏 이 세상을 즐기려면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도 조만간에 경량 마법갑옷을 선물 받으면 몸을 사릴 일이 많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내 치트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급하면 바로 꺼내서 입으면 되니까.

길거리에 대뜸 벌거벗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목숨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그나저나 루시우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단순히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노인 같지는 않단 말이야.’

나는 내게 선뜻 호의를 베풀어줬고 내 공격적인 말투에도 관대한 태도까지 보였던 루시우스를 좀처럼 신뢰하기 어려웠다.

루시우스의 인상이나 분위기, 태도를 보면 딱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베로니카 언니의 비밀스러운 만남장소가 공격받은 것을 이유로 내부인의 배신을 의심하는 내게 보였던 그 관대하지만 묘한 태도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단순히 부하를 감싸는 상사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게 내 기분 탓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어떻게 그리도 빨리 가면쟁이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냈는지도 의문이다.

마치 그렇게 믿어달라고 호소를 하는 듯한 연출 같단 말이야.

이래서 증거가 필요한 것이고, 라우라가 여러 군데에서 성공적으로 잠입 작전을 완수해야할 이유다.

여기서 문제는 기사단이나 프랑카 내무부의 정보원들이 얼마나 유능하냐는 것이다.

자칫하면 라우라가 붙잡혀서 우리 모두가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저택에 도청장치라도 설치한 상태라면 우린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무전기 같은 것도 없는 세상에 그런 도구가 있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오늘 애인들이랑 다시 모이면 방부터 뒤져봐야겠다.’

나는 몇 시간 뒤에 할 일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특수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점 안에는 그 날의 피비린내 나는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누가 청소를 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증발해서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면 주기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없애버리는 기능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체를 숨겨두면 어떻게 될까? 쓰레기처럼 감쪽같이 사라질까? 다음에 한 번 시험해봐야겠어.’

나는 제법 나쁜 마음을 품고 말았다.

정말 특수상점이 시체도 치워준다면, 예전에 찰스를 죽였을 때처럼 또 버러지 같은 누군가를 죽였을 때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저번에 봤던 거미가 여전히 거미줄을 치고서 날벌레를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생물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여기서 자다가 소멸하면 정말 어이가 없을 거야.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네.’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지금 보니 특수상점이 좀 더 넓어졌고 내부구조도 좀 바뀌었다.

성인용품만 보였을 때와는 달리 생필품과 총알, 의약품이 종류별로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고 특정 온도에 보관해야 하는 상품의 경우에는 마법으로 작동하는 보온장치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두침침했던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고 인테리어도 세련되게 바뀌어서 꼭 편의점이나 작은 마트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계산대 대신에 자리를 잡고 있는 까만 수정구로 다가가서 구매창을 열었다.

특별히 변한 내용이 없는지 살펴보니 기존에 없었던 판매기능이 생겼고 판매하는 상품이 많아져서 그런지 검색기능과 필터기능도 추가되었다.

판매기능을 사용하면 내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즉시 환금할 수 있다고 한다.

시험 삼아서 작은 물병을 하나 팔아봤더니 1 라기르가 동전주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아쉬운 점은 시세보다 싼 가격에 물건이 팔리기 때문에 제대로 값을 받고 싶으면 특수상점이 아니라 다른 매입처를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보석이나 금처럼 진짜 비싼 것들 말고는 귀찮아서 다 여기서 처리하게 될 것 같다.

‘그럼 이제 새롭게 투자를 해보자. 일단 가진 돈의 절반까지만 투자해야지.’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조리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저번처럼 당장 급하지도 않을 뿐더러, 직접적인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투자에 거의 전 재산을 부어버릴 수는 없다.

돈이 쪼들려서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사주고 싶은 것도 못 사주는 사태가 발생하는 건 정말 싫다.

난 우선 40만 라기르를 소모했고, 그 대가로 다양한 종류의 마법도구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문명의 여러 도구나 기계들에 비하면 수준이 많이 떨어졌지만 모두 마법술식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소음이 작고 진동이 적다는 게 큰 장점이다.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들은 내가 집이라도 사지 않는 이상에야 살 필요가 없지만 손전등이나 라이터, 전동칫솔 같은 건 당장에라도 유용하게 쓸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새로운 상품을 훑어본 다음에 투자를 더 하려고 했는데 이번이 마지막 투자라는 설명을 보니 괜히 기대감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50만 라기르를 투자했지만 이상하게도 상품에 아무런 변동이 생기질 않았다.

나는 순간 화가 날 뻔 했지만 곧 내 눈앞에 크게 뜨는 글귀가 날 즐겁게 만들었다.

‘워프기능? 그래, 50만 라기르나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나는 절로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미소 지었다.

워프기능은 도시에 존재하는 특수상점 사이를 순식간에 오갈 수 있는 치트나 다름없는 기능이다.

이것만 있으면 다른 도시로 가더라도 언제든지 특수상점을 통해서 프랑카의 지인들을 만나러 돌아올 수 있고 급하면 바로 다른 도시로 도망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장사를 하게 된다면 치트가방의 기능과 합쳐져서 인건비와 물류비용이 0에 수렴하여 경쟁자들에 비해서 엄청난 가격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대신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특수상점으로는 워프기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여행을 위해서는 마차를 사야한다는 소소한 단점이 있긴 하다.

‘조만간에 다른 도시로 가서 특수상점을 찾아가야겠어. 당장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특수상점을 안전가옥으로 쓸 수 있지만 언제까지고 한 곳에서만 숨어서 살 수는 없으니 별도의 탈출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어.’

나는 목숨이 노려지고 있는 상황에 며칠씩 걸려서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탈출로가 없으면 서서히 말라죽을 게 분명하다.

어차피 제국 전체를 여행 다닐 생각이었으니 경량 마법갑옷을 받는 즉시 실천에 옮기도록 하자.

‘워프기능도 좋지만 언제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 하우징 기능도 있는 그런 안전한 장소 말이야. 그리고 나중에 라우라의 고향으로 가면 빌리징 기능이 해금되면 좋겠다.’

나는 모처럼 게임다운 기능인 워프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욕심이 더 커졌다.

나만의 집을 짓고 싶고, 나만의 마을도 만들고 싶다.

그렇다고 나라까지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너무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고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싫다.

‘애완동물도 몇 마리 키우면 좋을 것 같기도 해. 크고 멋진 걸로 말이야.’

난 드레이크나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망상을 품으며 특수상점에서 나왔다.

솔직히 특수상점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도 많은 게 사실이다.

총기 액세서리나 마력총, 마법갑옷 같은 것도 팔아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뒷바라지는 충분히 해줄 테니 목숨을 건 싸움은 알아서 하라는 걸까?

‘이제 슬슬 돌아가자. 혼자서 오랫동안 밖에 있어서 좋을 게 없어.’

나는 지도창을 열고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난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라우라와 이리스가 좋아하는 길거리음식을 사가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저택에서 주는 음식은 뛰어난 요리사의 솜씨 덕분에 늘 훌륭하지만 가끔은 보통 사람들이 만든 자극적인 맛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도 괜찮은 것들 위주로 구입한 다음에 그것들을 양 손에 가득 들고서 길을 걸었다.

누군가 자식들에게 주는 거냐고 물어봤는데 난 그냥 미소로 답변했다.

내가 좀 많이 사긴 했나보다.

특히 저택으로 들어갈 때 하녀들이 혹시 자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생각이냐고 장난스럽게 물어볼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참 평화로운 일상인데 말이야. 하여간에 그 가면쟁이들을 빨리 물리쳐야 내 새로운 인생이 반짝반짝 빛나지 싶어. 전부 나가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면쟁이들을 모조리 저주하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솔솔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라우라와 이리스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꿈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나팔꽃과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나만 억울하게 식물폭행죄로 잡혀갔다.

어째서? 대체 왜?

나는 아무리 꿈이라도 너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잠에서 깨고 말았다.

“레베카님, 괜찮으세요?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마주친 사람은 목욕가운을 입고 있는 이리스였다.

이리스는 날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는데 시답잖은 꿈을 꾼 뒤에 받을 만한 눈빛을 아니었다.

나는 말없이 이리스를 내 품으로 잡아끌어서 꼭 안았다.

그냥 난데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이리스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내 품에 기대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라우라를 보았다.

그녀는 오늘도 입에 소스를 잔뜩 묻히고 있었지만 예전보다는 덜 요란했다.

보아하니 라우라와 이리스는 둘이서 내가 사온 음식을 대부분 먹어치우는 와중에도 내가 먹을 것은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라우라, 맛있니?”

“네, 레베카님. 헤헤헤.”

라우라는 내 질문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먹을 것에 정신이 팔려서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좀 미안한 모양이다.

그녀는 입을 깔끔하게 닦아낸 뒤에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나는 라우라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그녀의 향취를 만끽했다.

향긋한 샴푸냄새 너머로 떡볶이 냄새가 나는 게 뭔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설계도는 입수했니?”

“네,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라우라는 현상금사냥꾼길드에서 입수한 설계도들을 내게 가져왔다.

영주의 저택과 관공서 그리고 나머지 고위관료들이 사는 저택의 설계도들이었다.

나는 설계도를 하나씩 펼쳐서 지도창을 업데이트했고, 건물 내부의 움직임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경비가 움직이는 패턴과 일정을 파악해서 라우라에게 적절한 잠입시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지도창에 집중하는 사이에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낀 라우라는 내 귓가에다 직접 속삭이기 시작했다.

“레베카님, 좋은 소식이 2가지 있어요.”

“정말? 얼른 말해주라.”

“제 지인들이 그러는데 레베카님과 베로니카님을 습격한 조직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고 해요.”

“어떤 놈들이래?”

“다리우스 용병단이에요. 현상금사냥꾼길드나 모험가길드에서 추방된 자들이 결성한 질 나쁜 조직이라고 해요.”

“용병? 나라는 하나고 영지끼리는 전쟁도 못하는데 무슨 용병이래?”

“기사단이 바쁠 때 그들을 대신해서 마족과의 전쟁을 수행해요.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대부분은 귀족들의 명령을 받고 더러운 일을 맡아서 해요.”

“그렇구나. 다리우스 용병단의 본부가 어딘지는 알고 있데?”

“이동식 본부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리제르카에 있다고 해요. 프랑카에서 동쪽으로 일주일 정도 가면 있는 도시에요.”

마침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었는데 용병단의 본부가 있다는 리제르카를 목적지로 삼아야겠다.

대놓고 본부로 들어가서 따질 수는 없지만 핵심 인물을 붙잡고 심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제르카는 어떤 도시야?”

“프랑카랑 비슷한 분위기에요. 다른 점은 엘프족이 많이 산다는 것 정도고요.”

내 질문에 답한 것은 라우라가 아니라 이리스였다.

이리스는 리제르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 거기서 살았니?”

“네, 파라이네 가문의 본가가 거기에 있어요.”

나는 이리스의 2번째 인연퀘스트를 수행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스의 어머니의 시신을 되찾아서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면 이리스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많이 나을 것이다.

찾는 과정이 이리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그건 내가 주도적으로 처리해야할 것 같다.

“다른 좋은 소식은 뭐니?”

“그건 이리스가 몸으로 직접 설명해 드릴 거예요.”

몸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이리스가 내 앞에서 목욕가운을 스르륵 풀어헤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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