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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59화 (59/271)

〈 59화 〉 58화

* * *

간밤에는 자다가 깨기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그런지 피곤이 가시질 않는다.

머리가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라우라와 이리스는 피곤한 기색이 없어보여서 다행이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 차례대로 아침키스를 받은 덕에 오늘도 기운이 났다.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만든 규칙인 것 같다.

“레베카님, 바깥에 사람이 많아요. 무슨 일일까요?”

이리스는 커튼을 젖히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나도 상황이 궁금해져서 그녀의 바로 곁에서 함께 밖을 보았다.

이리스의 말처럼 대문에서 현관까지 마차가 줄지어 서있었고 중무장을 한 기사단 병력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다들 귀족들처럼 보인다.

“아마도 베로니카 언니에게 병문안을 온 것 같아. 영주의 조카가 총에 맞았으니 싫어도 얼굴을 비출 수밖에 없겠지.”

“제가 예전에 일했던 곳에서는 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지는 않았어요.”

“그건 아마 그쪽보다 베로니카 언니의 인망이 더 좋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 그런 것 같아요. 친구가 되고 싶을 정도로 친절한 분이니까요.”

“맞아. 노예에게도 기꺼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지. 그나저나 저 중에 요주의 인물들이 있어. 이번 기회에 잘 관찰해보자.”

나는 지도창을 통해서 저택에 온 손님들을 모두 파악했고 그 중에서 외무관인 루퍼스와 장군인 라리사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냈다.

그들은 마침 지금 마차에서 내려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퍼스는 키가 훤칠하고 호리호리하고 깡마른 체형의 엘프족 남성인데, 인상이 깐깐하게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처럼 생긴 노인이다.

그리고 라리사는 마치 미나테린의 자매처럼 여겨질 정도로 큰 체형과 근육질 몸매를 가진 중년 휴먼족 여성인데, 전체적으로 표독스러운 분위기와 큼지막한 입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 때문에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생긴 것만 보면 루퍼스가 배후일 것 같지만 의외로 라리사 같은 스타일이 뒤에서 일을 꾸밀 수도 있으니 외모만으로 단정 짓지는 말아야겠다.

“라우라, 이리스. 오늘은 외출을 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저 둘을 가까운 곳에서 감시하는 게 어떨까?”

“레베카님은 얼굴이 알려졌을 테니 저희들이 하녀로 일하면서 정보를 캐내도록 할게요. 마침 제가 하녀들과 친분이 있는 편이니 이리스와 함께 밥값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면 쉽게 하녀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을 거예요.”

“너희들의 얼굴이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름 유명인사인 레베카님도 아니고 노예에 불과한 저희를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배후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하긴 귀족들이 평민의 노예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긴 하지. 그래도 조심하도록 해. 귀족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몸소 겪고 있잖아.”

“걱정 마세요. 저나 이리스나 귀족을 상대하는 일은 익숙하니까요.”

라우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리스는 예전에 귀족의 저택에서 살면서 일한 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라우라가 귀족사회에 익숙하다는 게 의외다.

나는 라우라에 대해서 이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은 모르는 게 더 많은 모양이다.

현상금사냥꾼으로 활동하면서 필요에 따라서 배운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이리스처럼 지금은 사라진 고향에서 귀족을 위해서 일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조심스럽게 떠봐야겠다.

“그럼 나는 여기에 없는 용의자들을 감시하는 일에 집중할게. 아침 먹고 바로 행동에 옮기자.”

“네, 레베카님.”

나는 내 사랑들과 함께 하녀들이 방으로 보내준 아침식사로 배를 채웠다.

오랜만에 먹는 저택의 식사는 정말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약간 과식을 하고 말았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아침을 다 먹은 뒤에 빈 접시를 가지러온 하녀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하녀들은 라우라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일을 거드는 것을 반겼다.

육체노동을 하는 입장에선 손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겠지.

‘정보를 캐라고 보낸 것까지는 좋은데 혼자서 커피를 마시니 쓸쓸하네.’

나는 달갑지 않은 고독을 느끼며 그윽한 풍미가 일품인 고급스러운 커피를 음미했다.

아침에 키스를 받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커피로 카페인을 뇌에 보충하니 이제야 일을 할 맛이 난다.

나는 수첩을 준비하고서 지도창을 열어 어제 태그해두었던 사람들 중에서 저택에 없는 자들을 먼저 살펴보았다.

마침 영주의 저택과 관공서가 인류추적스킬의 반경에 포함되어서 그곳으로 출근한 용의자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 모두 지도창에서 이름이 하얀색으로 뜬다는 것이다.

지도창에서 적이라고 표시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으로 내게 직접 물리적인 해를 끼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것 같다.

즉, 당장 하얀색이나 파란색으로 이름이 표기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뒤로는 날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유용한 기능이지만 함정도 있었네. 앞으로는 지도창에 뜨는 이름 색깔을 너무 믿으면 안 되겠다.’

나는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고 현재로서 제일 유력한 용의자인 내무관 모슬리의 행적부터 추적했다.

모슬리는 이른 오전부터 영주와 독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만으로 두 사람이 한패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내무관쯤 되는 직책이라면 영주와 단 둘이서만 대화하는 건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어차피 오늘은 대략적인 행보를 알아보기로 했으니 용의자들 사이의 관계를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

20분 정도 영주와 함께 있던 모슬리는 저택에서 나와서 관공서로 이동했고 그의 집무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짧은 만남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영주와 나눴던 대화를 토대로 업무를 진행하려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르고.

나는 모슬리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런 뒤에 계속 모슬리의 이름을 주시했지만 그는 아예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

가끔 모슬리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분 이상 머무르는 법이 없었고 모슬리가 누군가를 만나러 자리를 뜨는 일은 아예 없었다.

만약 모슬리가 배후가 아니라면 그냥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대로 계속 모슬리를 지켜보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느니 차라리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상인 마르코는 모슬리와 달리 오전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뒤따르는 수행원들은 열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나는 수행원들의 이름과 마르코와 밀착해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하면서 주변에 빨간색 이름이 얼씬 거리는지도 주시했다.

마르코는 말 그대로 도시 전체를 누빌 기세였는데 추적스킬의 범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던 마르코는 이제 일정을 다 소화했는지 역시나 모슬리처럼 관공서로 가서 본인의 집무실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마르코의 집무실은 모슬리의 집무실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여차하면 서로 손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둘 다 그럴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하질 않았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사이를 유지하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하더니 한 자리에 모였다.

회의라고 하기엔 모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슨 행사라고 하기엔 다들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구내식당 같은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하나도 소화가 되지 않은 기분인데...’

특별히 알아낸 건 하나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가버렸다.

성과가 없으니 의욕이 바닥을 쳤고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복도에서 음식을 실은 카트가 방으로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레베카님, 저희들 왔어요.”

점심식사를 가져온 하녀들은 다름 아니라 라우라와 이리스였다.

라우라는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고 이리스는 수줍은 미소만 지었다.

내 인생의 활력소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니 사라졌던 의욕이 다시 돌아오는 듯 했다.

두 사람은 아침에 방에서 나갈 때와는 다르게 하녀들이 입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특수상점에서 팔고 있는 코스프레용 메이드복과는 다르게 옛날 영국에서 입었다는 전통적인 메이드복에 가까운 디자인이다.

그래서 소박하고 검소한 느낌에 깔끔해보여서 눈이 편해지는 듯 했다.

“어서와. 안 그래도 보고 싶었어.”

“저희들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옷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잘 어울려. 너희들에게 하나씩 사주고 싶을 정도야.”

“그럼 다음에 그 가게에서 사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이지. 좀 디자인이 많이 다르긴 해도 어쨌든 같은 계열이니 괜찮을 거야.”

나는 메이드복을 사달라며 애교를 부리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약속했다.

어제 지출이 많긴 했지만 그런 옷 몇 벌도 못살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나쁜 건 아니니 부담될 것도 없었다.

“이리스, 너도 사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정말요? 고맙습니다, 레베카님.”

“고맙기는. 그 대가로 내 눈이 즐거워지잖니.”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가 짧은 치마에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메이드복을 입고서 나를 유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이 느껴졌다.

그래, 다음에는 꼭 메이드복을 입혀놓고 섹스를 하자!

“그런데 시간 참 빨리 가지 않아? 난 하나도 배가 안 고픈데 벌써 점심시간이야. 너희들은 배고프니?”

“네, 오랜만에 일을 열심히 했더니 배가 금방 꺼졌어요. 앗...”

이리스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하는 와중에 기가 막힌 타이밍에 꼬르륵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자 이리스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난 귀여운 그녀의 뜨거운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난 굶어도 괜찮을 정도인데 넌 정말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그래도 굶으시면 안 돼요. 조금이라도 드세요. 네?”

“살찌면 네가 책임지는 거지?”

“음... 라우라가 열심히 운동을 시켜드릴 거니까 안심하세요.”

“이리스, 너도 그런 무시무시한 농담을 하는 구나?”

“히히히. 라우라에게 조금 배웠어요.”

“그래? 너무 많이 배우지는 말아줘. 둘이서 같이 날 놀리면 좀 힘들 것 같거든.”

나는 진심으로 곤란해 하는 눈빛을 이리스에게 보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라우라는 못내 아쉬움을 숨기질 못했지만 말이다.

“자, 너희들은 우선 식사를 하도록 해. 배고픈 사람들을 붙잡고 자꾸 말을 시키는 건 미안해서 안 되겠어.”

나는 식탁으로 쓰는 탁자에다 라우라와 이리스를 앉혀놓고 직접 그 위에 음식이 담긴 그릇과 식기를 올려주었다.

항상 내가 대접을 받다가 반대로 하려니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반응을 보니 뿌듯함이 느껴졌다.

“레베카님은 알아내신 게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시간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차라리 지금 이렇게 눈이 빠져라 마법지도만 보고 있느니 용의자들이 집에 있을 시간대에 누굴 만나는지를 집중적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역시 한시라도 빨리 제가 잠입해서 정보를 입수해야겠네요.”

나는 라우라가 하는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름과 움직임 말고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지도창을 하염없이 보고 있느니 용의자들의 자택 설계도를 입수하고 내부인원들의 일정을 파악해서 잠입하기 좋은 시점을 찾아내는 게 훨씬 더 빠르지 싶다.

“제가 잠임을 말씀드린 이유는 저희도 딱히 성과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엄연히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에서 대놓고 음모를 꾸밀 리가 없긴 했죠.”

“그래도 지레짐작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넘어가는 게 더 낫겠지. 잠입의 예행연습을 했다고 치자.”

“네, 레베카님. 그런데 이제 루퍼스와 라리사가 돌아갔으니 뭘 하면 좋을까요?”

“나는 베로니카 언니를 만날 거야. 들을 말도 할 말도 많거든. 그동안 너희들은 여기서 쉬고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

“그럼 어차피 오늘은 하녀들의 도와주기로 했으니 다시 일을 하러 가야겠어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리하지는 마.”

나는 라우라의 입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이리스는 입에 뭘 묻히는 법이 거의 없었고 묻어도 바로바로 닦아냈지만 라우라는 먹은 티를 다 내는 게 참 귀엽다.

라우라에게 처음 먹을 것을 사줬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었지.

“이리스, 너도 일을 하러 갈 거니?”

“네.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라우라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요.”

“뭔데? 나는 해줄 수 없는 일이니?”

“그게... 레베카님께 부탁드리기는 곤란한 일이에요.”

이리스는 심하게 수줍어하는 표정과 몸짓을 하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된다.

“심각한 일은 아니지?”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는데 라우라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 일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걱정 마세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요.”

“그렇구나. 말하기 곤란하면 어쩔 수 없지. 라우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스를 잘 부탁해.”

난 결국 라우라에게 이리스의 문제를 전적으로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스는 내 노예이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사적인 문제를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기도 하고. 이거 정말 기대되는 걸?

“레베카님, 베로니카님을 만나러 가실 때 주의하셔야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뭔데?”

“오후 중에 영주님이 병문안을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영주를 만나는 것 자체는 괜찮은데 귀족사회의 예절을 잘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그건 저희들이 가르쳐드릴게요. 어렵지는 않으니 금방 배우실 수 있을 거예요. 자,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해요. 영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요.”

라우라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내 팔을 잡아끌었고 이리스도 동참해서 내게 반강제로 예법교육을 실시했다.

노예에게 귀족의 예법을 억지로 배우는 평민이라니 뭔가 이상한 구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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