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56화
* * *
나는 눈앞에 보이는 적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마 적들은 특수상점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전면이 유리창이라 밖에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특수상점에 눈길조차 주지 못했을 거다.
앞으로 각 대도시의 특수상점을 일종의 안전가옥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도창을 통해서 적들의 움직임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갑자기 라우라가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방금은 추태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줘.”
“네, 레베카님. 명심하겠습니다.”
라우라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라우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레베카님, 부단장님이 찾으세요.”
“그래? 바로 갈게.”
나는 라우라와 함께 상점 뒤쪽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환자를 눕혀두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더럽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베로니카 언니는 회복물약 덕분인지 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총상을 입은 곳은 전혀 아물 생각이 없어서 지금 상처 위쪽을 감아둔 압박붕대를 풀어버리면 바로 피가 솟구칠 것이다.
“레베카, 넌 다친 곳 없니?”
“덕분에 무사해. 지금은 언니의 몸만 신경써줘.”
“이것 참 내 꼴이 말이 아니네. 기사단의 부단장인 사람이 이렇게 간단하게 중상을 입다니 말이야. 으윽!”
“총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잖아. 일단 말을 아끼고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가져.”
“아까는 구해줘서 고마워.”
베로니카 언니는 힘겨운 와중에도 내 손을 잡으면서 씩 웃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속이 타들어갔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는 게 최선이지만 아직 신시가지 곳곳에 적들이 깔려있고 기사단 병력은 모두 본부에 발이 묶여있다.
지도창에 의존해서 움직이면 되겠지만 적들에게 들켜서 교전이라도 발생한다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내 고민을 눈치 챘는지 라우라가 나섰다.
“레베카님, 지금 당장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인가요?”
“응. 적들이 아직 근처에서 활동 중이야.”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허벅지에 박힌 총알을 빼야할 것 같네요. 이 상태로는 회복물약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할 거예요.”
“혹시 뺄 수 있니? 회복물약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네, 부모님께 배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마취제가 없어서 문제에요.”
나는 내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당연히 마취제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특수상점의 상품목록을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마취제는커녕 비슷한 것도 없었다.
하필이면 성인용품만 잔뜩 팔 게 뭐람!
나는 혹시나 싶어서 까만 수정구를 이리저리 조작해보았고 겨우 투자버튼을 찾아냈다.
설명에 따르면 일정한 자금을 반복적으로 투자해서 상품의 종류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희망을 걸고 10만 라기르를 투자했지만 달라진 것이라곤 접시나 휴지, 세제 같은 생필품이 추가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입술이 바짝 마른 기분을 느끼며 20만 라기르를 추가로 투자하자 이번엔 다양한 구경의 마력탄과 특수탄 그리고 총기관리에 필요한 소모품이 추가되었다.
분명 유용한 상품들이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아, 씨발. 환장하겠네. 속는 셈치고 한 번만 더 투자해보자.’
난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30만 라기르를 썼다.
그러자 정말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의약품을 팔기 시작했다.
나는 상품목록을 꼼꼼하게 뒤져서 마취제와 소독제, 항생제, 지혈제부터 구입했다.
마취제는 주사기에 들어있는 형태였는데 설명에는 그냥 필요한 곳에 바로 꼽아버리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고속회복캡슐과 만능수혈패치뿐만 아니라 거즈나 붕대, 반창고 등등 상처치료에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구입했다.
하나 같이 이 세상의 기술력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투자금 60만 라기르와 약값 40만 라기르를 포함해서 한순간에 1백만 라기르라는 거금을 써버렸지만 베로니카 언니를 위해서라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돈이야 또 벌면 그만이지만 베로니카 언니가 불구가 되거나 죽어버리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라우라, 여기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어. 일단 설명부터 들어봐.”
나는 라우라에게 낯선 의약품과 그것의 사용법에 대해서 찬찬히 알려주었다.
그래봤자 설명을 줄줄 읽어주는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라우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들었니?”
“네! 이제 저를 믿고 맡겨만 주세요.”
“그래. 이리스, 너도 라우라를 도와주도록 해. 그동안 나는 적들을 감시하고 있을게.”
라우라는 내가 준 의약품과 의료용품들을 한아름에 안고서 베로니카 언니 곁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차마 베로니카 언니의 상처를 억지로 벌리고 총알을 꺼내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피했다.
마취제 덕분에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라우라와 이리스가 둘이서 낑낑거리며 베로니카 언니의 허벅지에 깊이 박힌 총알을 빼느라 고생하는 소리가 들려서 괜히 긴장되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총알이 밖으로 빠져나왔고 셋이서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우라, 끝났어?”
“네! 보세요, 깔끔하게 빠졌죠?”
“어... 그래. 알았으니까 다른 곳으로 치워주라.”
나는 피에 푹 젖은 마력권총탄을 대충 본 뒤에 손사래를 쳤다.
난 여태까지 마족이든 사람이든 총에 맞아서 잔혹하게 죽는 모습을 실컷 봐놓고는 이상하리만치 베로니카 언니를 다치게 만든 총알이 굉장히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져서 잠깐이라도 보기가 싫었다.
“둘 다 정말 고생 많았어.”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동시에 포옹하고 애정이 담긴 뽀뽀를 번갈아가면서 해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도 동시에 내 볼에 뽀뽀를 해주는 식으로 보답했다.
그걸 보는 베로니카 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고속회복제와 만능수혈패치가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언니의 상태는 거의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물론 다리에 붕대가 감겨있고 아직은 혼자서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에 계속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언니, 좀 어때?”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야.”
“내가 우연히 발견한 마법이 걸린 가게야. 그래서 적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어.”
난 이곳이 원래 성인용품만 팔고 있던 상점이라는 사실은 아예 말하지 않고 사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었다.
아무리 베로니카 언니라도 내 비밀을 너무 많이 알려주는 건 곤란하니 언제나처럼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 네 가방도 그렇고 넌 은근히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아,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알았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질문에 베로니카 언니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나는 기사단이 본부에 발이 묶여있다는 사실과 여전히 신시가지 전역에 적들이 쫙 깔려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기사단을 완전히 휘어잡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프랑카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야.”
“혹시 영주님일까?”
“음... 큰아버지는 아무리 그래도 가족까지 공격할 분은 아니셔.”
역시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인 걸까?
베로니카 언니는 자신을 어릴 때부터 아껴줬다던 큰아버지인 영주가 배후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사람이 나를 공격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거다.
“그렇다면 영주님을 제외한 나머지 고위관료들 중 한 명이겠네.”
“맞아. 지금은 누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너에 대해서 가장 큰 적개심을 보였던 사람이 배후일 확률이 높겠지.”
“그게 누군데?”
“내무관인 모슬리 남작이야. 그 사람은 널 가장 큰 위협이라면서 당장 체포할 필요가 있다는 말까지 꺼냈었지. 난 그 사람이랑 대판 싸우다가 근신명령을 받았어.”
나는 누군지 얼굴도 모르는 모슬리라는 새끼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말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지도창에서 그를 찾아보았는데 영주저택에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있었다.
당장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뒤흔들면서 진짜 범인이 맞는지 추궁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확실한 배후를 알아낼 때까지 보다 많은 정보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모슬리가 범인이든 다른 놈이 범인이든 간에 프랑크 지방의 최고 권력자들이 용의자인 이상,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리고 권한만 따지면 외무관인 루퍼스 자작, 장군인 라리사 남작 그리고 재상인 마르코 자작도 배후일 가능성이 있어. 나머지 관료들은 단장님과 동급인 작위 없는 귀족이라서 기사단 전체를 통제할 권한이 없어.”
나는 모슬리에 이어서 루퍼스, 라리사, 마르코를 찾아서 지도창에 태그했다.
이제부터 이 네 사람은 보다 쉽게 실시간으로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납치해서 진상을 물어볼 수는 없지만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만 알아내도 수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주도 잊지 않고 태그했다.
베로니카 언니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나는 영주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아무리 고위관료들의 권한이 크다고는 해도 영주의 혈육을 상대로 간단하게 일을 저지르기는 힘들 것 같다.
문득 혈육이고 뭐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세시대 배경의 게임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면서까지 날 죽여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가는 곳마다 큰 일이 벌어지는 것만으로 죽이는 건 좀 비약이 심하지 않아?”
“그건 그래. 나도 그 부분을 지적했었어. 우연만으로 사람을 구속하고 처벌하는 것은 귀족의 체면을 깎는 일이니까. 하지만 너 때문에 부정이 탔다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게 프랑카의 정치계 수준이야.”
“딱 보니까 내 눈동자도 들먹였겠네.”
“정답이야. 원래 있지도 않은 미신까지 만들어내는 수준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차더라고.”
“그냥 언니가 영주가 되는 게 훨씬 낫겠다.”
내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베로니카 언니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뭐야? 내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가?
“레베카, 어디 가서 그런 말은 절대로 하면 안 돼. 그런 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중범죄로 취급받아.”
아, 그래. 여긴 신분제가 공고한 세상이지.
나도 모르게 예전 세상처럼 생각을 해버렸네.
“미안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그랬어.”
“그래, 네가 작정하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오늘 안에 저택으로 돌아가야겠어.”
“뭐? 일단 여기서 며칠 정도 지내자. 아직은 위험해. 여차하면 아예 도시에서 도망가 버리자고.”
“안 돼. 내가 돌아가야 수사가 제대로 진행될 거야.”
베로니카 언니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언니는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
이러면 말리기 힘들어지는데 큰일이네.
“당장 기사단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거야?”
“너만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런 일도 없이 넘어가겠지만 귀족이, 그것도 영주의 조카가 괴한들에게 총을 맞았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어떻게 달라지는데?”
“귀족은 체면을 아주 중시해. 내가 좀 별난 사람이라서 그렇지 보통은 평민과 이렇게 격을 차리지 않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체면을 깎는 행동이야.”
“체면이라...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닌 것 같네.”
“맞아. 귀족에게는 사회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지. 이번 사건은 내 체면과 내 남편의 체면, 큰아버지와 우리 가문, 남편의 가문의 체면까지 걸린 중대한 문제야. 그러니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서 사건에 대해서 진술하고 수사를 요청한다면 누가 배후이든 간에 막을 수 없어.”
베로니카 언니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체면을 걸고 넘어졌다.
귀족으로 살아가는 게 참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언니가 저택으로 돌아가야 우리에게 유리해지겠구나. 알았어, 오늘 안에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줄게.”
“자꾸 신세를 져서 미안해.”
“아니야. 오히려 내가 언니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잖아. 그리고 나중에 그 배후라는 작자에게 배상금을 엄청나게 뜯어낼 테니 걱정 마.”
나는 허세를 섞은 여유를 부리면서 베로니카 언니를 포옹했다.
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언니의 체온이 다시 따뜻하게 돌아왔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언니의 뜯겨나간 귀를 보니 역시 기분이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저것도 회복되겠지만 엘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길쭉한 귀가 반토막이 나버리니 더 안쓰러워 보인다.
“언니, 일단 밤까지 기다렸다가 저택으로 가자. 그게 안전할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너희들도 저번처럼 당분간 내 저택에서 지내도록 해. 호텔이나 다른 문제는 내 쪽에서 해결해줄게.”
“난항상 언니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네.”
“내목숨을 구해줬잖아. 그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하지. 약값은 얼마나 들었니?”
“처음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
“거짓말 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 합치면 1백만 라기르를 썼어.”
“정말? 엄청 많이 썼네.”
“언니를 위해서니까 아깝지 않아.”
“후훗, 넌 정말 착하고 대범한 사람이라니깐. 네가 쓴 돈은 언니가 다시 채워줄게.”
베로니카 언니는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사람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난 이 푸근한 미소를 보기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았던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