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4화
* * *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혼자서 외출했다.
항상 라우라나 이리스를 데리고 다녀서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느꼈던 해방감도 있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자하는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물론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자하는 마음은 그대로다.
그러나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이 2명으로 늘어났고 가면쟁이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이상,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는 있다는 생각은 오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는 보다 더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한다고 다짐했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적에게 약점을 잡힐 일은 없도록 해야지. 괜히 나 때문에 라우라와 이리스가 피해를 보는 건 질색이야.’
나는 헤어진 지 10분도 지나지 않은 라우라와 이리스의 얼굴이 벌써부터 그리워져서 뒤를 돌아 멀리 있는 호텔을 바라보았다.
이미 방을 떠났을 두 사람이 발코니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도 은근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오늘 굳이 혼자서 외출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베로니카 언니와 비밀리에 접선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리스를 위한 선물을 주문제작하기 위해서다.
나는 비밀접선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고 일단 칼스란 부부의 마법무기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레베카 씨.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내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칼스란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여전히 눈동자 너머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게 보였지만 도로테아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버티는 듯 했다.
“네, 약속만 아니었다면 라우라랑 이리스를 데리고 데이트라도 했을 거예요.”
“정말 중요한 약속인 모양이군요. 그럼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이리스에게 총기세트를 선물하고 싶은데 주문제작이 가능한지 궁금해서요.”
“물론 가능합니다.”
“실례지만 기사단에 납품되는 군용 마력총과 같은 수준으로 만드실 수 있나요?”
“기사님들이 쓰는 건 몰라도 일반병사들이 사용하는 마력총은 똑같은 수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죠.”
“그렇군요. 그럼 마력권총과 마력산탄총은 그렇게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마력소총은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가방에서 마력저격소총을 꺼내서 칼스란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칼스란 부부가 시중에 풀리지 않은 시제품도 B등급 품질을 가진 제품을 만들 수 있을 지 궁금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내 기대치를 충족시켰다.
“기존의 마력소총보다 총신이 길고 구경이 크군요. 전용마력탄을 써야하는 총기이고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하겠지만 문제없이 이것보다 더 좋은 품질로 만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열흘 안에는 모두 완성될 것 같습니다.”
“가격은요?”
“원래라면 주문제작은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레베카 씨에게는 빚을 지기도 했으니 특별히 재료값만 받고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돈을 많이 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횡재에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살아있다는 말을 전해줬을 뿐인데도 이렇게 대우를 해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제품이 다 완성되면 호텔로 연락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보다 오신 김에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는 게 어떤가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회중시계로 여유시간을 확인하고는 상점의 2층으로 올라가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았다.
차가 나오는 짧은 시간동안 거실을 쓱 둘러보니 가족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들이 보였다.
이 세상의 사진은 아직 흑백사진 밖에 없지만 대중적이라서 평민들의 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기 도로테아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어 독립하고 모험가가 된 도로테아의 모습이 각각의 액자마다 들어있었다.
칼스란 부부가 딸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했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그리고 도로테아를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잠시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칼스란이 나를 위해서 따뜻한 홍차를 내왔다.
원래 홍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라우라를 따라서 마시다보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고 이제는 맛있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 딸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는 사진을 어떻게 할 지 참 고민됐었는데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는 치우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고요.”
“저희들도 그런 작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레베카 씨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절망하고 있었을 테지요.”
“처음에 거짓말을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로테아의 부탁을 들어주셨을 뿐이니까요. 그 애는 조금 성급한 경향이 있어서 머리카락을 잘라서 주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칼스라는 딸의 결점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잘 생긴 얼굴로 그런 미소를 지으니 정말 대단한 위력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홀딱 반해버렸을 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칼스란과 사적인 대화를 좀 더 주고받다가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스란은 가게 밖까지 나와서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배웅해줬고 나도 얼떨결에 함께 고개를 숙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 할 일 중에서 하나를 끝내고 칼스란이 어떻게든 잘 버티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만약 칼스란이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더라면 주문제작을 맡기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지도 몰랐다.
‘특수상점 앞을 지나치는 길은 피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도록 하자.’
네가 특수상점을 피하는 이유는 거기로 라우라와 이리스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내 변태적인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저 제3자가 특수상점을 이용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원래는 다 같이 거기서 죽치고 앉아있어 보려고 했지만 마침 베로니카 언니를 비밀리에 만나야할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보낸 것뿐이다.
물론 라우라와 이리스가 특수상점에 간 김에 본인들이 알아서 뭔가를 사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어제도 실컷 즐겨놓고는 욕심도 많지.’
나는 이리스와 함께 침대에서 거사를 치렀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이리스는 그 이후로 음란도가 바로 10까지 올라가버렸는데, 아마도 섹스를 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팍팍 올라버린 것 같다.
호감도와 음란도가 이렇게까지 쉽게 올라버리니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질질 끄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어제는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이리스의 인연퀘스트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이리스의 인연퀘스트는 라우라의 경우처럼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퀘스트인 아버지와의 재회는 저번 일로 이미 달성된 상태였는데 보상은 이리스가 가지고 있는 장거리저격의 스킬레벨이 최고치인 10으로 오르는 것이다.
내가 미리 퀘스트를 알고 움직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득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다.
두 번째 퀘스트는 어머니의 시신을 되찾아서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음... 이리스가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 귀족나부랭이들에게 복수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아니네.
마음이 무거운 퀘스트지만 꼭 달성시켜야만 하는 내용의 퀘스트다.
다음 여행의 목적지는 이리스가 살던 도시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퀘스트는 라우라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고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건 예속퀘스트를 진행하면 자동으로 취소되는 퀘스트이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어차피 결혼은 퀘스트랑 상관없이 기회가 되면 할 생각이고.’
나는 다음으로 예속퀘스트로 내가 얻을 수 있는 특수스킬을 확인해보았는데 내 예상과 비슷하게 맹수추적스킬을 얻었다.
도시에서는 사실상 쓸 일이 없는 스킬이지만 관련 의뢰를 받으면 헤맬 필요 없이 바로 의뢰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스킬이다.
즉, 돈 버는데 탁월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를 잡는다면 가죽부터 시작해서 뼈와 고기, 장기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이 다 팔아먹을 수 있다.
예전 세상에서는 욕심 때문에 멸종위기종을 잡아 죽이는 밀렵꾼으로 취급받겠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저 사람을 죽이는 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모험가일 뿐이다.
그리고 드레이크나 와이번처럼 위험도가 극도로 높은 맹수를 미리 발견하고 피할 수 있으니 안전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특수스킬로 추적과 관련된 것만 얻고 있지만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또 노예를 구입한다면 마족이나 마물을 추적할 수 있는 특수스킬을 줄 수 있는 노예로 고를 것이다.
총이 있는 세상에서는 개인의 전투기량을 올려주는 것보다는 생존성과 추적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기술이 더 유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개인이 마법능력이나 검술로 싸워야하는 세상이라면 내가 선호하는 특수스킬의 종류가 분명 달랐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맹수의 기준이 뭘까? 지도창을 열어보면 알겠지?’
나는 지도창을 열었고 도시에서는 맹수를 찾을 수 없을 테니 지도 대신에 필터기능을 확인해보았다.
설명에 따르면 사람을 먹이로 삼는 육식동물과 사람에게 호전적이고 위협적인 대형초식동물이 맹수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호랑이 가죽에다 코끼리 상아도 팔아먹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겠어.
흐음, 이거 뭔가 영화에 나오는 뒤가 구린 암시장 상인 같은 대사인 걸.
‘돈이 걸린 일이 생기니 또 욕심이 막 생기는구나. 너무 많이 잡아서 씨를 말리지는 말고 적당히 솎아내기만 하자.’
나는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느새 도착해버린 약속장소인 구시가지의 허름한 술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갱단이 모조리 청소되었지만 덕분에 기를 펴기 시작한 동네 양아치들이 모두 여기로 모여든 것 같다.
놈들은 나를 보자마자 휘파람을 불거나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눈독을 들였지만 이런 경험은 이제 익숙해져서 그냥 무시해버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곧장 술잔을 닦고 있는 주인장에게로 향했다.
주인장은 내 눈동자를 힐끗 보더니 내가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2층, 제일 끝에 있는 방.”
나는 주인장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분명 베로니카 언니가 미리 조치를 취해둔 거겠지.
술집은 매춘업도 하는지 2층 복도는 다양한 커플들이 섹스를 하는 소리가 뒤섞여서 혼란스러웠다.
방음에 신경을 좀 쓰면 덧나나? 내가 할 때는 몰라도 남들이 내는 소리는 별로다.
나는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며 맨 끝에 있는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 사람 놀라게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와.”
베로니카 언니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일단 내 손을 붙잡고 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 뒤에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는 창문을 두꺼운 커튼으로 가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해주려고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걸까?
“레베카, 이런 곳을 약속장소로 잡아서 미안해.”
“아니야.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가 널 몰래 만나는 이유는 네 신변이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야.”
베로니카 언니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아주 무서운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내 신변이 위험해지다니? 역시 가면쟁이들인가?
그게 아니라면 심술 많은 권력가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인데?”
“고위관리들이 널 적과 내통하는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어. 네가 가는 곳마다 특이한 일이 벌어지는 걸 단순한 우연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내가 저번에 예상했던 대로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이 날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영주에게 상도 받은 사람에게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 오히려 그래서 눈 밖에 나버린 걸지도 모르겠어.
“정말 걱정도 많은 사람들이네.”
“그래서 나도 널 열심히 변호했지만 그 대가로 한 달 동안 근신할 것을 명령받았어. 그나마 단장님께서 절반을 까줘서 다행이지.”
“언니, 괜히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그게 아니라 내가 널 너무 많이 끌어들인 탓이라고 생각해. 내가 널 작전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위험하게 만들었어.”
베로니카 언니는 스스로를 탓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아니, 언니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건 그 높으신 놈들이라고.
난 언니가 나 때문에 죄책감마저 느끼는 게 너무 싫었다.
“언니 탓이 아니야. 전부 내가 원해서 참가했던 거라고.”
“하지만 널 위험하지 않은 사람으로 설득하는 일에는 실패했어. 그건 분명 내 잘못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분간 프랑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도록 해. 내가 신분세탁을 해주고 경비를 지원해 줄 테니 걱정 마.”
씨발, 결국은 도망쳐야하는 거구나.
방금 주문제작을 하고 왔는데 미안하지만 바로 취소해야겠는 걸.
“언니, 도와줘서 고맙기는 한데 왜 이렇게까지 내 편을 들어주는 거야? 우리가 분명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도와주는 것 같아서 그래.”
내 질문에 베로니카 언니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제발 나를 사랑해서 그렇다는 말은 하질 않았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네가 10년 전에 죽은 내 사관학교 동기랑 너무 닮아서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너에게 편의를 봐주려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도와주려는 거야.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아줘.”
대체 사관학교 동기랑 대체 무슨 사이였기에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혹시 사귀는 사이였거나 짝사랑하는 상대였을까?
나는 진실을 보다 깊이 파보고 싶었지만 곧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총알세례와 나를 바닥으로 밀치는 베로니카 언니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