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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51화 (51/271)

〈 51화 〉 50화

* * *

우리는 굳이 전망대 위로 올라가서 화력지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기사단은 마력포로 적의 성벽을 파괴하고 중량 마법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돌격시켜 적들을 쓸어버리는 간단한 전술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엘쿠단의 죽음은 곧 적들의 지휘부재로 이어졌고, 공성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항복하는 적들은 아무도 없어서 그야말로 몰살을 당했고 사로잡힌 적들도 입에 숨겨둔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결국 기사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붙잡혔던 무고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의 시신은 훼손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베로니카 언니는 전혀 기뻐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언니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워할 기운은 있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그녀에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달려갈 수는 없었다.

“부단장님, 복귀를 신고합니다.”

“그래. 참으로 고생 많았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자세한 이야기는 내 천막으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세.”

베로니카 언니는 우리를 데리고 본인의 천막으로 향했다.

요새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는 천막에 들어가자마자 답답한 투구를 벗었고 베로니카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레베카, 지하 감옥에서 무엇을 봤니?”

“적들은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이 유충의 알을 먹여서 사람을 마족과의 혼종으로 만드는 생체실험을 벌였어.”

나는 가방에서 유충이 들어있는 유리통 하나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베로니카 언니는 아예 유리통을 열어서 직접 유충을 꺼내서 관찰했다.

난 아무리 그래도 만져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성공사례는?”

“내가 알기론 딱 한 건이야. 머리와 몸은 그대로인데 팔다리가 맹금족처럼 변해있었어. 그리고 맹금족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놈들의 알도 낳을 수 있더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술력을 갖추었다니 보통 일이 아니네. 그래서 넌 그 혼종을 어떻게 처리했니?”

“자유롭게 풀어줬어.”

“어째서?”

“그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했으니까.”

나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아주 크게 혼날 각오를 하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족에 오염된 자는 모두 죽여주는 게 도리이니 말이다.

그래도 난 도로테아를 풀어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부단장으로서는 너한테 징계를 내려야겠지만 친구로서 말하자면 아주 잘했어! 상대가 인간이든 아니든 죄 없는 자를 죽이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지.”

“언니, 진심이야?”

“기사는 약자를 지키는 존재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무조건 죽이는 존재가 아니야. 만약 마족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들을 죽일 이유도 없어. 서로 생긴 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건 인류연합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의 야만의 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아무래도 내가 기사단에 대해서 오해를 했던 모양이야.”

“그럴 수도 있지. 네가 고향에서 처음 본 기사의 모습은 마족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또 보고할 건 없니?”

난 베로니카 언니의 질문에 일단 이리스와 눈을 마주치고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리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허락을 받은 나는 가방에서 하얀 가면과 도미닉의 마력소총 그리고 그의 시신이 들어있는 상자를 차례대로 꺼내서 베로니카 언니에게 보여주었다.

“이것들은 뭐니?”

“엘쿠단이 썼던 장비와 그의 시신이야. 그 가면쟁이들을 연구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가져왔어. 그리고 이 쪽지에 가면쟁이의 약점을 적어뒀어.”

“가면쟁이? 아! 엘카힘이 언급했던 조직을 말하는 거구나. 난 또 뭐라고. 어쨌든 이건 기사단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영주님께도 직접 보여드려야할 것 같아.”

“설마 내가 직접 영주님을 뵐 필요는 없겠지?”

“음... 지금 상황에선 뭐라고 확답을 줄 수 없어.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님을 뵙는 걸 넘어서서 아예 수도로 가야할 지도 몰라.”

“마침 수도에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 그런데 언니는 가면쟁이들이 뭐하는 조직인지 알고 있어?”

“아니. 그저 제국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불온한 단체가 있다고 추측할 뿐이야. 다만, 황제폐하 직속의 제국정보부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제국정보부라? 왠지 잘못 걸리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말에 얼마나 무서운 뜻이 담겨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부서다.

수도로 가야할 지도 모른다는 말이 그들과 만나게 될 거라는 말로 들려서 소름이 돋는다.

“일단 네가 가져온 증거들은 모두 우리 기사단에서 보관하도록 할게. 혹시 이것들 말고 더 가져온 것은 있니?”

“유충이 담긴 통을 있는 대로 다 가져오긴 했어. 대충 30개가 조금 넘어.”

“그래? 그건 여기에 두지 말고 바깥에 있는 수레에 실어줄래?”

“알았어.”

나는 천막 바로 옆에 있는 수레로 가서 가방에 있는 유리통을 모조리 꺼내서 실었다.

가방에서 찝찝한 물건들을 모조리 털어냈다는 생각에 속이 다 후련했지만 수레를 담당하는 병사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미안하지만 벌레들 좀 잘 보살펴주고 있어요.’

이제 증거를 모두 넘기고 해야 할 보고도 다 끝냈으니 그냥 호텔로 돌아가도 되겠지?

나는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베로니카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지금 바로 체험입단을 끝내고 싶은데 가능할까?”

“물론이지. 마법갑옷은 내 천막 맞은편에 있는 탈의실에다가 벗어놓도록 해.”

“이리스에게 빌려준 총은?”

“그건 안 돌려줘도 돼.”

“치장물자였다면서 그걸 그냥 준다고?”

“전투 중에 무기를 잃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에 해당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응. 알았어.”

베로니카 언니는 은근히 편법을 많이 쓰는 사람 같다.

원래 프랑카 기사단의 분위기가 이런 것인지 언니다 좀 특이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옆에 딸려있는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베로니카 언니의 천막으로 돌아와서 서로 작별인사를 했다.

“베로니카 언니, 이번엔 도와줘서 고마웠어.”

“고맙기는. 오히려 너희들을 더 힘들 게 만들어 버렸는걸.”

“아니야. 그래도 나름 성과도 있었어.”

“그럼 다행이고.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우리 저택에 초대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이리스, 네 아버지는 분명 죄인이지만 그 일로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항상 당당하게 살아라.”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유품과 시신을 기사단에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유품 정도는 가져도 될 텐데 말이다.”

“아니요.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싶습니다.”

“그래. 네가 후회할 일이 없도록 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마.”

베로니카 언니는 이리스의 양 어깨를 잡으며 실로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이리스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라우라, 너도 수고 많았다. 네 덕분에 레베카가 무난하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들었어.”

“전 그저 레베카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참으로 기사다운 대답이구나. 넌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너 같은 사람이 기사단에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베로니카 언니는 라우라를 보여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라우라를 기사단에 입단시키고 싶은 속셈이겠지.

미안하지만 라우라는 내 여자라서 절대로 빌려줄 수 없다.

“레베카, 가는 길은 우리가 올라오면서 싹 정리했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해. 아, 그렇지. 호위를 붙여줄까?”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권력을 사적으로 쓰면 안 된다고.”

“어머, 내 부관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후훗,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

베로니카 언니는 날 꼭 안아주더니 기습적으로 내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언니도 참 사람을 설레게 하는 데는 선수라니깐.

아, 아니야. 정신 차리자. 라우라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우릴 노려보고 있다고.

난 라우라에게 책잡히기 전에 서둘러 베로니카 언니의 천막에서 나와서 빠른 걸음으로 기사단의 숙영지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예전에 승급의뢰를 수행할 때 사용했던 익숙한 길을 따라서 산을 내려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새하얀 눈밭을 걸으니 괜히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래도 도중에 적당한 곳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셋이서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음료를 나눠먹으며 휴식을 취하니 여유가 생겼다.

“이리스, 넌 괜찮니? 힘들면 우리한테 솔직하게 말해.”

“아빠가 죽은 건 슬프지만 차라리 예전보다 속이 더 후련해진 기분도 들어요.”

“후련하다고?”

“네, 엄마가 왜 저를 위해서 희생하셨는지 확실하게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아빠에 대한 미련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고요.”

“너 지금 멀쩡한 척 하는 거 아니지?”

“그럼요. 노예는 주인님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넌 정말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구나.”

“아빠한테 그런 사람이 되도록 배웠으니까요. 어쩌면 아빠는 미래를 내다보고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봤자 무고한 사람들을 실컷 죽여 놓고는 자기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살해버린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지만요.”

이리스는 본인의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난 이게 이리스가 슬픔을 이겨내려고 선택한 방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없이 내 어깨에 기댄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행히 이리스는 울지 않았고 그저 내게 의지할 뿐이었다.

“레베카님, 호텔로 돌아가면 라우라부터 챙겨주세요.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이번 기회에 너도 같이 즐기는 게 어떠니?”

“저는 아직 레베카님이랑 둘이서만 섹스하고 싶어요.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알았어.”

나는 귀여운 이리스에게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막 비어있는 내 옆에 앉는 라우라에게도 짧게 키스했다.

라우라는 그것만으로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아예 양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서 진하게 키스를 해왔다.

그 와중에 이리스는 날 뒤에서 끌어안고서 내 귀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나는 체온이 후끈 달아올랐고 몸 곳곳이 민감해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세게 자극 받으면 가볍게 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사랑들은 아슬아슬한 선에서 딱 멈춰버렸다.

나는 내 입에서 라우라의 입으로 이어지는 투명한 끈을 보며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지만 라우라는 그대로 내게서 멀어졌다.

“레베카님, 이제 그만 쉬고 마저 산을 내려가도록 해요. 해가 지기 전에 칼스란 씨에게 가야하잖아요.”

“맞아요. 분명 우리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라우라와 이리스는 치사하게도 내가 뭐라고 반발하기도 전에 나를 반강제로 끌고서 산을 내려왔다.

주종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이 자꾸만 벌어지는 건 분명 문제지만 둘이 하는 게 귀여워서 그냥 봐주기로 했다.

우리는 산을 다 내려와서 마침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 마차를 타고서 프랑카로 돌아갔다.

프랑카에는 이미 기사단의 승리 소식이 쫙 퍼져서 다들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은 것을 봐서는 아직 죽은 모험가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일은 정보통제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비난여론이 생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뭐, 그건 기사단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기사단이 처할 현실이 아니라 칼스란과 미나테린에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다.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도로테아의 새 출발을 위해서는 그녀가 죽었다고 알리는 게 최선이다.

정작 생각은 이렇게 해도 막상 자식을 잃었다며 절망하는 부모 앞에 서면 진실을 토해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마법무기점 앞에 도착했을 때는 거리에 적막함이 맴돌았다.

마법무기점은 맞은편의 식당과 마찬가지로 휴업 팻말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점의 문을 두드리며 칼스란을 불러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췌한 모습의 칼스란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 레베카 씨.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보자마자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로 불쌍한 분위기의 칼스란은 그 와중에도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던 미나테린도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대장간에 널브러진 무의미한 형태의 금속들을 보니 속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저희 딸은 찾으셨나요?”

칼스란과 미나테린은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고 나는 목이 메고 울컥하는 기분에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도로테아와 약속을 했으니 용기를 내서 그녀가 전해주길 원했던 말을 꺼냈다.

“따님은 돌아가셨어요. 유감스럽지만 시신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서 가져왔어요.”

나는 도로테아의 머리카락을 칼스란 부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뜨겁고 굵은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받아갔다.

한 올이라도 흘릴까 싶어 굉장히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칼스란은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오열했고 미나테린은 그런 남편을 포옹해주었다.

“저희 딸이 머리카락을 당신에게 줬군요. 죽은 걸로 해달라고.”

“미나테린 씨, 대체 그걸 어떻게...”

“예전에 딸이 처음 모험가가 되었을 때, 저희들에게 부탁한 게 있어요.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내면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했으니 가슴에 묻어 달라고 말이죠. 남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화를 냈었지만 저는 모험가는 위험한 일이니 알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막상 머리카락을 받으니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군요.”

미나테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딸이 선택한 길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걸 본 난 결국 도로테아의 상황에 대해서 조금은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님은 더 이상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몸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어요.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당신이 저희들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머리카락을 저희들에게 전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라테린은 내게 허리마저 숙였고 칼스란도 뒤를 이어서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레베카님, 울지 마세요.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잖아요.”

“라우라의 말이 맞아요. 도로테아 씨가 살아있다는 걸 전해드렸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그러니 기운내세요.”

라우라와 이리스는 차례대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두 사람을 끌어안고 바보처럼 엉엉 울었다.

도로테아는 죽지 않았고 칼스란과 미나테린에게도 딸의 생존을 전달해줬는데도 왜 이렇게 슬픈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가면쟁이들 때문이다. 반드시 복수할 거다!

나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고 그대로 칼스란 부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칼스란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시간도 늦었으니 저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가시지요.”

“네? 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힘드실 텐데...”

“이제 울만큼 다 울었으니 더 이상 울지 않을 겁니다. 저희 딸도 그걸 원치 않을 테고요. 그리고 목숨을 걸고 저희들을 위해서 애써주셨으니 꼭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칼스란 씨.”

“그럼 이리스, 레베카 씨와 네 친구를 식당으로 안내해주겠니?”

“네, 칼스란 아저씨.”

나는 어쩔 수 없이 식사요청을 받아들였고 라우라와 함께 이리스의 손에 이끌려 상점의 2층으로 올라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는 식탁 앞에 앉았다.

칼스란 부부가 함께 만들어낸 요리는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으나 딸을 가슴에 묻게 된 부모님의 눈물 젖은 요리라서 마냥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칼스란 부부의 정성을 생각해서 최대한 맛있게 먹었고 결국엔 접시를 싹 비워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달걀요리는 도저히 못 먹겠어서 그쪽으론 쳐다보지도 않았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커피와 차를 마시면서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곧 밤이 깊어져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레베카님. 오늘은 제가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요?”

“알았어. 내일 데리러올 테니까 두 분께 잘해드리도록 해.”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이리스는 내 볼에 뽀뽀를 하면서 기뻐했다.

나는 딸을 잃은 부부와 부모님을 잃은 이리스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바라며 라우라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건물의 불도 거의 다 꺼졌다.

약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길 때, 갑자기 라우라가 내 귓가에다가 유혹적인 목소리를 냈다.

“레베카님, 오늘 돌아가면 서비스를 해드린다고 했었죠? 기대해도 좋아요. 후후후.”

라우라는 나를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뭐야? 분위기가 좀 세한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안광이 날 먹이로 보는 듯 했다.

나는 서둘러 라우라의 성욕을 확인했고 그것이 최고치인 100에 도달한 것을 깨달았다.

아뿔싸! 이거 얼른 대책을 세워야할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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