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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50화 (50/271)

〈 50화 〉 49화

* * *

나는. 아니, 우리는 갑작스러운 도로테아와 마르코의 죽음에 크게 동요했다.

처음부터 그들을 동정했던 이리스와 차마 모진 마음을 품지 못하고 그들을 살려준 나는 물론이고 끝까지 그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라우라까지 분노의 감정을 품었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는 도로테아와 마르코를 쏴죽이고 태연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금빛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하얀색 가면을 쓴 키가 큰 남자, 엘쿠단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엘쿠단에게 마력소총을 조준했지만 엘쿠단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엘카힘의 사례처럼 우리의 총은 그에게 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족을 죽였을 뿐인데 왜들 그렇게 흥분하는 거냐?”

“닥쳐! 도로테아는 원래 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래, 한 때는 사람이었던 괴물을 세상에서 제거했지. 마족에게 오염된 자를 죽이는 건 예의라는 사실을 모험가인 너라면 아주 잘 알 텐데 이토록 화를 내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 하아, 애초에 검은 가면 놈들이 선을 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엘쿠단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래, 도로테아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인류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혼종을 멋대로 풀어준 건 사실이니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

하지만 분명 도로테아와 마르코는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둘이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칼스란과 미나테린의 딸은 괴물로 변했어도 다른 괴물 덕분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그런 도로테아를 멋대로 쏴죽이고 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엘쿠단이 증오스럽다.

“마족을 도와서 사람을 죽인 주제에 그런 말을 해? 버러지만도 못한 개새끼야!”

난 엘쿠단에게 마력소총을 쏴버렸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약실에 들어있는 6발의 마력소총탄을 모조리 퍼붓고 장전해서 또 쏴버렸다.

하지만 내가 쏜 마력소총탄은 전부 무형의 방어막에 가로막혀서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카힘을 만났을 때 딱히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군. 이런 어리숙한 자를 우리 조직으로 끌어들이려는 그 분의 본심이 무엇인지 참 궁금하단 말이지.”

엘쿠단은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마력소총탄을 차내면서 여유를 부렸다.

씨발, 저 개새끼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어쩌면 엘카힘처럼 목을 베어내면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너희들처럼 미친 새끼들만 모여 있는 조직에 들어갈 생각 없어. 사람의 목숨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쓰레기들과는 결코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오호라, 여기서 정의감을 드러낼 줄이야. 우리 조직에도 너처럼 생각하던 녀석들이 몇 명 있는데 지금은 다들 만족하고 살아. 그러니 너도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있어라.”

엘쿠단은 내가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마력권총을 꺼내서 내게 제압탄 6발을 한순간에 쏟아 부었다.

결국 난 온 몸이 돌덩이에 갇힌 채로 뒤로 넘어졌고 라우라가 어떻게든 날 꺼내주기 위해서 돌을 부수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엘쿠단이 사용하는 제압탄의 성능은 경량 마법갑옷의 힘으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수준으로 뛰어났다.

“소용없다. 너희 모험가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성능이 좋은 특수탄이니까.”

엘쿠단은 라우라의 노력을 비웃더니 우리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이리스에게로 다가갔다.

“딸아, 네 새 주인은 아직도 10대처럼 생각하고 사는 순수한 사람이구나.”

엘쿠단은 이리스에게 딸이라고 지칭하면서 나를 우롱했다.

나는 화가 나면서도 이리스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할지가 더 걱정이었다.

그녀가 다짜고짜 아빠가 살아있다며 우리를 배신하고 그의 편을 들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혼란에 빠진다면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이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아빠, 정말 아빠 맞지? 대체 어떻게 살아있어?”

“우리 조직원은 위대하신 분의 가호 덕분에 목이 잘리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단다. 몸속에 있는 인조마핵을 파괴해야 죽지.”

엘쿠단은 자신의 명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약점을 상세히도 가르쳐주었다.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가르쳐주는 건지 모르겠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엘쿠단을 제압하려면 마핵을 노려야할 것 같다.

나는 라우라와 시선을 교환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도를 받아들였다.

라우라는 언제든지 검을 뽑아서 달려들 준비를 갖춘 채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그땐 그냥 죽은 척을 했던 거야?”

“그래, 아무리 나라도 여럿이서 힘으로 제압하면 힘을 쓸 수 없으니 일단 잡혀서 죽어주는 시늉을 했었지.”

엘쿠단은 다시 한 번 본인의 약점을 노출했다.

이쯤 되면 공략법을 알려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빠르고 정확한 사격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라우라가 완벽한 기회를 노려야할 것이다.

“그럼 왜 엄마랑 나를 구해주지 않았어? 엄마는 나 때문에 죽었단 말이야! 아빠가 우리를 구해주러 왔으면 엄마는 안 죽었을 거야!”

이리스는 엘쿠단을 상대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본인은 물론이고 엘쿠단에게도 돌렸다.

그러자 엘쿠단은 즉시 이리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네 엄마가 모든 것을 망쳤다! 너에게 저주를 거는 바람에 내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단 말이다!”

“아빠! 엄마가 뭘 잘못했는데? 엄마는 날 살리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 여자는 널 우리 조직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너에게 저주를 걸었다. 내가 너의 안전과 출셋길을 보장해도 어설프게 네게 자유를 준답시고 그런 짓을 저질렀지. 네가 마안을 쓰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넌 조직에 들어올 자격을 잃었고 저런 무가치한 인간의 노예가 된 거다. 자유는커녕 모든 선택권을 뺏어버린 게 네 엄마라는 인간이다.”

엘쿠단은 이리스의 엄마가 딸에게 저주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정황에 대해서 빠르게 늘어놓았다.

이리스의 엄마는 욕심 많은 귀족이 아니라 미친 가면쟁이들의 조직에 딸을 넘기지 않으려고 본인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러나 엘쿠단은 자신의 아내이자 딸의 엄마인 사람의 희생을 폄하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나까지 모욕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쩜 저리도 딸에게 쓰레기처럼 구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리스에게 가차 없이 본인을 공격하게 만들려는 수법인 걸까?

아까부터 엘쿠단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절대로 철두철미한 사람이 보일법한 태도가 아니다.

후퇴하던 모험가들을 냉혹하게 사냥한 사람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다.

“레베카님은 무가치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난 레베카님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저주를 풀었어. 그리고 엄마를 욕하지도 마!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면서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데?”

이리스는 거의 울부짖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주고 어머니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난 지금 당장 엘쿠단을 죽일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그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은 뛰어난 마안사용자를 조직원으로 들이기 위해서였다. 사랑 같은 허상 때문이 아니었단 말이다. 하지만 내 피가 흐르는 넌 다르다. 평생을 조직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게 바로 아버지로서의 정이라는 것이겠지.”

“거짓말하지 마! 아내를 사랑한 적 없다던 사람이 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겠어? 아빠는 그저 날 그 나쁜 조직으로 잡아가려는 생각밖에 없잖아.”

“그랬다면 벌써 네 주인과 친구를 죽이고 널 포박했겠지. 난 널 사랑하기에 폭력이 아니라 말로 널 설득하고 싶었어. 사랑하는 내 딸 이리스, 이제 그만 아빠랑 같이 가자. 예전처럼 함께 숲을 탐험하고 사냥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꾸나.”

엘쿠단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리스를 설득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리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엘쿠단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난 순간적으로 엄청 놀랐지만 엘쿠단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손가락으로 뭔가 신호 같은 것을 보냈다.

그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라우라를 향한 것이었다.

“아빠, 내가 같이 가면 레베카님이랑 라우라는 살려주는 거 맞지?”

“그래. 조직으로 돌아가면 저 두 사람은 건드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도록 해주마.”

“고마워. 레베카님, 라우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이리스는 투구를 벗어서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리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리스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레베카, 넌 이제 자유의 몸이다.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해라.”

엘쿠단이 손짓을 하자 나를 붙잡고 있던 돌덩어리들이 모래로 변해서 무너졌다.

올바른 선택이라니? 가만히 있으라고? 아니면 널 죽이라고?

도무지 의도가 뭔지 모를 놈이다.

하지만 이리스의 눈빛을 생각해보면 이대로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레베카님, 괜찮으세요?”

“응. 그냥 못 움직이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리스는 우릴 배신했고 적은 대놓고 약점을 가르쳐줬어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상대야. 보내주자.”

“알겠습니다.”

라우라는 내 명령에 복종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연기에 불과하다.

이리스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고, 라우라에게 어떤 신호를 보냈다.

비록 내가 모르는 신호지만 분명 나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리스가 보낼 다음 신호를 기다리며 그녀의 불안한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빠, 정말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래. 그때도 지금도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구나.”

“어째서 그렇게 냉정하실 수 있나요?”

이리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엘쿠단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픈 목소리로 딸에게 자신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그 분께 개조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3백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애정을 너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 여전히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내 혈육에 대한 부성애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

“지금까지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네가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줘서 고맙구나. 레베카는 어떤 사람이니?”

엘쿠단의 질문에 이리스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제 평생을 믿고 맡겨도 될 만큼 좋은 분이세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구나?”

“사랑에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하하하! 네 엄마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 구나.”

엘쿠단은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더니 이리스를 꼭 포옹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해요, 아빠.”

귓속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이리스는 갑자기 엘쿠단이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여기서 그의 갈비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자 라우라가 단검을 뽑아들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뒤에서 엘쿠단의 명치 쪽을 향해 정확하게 찔렀다.

“이리스...”

엘쿠단은 가면 너머에서 피를 잔뜩 토해내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리스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라우라는 다시 한 번 단검으로 찔러서 마핵을 파괴했다.

결국 엘쿠단은 힘없이 축 늘어졌고 이리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피로 물든 눈밭에 눕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엘쿠단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지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혈색이 좋지 않았고 실시간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게 이런 일을 부탁해서.”

“아빠, 정말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던 거야?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리스는 가엽게도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가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질 않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어. 자살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타살당할 필요가 있었지. 그리고 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다. 날 위해서 울지 말아주렴.”

“애초에 우리에게 약점을 알려준 이유가 죽기 위해서였나요?”

나는 엘쿠단에게 진실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미약하게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네게 수많은 조직원들이 찾아갈 것이다. 나처럼 하얀 가면은 전투원이고 검은 가면은 연구원이다. 내가 마취탄을 쏜 혼종도 놈들이 만든 것이지.”

“마취탄? 그럼 도로테아는...”

“마침 눈이 많이 내린 곳으로 떨어졌으니 별로 다치지는 않았을 거다. 마족의 재생능력이라면 사흘만 쉬면 다 낫겠지. 아무튼 그들은 죽지 않았다.”

“결국 당신은 죽기 위해서 우리를 도발했군요.”

“네 말이 맞다. 끝까지 비겁한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셈이지. 아무튼 우리 조직원들이 사용하는 마법방어막의 약점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넌 엘카힘이나 나의 시선이 뻔히 닿는 곳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던 거야.”

“그렇다면 뒤에서 기습하거나 저격을 한다면 죽일 수 있겠군요.”

내가 이리스를 보면서 하는 말에 엘쿠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라우라가 엘카힘을 제압해서 목을 베어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또한 조직이 이리스의 마안을 원했던 이유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에게 위험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 직속 암살단을 육성해야 가면쟁이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지 싶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지만 그 분께서 내게 준 가호를 다시 거두어가려고 하는 구나. 이리스, 가면을 벗겨주겠니?”

이리스는 엘쿠단, 아니 도미닉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결코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가면이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미닉의 얼굴에서 분리되었고 정체되었던 3백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맞이한 그의 얼굴은 거의 미라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태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용했다.

“이리스, 네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 가족이 함께하던 순간이었다. 비록 조직의 명령에 따라 의도를 가지고 만든 가족이었지만 나는 항상 네 엄마와 너를 사랑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서로 너무 사랑했었으니까요.”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괜히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버렸어. 미안하다.”

도미닉은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이리스의 볼을 쓰다듬으며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그저 저런 이기적인 아버지를 둔 이리스가 불쌍할 뿐이었다.

“레베카, 염치없지만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장인어른. 그러니 지옥에서 벌을 달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 반드시 그래야지. 이리스, 저 사람과 함께 행복하렴.”

도미닉은 마지막으로 이리스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숨이 끊어졌다.

그는 본인 같은 가면쟁이들이 마핵이 부서져도 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죽었다.

이리스는 아버지의 죽음에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오열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도 도미닉이 저지른 죄를 잘 알기에 최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일을 자제하는 것 같다.

나는 이리스를 달려주려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는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미닉의 마력소총을 손에 들었다.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이에요. 본대를 돕고 나서 슬퍼해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누가 아빠의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해야겠어요. 부단장님께 보여드려서 조직원들의 약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게끔 도와주고 싶어요.”

“이리스...”

“레베카님, 지금은 절 동정하지 말아주세요. 나중에, 나중에 호텔로 돌아가서 귀여워해주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알았어. 시신은 내가 수습할 테니 너랑 라우라는 전망대 위로 올라가서 본대를 지원하도록 해.”

“네, 레베카님! 가자, 라우라.”

“으, 응.”

이리스는 자신을 향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우라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전망대 안으로 이끌었다.

라우라가 결국 참다못하고 눈물을 보이자 이리스가 도리어 울지 말라고 말하며 강한 모습을 보였다.

난 그런 이리스의 강한 척이 너무나도 처량해보였다.

“일단 시신부터 수습하자. 저번에 온갖 크기의 상자를 다 사서 다행이네.”

난 도미닉의 시신을 웅크린 자세로 만들어서 적당한 크기의 상자에 집어넣고 그것을 다시 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뛰어난 사냥꾼이라는 도미닉이 사실상의 자살을 택한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고 간단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지만 단기간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을 이리스가 걱정이다.

과연 호텔로 돌아가서 귀여워해주는 것만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난 무리라고 본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서 사랑을 준다면 몰라도.

나는 울적한 기분을 느끼며 전망대로 올라갔다.

모험가들을 학살한 살인마를 죽이고 엘카힘을 죽일 방법도 알아냈지만 이리스의 아픔을 생각하면 별로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도로테아와 마르코가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좋기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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