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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48화 (48/271)

〈 48화 〉 47화

* * *

우리가 잠깐 휴식시간을 갖는 동안, 나는 가방에서 유리통을 꺼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유충을 관찰했다.

유충의 몸길이는 유리통과 비슷한 1미터 정도이고 생김새는 굼벵이의 몸통에 육식곤충의 머리를 붙여놓은 것처럼 생겼다.

날카로운 주둥이를 보고 있으니 왜 감옥의 시체들이 그 지경으로 망가졌는지 알 것 같다.

내부에서 폭발한 것 같다는 라우라의 말을 생각해보면 이 유충 혹은 알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다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한 뒤에 사람의 몸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기생생물을 몇 가지 설정했었지만 이렇게까지 큰 놈을 만든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만든 것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크기를 키웠을 지도 모르겠다.

난 내 머릿속 세계관 사전을 뒤지면서 유충의 원본이 뭔지 찾아봤지만 명확한 해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마물 혹은 악마기생충과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는 생물인 것이다.

무조건 내가 설정한 생물만 이 세상에 존재하라는 법은 없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 모르는 생물, 그것도 끔찍한 것들만 자꾸 튀어나오니 불쾌하다.

나는 짜증을 느끼며 가방에 유리통을 다시 집어넣었다.

가방에는 총 34개의 유리통이 들어있었지만 무게고정 기능 덕분에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이 가방이 없었더라면 꽤나 번거로운 일이 많았을 것이다.

온갖 짐을 일일이 등에 메고 다녀야하고 그마저도 다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우선순위에 따라서 냉정한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많아진 시점에선 하렘이고 뭐고 일단 짐꾼으로 쓸 노예를 몇 명 구입했겠지.

가방과 동전주머니는 진짜 목숨처럼 소중한 자산이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간수를 잘해야겠다.

“레베카님, 이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반대쪽 어깨를 차지하고 있던 이리스도 덩달아 일어났다.

이거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할 분위기인 걸.

“그러자. 생존자를 구출하지 못했으니 다른 임무라도 제대로 수행해야겠지.”

“레베카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라우라는 생존자에 대해서 언급하는 나를 보더니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그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일로 엄청 자책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모양이다.

물론 책임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라우라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빨리 도착했더라도 몸속에서 유충이 튀어나와 죽는 결말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토벌대에 참가했었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을 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내 목숨이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걱정 마.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도 이번 일을 너무 가슴에 담아두지 않도록 해.”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강한 척을 했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그걸 알아차렸는지 둘이서 앞뒤로 나를 포옹해주었다.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차례대로 고마움을 담은 키스를 해주었다.

“그럼 가볼까?”

우리는 투구를 썼고, 늘 그랬듯이 라우라가 앞장서고 내가 중간, 이리스가 뒤를 지켰다.

목적지인 전망대까지는 역시나 길이 없었지만 마법갑옷의 힘을 빌어서 어렵지 않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리기는 했지만 한 번씩 울리고 끝이라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제법 먼 거리를 가는 동안 서로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최대한 조용히 움직일 필요가 있어서다.

고요한 눈 덮인 산에서는 평범하게 말해도 크게 울려 퍼져서 적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를 즐기는 것으로 심심함을 달랬다.

이윽고 요새와 같은 높이까지 올라온 우리는 일단 큰 바위더미 뒤로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지도창부터 열고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1백 미터 거리에 있는 요새의 성벽에 보초가 몇 명 서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안심하고 지도창을 닫자마자 이리스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맹금족이 한 마리도 없는 게 좀 이상해요.”

“하나도 없다고?”

“네, 제가 마안으로 성벽을 확인했는데 사람들 밖에 보이질 않았어요.”

“이상하네. 분명 저번에 토벌대가 당했을 때는 맹금족에게도 공격을 받았다고 했었잖아.”

“분명히 그랬었죠. 혹시 내분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다 죽인 게 아닐까요?”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

나는 맹금족이 없다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싸우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거기다 맹금족까지 끼어들면 정말 피곤할 것 같다.

한편, 라우라는 망원경으로 전망대 쪽을 살펴보는 중이다.

전망대는 요새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로 끝자락의 작은 봉우리 위에 있어서 여기서 조금만 고개를 내밀어도 충분히 관찰이 가능하다.

찬찬히 전망대 주변을 살펴본 라우라는 내게 상황을 보고했다.

“레베카님, 맹금족들이 전망대에 몰려있어요. 대부분 부상을 입었고요.”

“몇 마리나 있는데?”

“30마리 정도가 있어요. 성체가 12마리이고 나머지는 다 새끼에요.”

“우리가 정찰을 했을 때랑은 상황이 달라 보이네. 그땐 성체만 그 정도로 많았었잖아.”

“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상황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이리스의 말처럼 내분이 일어나서 전망대로 다 쫓겨났거나 아예 포로로 잡힌 게 아닐까요?”

“마족을 포로로 잡는 인간이라니 뭔가 말이 어색하네. 하지만 애초에 마족과 거래를 했던 놈들이니 그런 짓을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겠지.”

“맞아요. 어쩌면 맹금족이 사기를 당했을 지도 모르고요.”

나는 인간에게 사기를 당한 마족이라는 말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리를 크게 낼 수 없으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렸다.

“맨날 인간을 이용해먹던 놈들이 역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웃긴다. 그런데 여기서 대놓고 전망대로 가면 바로 들킬 것 같지 않아?”

“네, 확실하게 발각되겠죠. 그러니 봉우리 뒤쪽에 있는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할 것 같아요. 다행히 오늘은 바람이 잠잠하네요.”

“마법갑옷을 입었으니까 나랑 이리스도 올라갈 수 있겠지?”

“혹시 모르니 제가 먼저 올라가서 밧줄을 내리도록 할게요.”

“알았어. 부탁할게.”

“네, 레베카님. 맡겨만 주세요.”

우리는 허리를 숙인 채 라우라를 따라서 요새에서 볼 수 없는 봉우리 뒤쪽으로 향했다.

나는 가방에서 굵고 튼튼한 밧줄을 꺼내서 라우라에게 넘겼고 그녀는 그걸 어깨에 메고 눈이 얼어붙어있는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원래 암벽등반에 능한 라우라가 경량 마법갑옷을 입으니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었다.

도중에 살짝 아슬아슬해 보이는 상황도 발생했지만 라우라는 능숙한 임기응변으로 즉시 문제를 해결하고 쭉쭉 올라갔다.

순식간에 평평한 위쪽에 도달한 라우라는 우리에게 밧줄을 내려주었다.

“팔 힘이 부족할 일은 없으니까 침착하게 밧줄을 잡고 올라오시면 돼요.”

“알았어. 걱정 말고 기다려.”

나는 밧줄을 잡고서 가파른 암벽을 조심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법갑옷 덕에 전혀 힘들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발이 미끄러져서 그냥 팔만 이용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도중에 무심코 밑을 내려다봤는데 실제로는 별로 높지 않아도 까마득해보였다.

나는 괜한 겁을 먹고는 허겁지겁 밧줄을 타고 올라갔고 어떻게든 라우라의 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으아아. 죽는 줄 알았네.”

“마법갑옷을 입고 있으면 이 정도 높이에서는 떨어져 죽을 일은 없어요.”

“라우라, 너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레베카님, 설마 삐치셨나요?”

“아니거든.”

“후훗, 나중에 호텔에 돌아가면 제대로 서비스를 해드릴 테니까 봐주세요.”

라우라는 투구 너머로 매혹적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날 유혹했다.

그녀는 고작 그런 걸로 나한테 매정하게 대한 걸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너무나도 정확한 해결책이라 할 말이 없다.

“이리스, 이제 네 차례야.”

“응!”

나는 라우라와 함께 이리스가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내가 올라올 때처럼 라우라가 밧줄을 꽉 잡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다행히 이리스는 나보다 훨씬 더 밧줄을 잘 타고 올라왔다.

처음이라서 요령이 없을 뿐이지 암벽등반을 배우면 금방 터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라우라에게 나무타기 같은 걸 가르쳐달라고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르쳐달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따로 시간을 내서 배워봐야겠다.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리스는 우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휴우, 다 올라왔다.”

“수고했어. 무섭진 않았니?”

“하나도 안 무서웠어. 오히려 재밌었는걸.”

“그래? 다행이네.”

라우라는 나보다 이리스에게 더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차별대우라기보다는 오늘 새벽에 이리스에게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에게 더 신경을 많이 써주는 것 같다.

앞으로도 쭉 라우라가 이리스에게 저렇게 친절하면 좋겠다.

라우라는 밧줄을 정리해서 다시 내게 반납하고는 나의 판단을 요청했다.

“레베카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바로 전망대를 습격할까요? 아니면 본대가 요새를 공격할 때까지 기다릴까요?”

“우리가 공격의 신호탄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일종의 교란작전이군요.”

“그런 셈이지. 베로니카 언니도 그걸 염두에 두고 우리를 전망대로 보내기로 했을 거야.”

“왠지 우리를 미끼로 이용하는 것 같은데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몰아넣었겠지. 예를 들어서 요새 안에서 파괴공작을 벌이거나 지휘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거야.”

나는 라우라와 달리 베로니카 언니가 우리를 이용할 생각으로 작전에 끼워준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우리를 미끼로 써먹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체험입단처럼 명확한 증거가 남는 번거로운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베로니카 언니가 날 믿어줬듯이 나도 언니를 믿고 싶다.

“확실히 그런 상황이면 생존자 구출 같은 임무를 맡겼을 리가 없었겠네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넌 늘 나보다 더 신중하니까 나도 항상 네게 의지하고 있어.”

“정말요? 헤헤헤.”

라우라는 내 말을 듣더니 기분 좋아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분명 투구 너머로는 엄청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리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부단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망대를 점령하면 일방적인 화력지원이 가능해요. 정면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것도 벅찬 적들 입장에선 후방에서 들어오는 사격이 굉장히 껄끄럽게 느껴질 거예요.”

“좋아, 그럼 행동으로 옮기자. 적들은 대부분 부상당했으니 제압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요새에서 대응에 나서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적들을 정리하고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자.”

“네, 레베카님!”

나는 거의 동시에 대답하는 라우라와 이리스는 이끌고서 경사가 약간 심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오르막길은 곧장 전망대의 입구로 이어졌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맹금족이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난 당황하는 놈의 머리통에 마력권총을 쏴서 간단하게 처리했고 총성을 듣고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맹금족에게는 마력산탄을 먹여주었다.

곧 라우라와 이리스도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마력소총으로 다른 맹금족들에게 쉴 새 없이 사격을 가해서 가차 없이 놈들의 숨통을 끊어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서 굳이 엄폐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갑옷이 제공하는 마법방어막의 성능을 믿고 묵묵히 적을 향해 총을 쏘면 그만이었다.

마치 갱단을 토벌할 때처럼 사실상 무적이 된 기분이 느껴졌다.

맹금족들은 성체의 수가 적고 그마저도 거의 다 부상을 입은 상태라서 우리의 총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고꾸라졌다.

“레베카님! 위를 조심하세요!”

나는 라우라의 말을 듣고 위를 바라보았는데, 전망대 위쪽에 숨어있던 새끼들이 손에 무기를 하나씩 쥐고서 우리 쪽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의 공격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미친 듯이 발악하면서 마법방어막을 무기로 마구 내리치며 시야를 가렸다.

나는 덩치 큰 놈들은 총으로 갈겨버리고 나머지 작은 놈들은 굳이 마력탄을 낭비할 필요 없이 주먹과 발길질로 때려죽였다.

병아리 같은 솜털이 있는 작은 놈을 죽일 때는 좀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사람을 먹는 식인괴물이니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다.

나는 정신없이 새끼 맹금족들을 때려죽였고 그 사이에 라우라와 이리스는 의미 없는 저항을 시도하는 성체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괴성과 총성이 동시에 멈췄을 때, 우리의 주변에는 피떡이 된 시체가 잔뜩 쌓여있었고 마법갑옷은 피와 깃털, 오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정말 끈질긴 놈들이었어. 이리스, 요새의 상황은 어때?”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어요.”

“본대는?”

“음... 요새에다가 마력포를 쏘려는 것 같아요.”

“좋아, 우리가 제대로 신호탄 역할을 해줬네. 얼른 전망대로 들어가서 지원할 준비를 하자.”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 전망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둥지 같은 것들이 있었고 깨진 알껍데기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아마도 요새에서 쫓겨난 맹금족들이 여기서 알을 부화시킨 것 같다.

“냄새가 너무 역겹네. 나중에 싹 불태워야... 무슨 소리지?”

갑자기 발밑에서 여자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난 즉시 지도창을 열어봤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속임수가 분명하다.

나는 급히 주변을 살펴보다가 다락문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력산탄총을 들고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계속해서 들리던 울음소리는 내 발소리가 크게 나자 바로 뚝 그쳤다.

이윽고 내가 소리의 근원에 도달했을 때, 나는 실로 기묘한 존재와 눈을 마주쳤다.

감옥에 갇혀있는, 반은 인간여성이고 반은 맹금족인 그 존재는 잔뜩 겁에 질린 채로 메마른 맹금족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향해 마력산탄총을 조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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