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6화
* * *
차가운 겨울의 아침 해가 수줍게 얼굴을 드러낼 시간에 우리는 길도 없는 산을 올랐다.
우리는 베로니카 언니가 준 임무에 따라서 본대와 별도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 덮인 산을 올라 요새에서 이어지는 절벽 아래의 비밀통로로 향했다.
산은 우리가 눈을 밟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경량이긴 해도 마법갑옷을 입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낑낑거리면서 올라갈 가파른 산을 가볍게 뛰어올라 목적지에 도달했다.
제일 먼저 비밀통로 앞에 도착한 라우라는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펴보았다.
“비밀통로를 만들 때 자연동굴과 연결시킨 모양이에요.”
“그러게. 안에 뭐가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 잠시만 쉬었다가 들어가자.”
나는 휴식을 핑계 삼아서 시간을 벌고 지도창을 펼쳐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파악했다.
비밀통로에는 아무도 없었고 요새에 무려 3백 명이 넘는 적들이 포진해있었다.
원래부터 요새에 자리 잡고 있던 맹금족 놈들의 수를 합치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적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첫 번째 목표인 생존자들은 비밀통로와 바로 연결된 감옥에 갇혀있었다.
대략 40명의 생존자들이 있었는데, 내 가방에 기사단에서 준 담요와 물통, 말린 음식을 잔뜩 넣어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여유롭게 나눠줄 수 있을 것이다.
‘도미닉이라는 이름은 한 명도 없어. 하지만 엘쿠단은 있구나. 혼자 있으면 당장에라도 잡으러 가겠는데 다른 적들과 함께 있어서 무리야. 본대가 전투를 시작하면 그때 기회를 노려봐야지.’
나는 생존자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도미닉을 생포하는 일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를 잡아서 진실을 알아낸다면 이리스와 베로니카 언니의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든다.
특히 라우라와 이리스의 관계가 굉장히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몇 시간 전에는 라우라가 이리스를 달래주었지만 어떤 진실이냐에 따라서 라우라의 반응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일단 엘쿠단을 생포해서 진실을 듣고 난 뒤에 걱정해도 될 일이야. 지금은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에 집중하자.’
나는 당장의 방침을 내리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라우라와 이리스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지도창을 열어둔 상태로 비밀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동굴내부는 굉장히 어두웠지만 마력권총의 전조등 덕분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미끄러운 바닥에는 개울물이 흘렀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보슬비처럼 뚝뚝 떨어졌다.
간혹 박쥐들이 보였고 온갖 정체모를 벌레와 갑각류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우물 안에서 꿈틀거렸다.
“꺅!”
“무슨 일이니? 이리스.”
“그게... 박쥐가 뿔에 부딪히는 게 무서워서요.”
이리스는 자신의 주변을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박쥐를 쫓아내느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뿔 때문에 구멍이 뚫린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질 않아도 행동이 너무 귀엽다.
나는 박쥐가 무섭진 않지만 더러워서 싫다.
그래서 마법갑옷을 입고 있어도 엄청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박쥐가 불쾌한 놈들이긴 하지. 자, 내 손 잡아.”
“하지만 그러면 제때 총을 쏠 수 없잖아요. 괜찮으니까 그냥 가요.”
이리스는 내가 내미는 손을 잡기를 거절했다.
아쉽지만 그녀가 하는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놀러 나온 것도 아니고 엄밀히 군사작전에 참가한 입장인데 둘이서 손을 잡고 다닐 수는 없겠지.
“네 말이 맞아.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대신에 또 박쥐가 너한테 덤비면 바로 말해. 내가 처리해줄게.”
“고마워요, 레베카님.”
이리스는 나를 한 번 포옹한 뒤에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본인이 자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애교가 묻어나오는 편이다.
필요할 때 애교를 부리는 라우라와는 확실히 다른 성격이다.
‘라우라의 애교는 가끔 무서울 때도 있단 말이지. 그래도 사랑스러우니까 됐어.’
잠깐의 소동이 있은 뒤로 우리는 계속해서 동굴을 나아갔다.
임무만 아니면 주변의 아름다운 종유석과 석순을 구경하면서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고 싶다.
심심하면 날아들어서 이리스를 괴롭히는 박쥐새끼들만 없다면 최고였을 텐데 말이다.
결국 보다 못한 라우라가 검으로 박쥐를 몇 마리 베어냈고 그 뒤로는 박쥐들이 이리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꼭 피를 봐야 말을 듣는 놈들이 있다니깐.
동굴은 계속해서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요새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연결되어 있을 법도 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오르는 원형계단 같은 동굴이라니 참 신기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앞장서서 가던 라우라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녀는 심각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바닥을 보세요.”
“바닥?”
나는 라우라의 말에 바닥에 불을 비췄다.
그러자 마치 피처럼 시뻘건 물이 발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습한 곳에서 비린내까지 올라오니 속이 좋지 않았다.
“저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저긴 분명 요새의 감옥으로 바로 올라가는 비밀통로일 텐데. 그런데 왜 저기서... 설마!”
나는 서둘러 지도창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생존자들의 이름이 싹 사라져있었다.
필터기능을 완전히 다 꺼도 생존자들의 이름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모두 한순간에 다 죽어버렸다는 소리다.
처형당한 걸까? 아니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걸까?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대체 이 요새에 있는 것들은 원하는 게 뭐란 말인가?
“얼른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하자.”
“네, 레베카님.”
나는 라우라와 함께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이리스는 후방을 살피다가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한 명이 지나가면 족할 정도로 좁은 통로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고여 있었고 그것이 넘쳐서 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아니라 살점 같은 것은 물론이고 눈알까지 굴러다녔다.
나는 속이 다 뒤집어질 것 같았고 이리스는 헛구역질을 했지만 라우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피가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처럼 쏟아지는 맨홀 뚜껑 같은 것을 찾아냈다.
“제가 문을 열게요.”
라우라는 내게 총을 맡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맨홀을 밀어 젖혔다.
그러자 대량의 피와 살점, 찢어진 장기가 라우라에게로 쏟아졌고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놀라서 라우라에게 달려가 이리스와 함께 그녀를 뒤덮은 끔찍한 것들을 서둘러 걷어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다행이다. 올라가는 건 내가 먼저 갈게.”
“조심하세요.”
나는 내장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잔뜩 걸려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맨홀 위로 고개를 내밀자 내 눈 앞에 지옥이 펼쳐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아있던 사람들의 흔적이 벽과 천장 그리고 복도에 잔뜩 묻어있었고 멀쩡한 시신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차라리 도살장이 이곳보다 훨씬 깔끔하고 분위기가 좋은 곳일 거다.
단순히 처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을 한 것처럼 보였다.
“씨발. 미쳤어, 이건.”
나는 혹시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감옥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철창 너머에는 참혹한 죽음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생명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내가 발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멀쩡한 것은 누군가의 결혼반지를 낀 손이었다.
유일하게 다섯 손가락이 다 붙어있고 상처가 난 흔적도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리스, 올라오지 마. 넌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인데?”
“방금 날 덮쳤던 시체가 어마어마하게 많아.”
“알았어. 난 통로를 지키고 있을게.”
내 뒤를 이어서 감옥으로 올라온 라우라는 아예 이리스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도 헛구역질을 심하게 한 사람에게 이런 걸 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라우라, 이번에도 마물일까?”
“글쎄요. 지금 상황을 봐서는 신체의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이 사람들을 죽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다리의 뜯긴처럼 사람을 먹이로 삼은 흔적이 남아있는 걸 보면 새로운 형태의 악마기생충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괴물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족과 마물도 벅찬데 거기서 또 어떤 괴물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
“그러게요.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으니 그만 내려가요.”
“저 신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나는 감옥의 복도에 잔뜩 있는 신발자국들에 관심이 갔다.
신발자국들은 줄을 서서 복도를 지나 감옥 밖으로 나가는 흔적을 역력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퀴자국도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얻은 무언가를 싣고 갔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도창에서 가까이에 있는 움직임들을 살펴보았고 몇몇 적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창고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여기에 무고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인 존재가 있을 것이다.
“레베카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언제 적들이 나타날지 몰라요.”
“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서라도 얻어 가야해.”
“만약에 우리가 들키면 본대의 작전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걱정 마. 나에게는 주변에 있는 인간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나는 라우라에게 내 비밀 중 하나인 지도창에 대해서 슬쩍 가르쳐주기로 했다.
비밀이라기보다는 보여줄 방법이 없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라우라를 재빨리 설득할 방법은 이것뿐이고 언젠가 가르쳐줄 생각이었으니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고향의 마법인가요?”
“음... 맞아. 주변의 지도가 나타나고 거기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표시되는 마법이지. 내 눈에만 보이는 거라서 너한테 어떻게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야.”
“걱정 마세요. 전 레베카님을 믿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마법이네요.”
“나도 원리를 몰라서 엄청 신기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마족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요새의 인간 지도자라면 이런 중요한 일을 마족에게 맡기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맹금족은 신발을 신지도 않잖아.”
“네, 그럼 조심해서 가보도록 해요.”
라우라는 결국 내 의견을 따라주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지도창으로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이에 이리스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한 뒤에 라우라와 함께 감옥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머리를 슬쩍 내밀어보았다.
보다 넓은 복도에는 내 확인한 대로 사람이 전혀 없었고, 내가 예상한 바처럼 맹금족이 얼씬 거리는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재빨리 그리고 조용히 걸어서 핏자국이 안내하는 창고의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이 자물쇠로 단단하게 잠겨있었지만 마법갑옷의 힘으로 그냥 뜯어버렸다.
조금 소리가 크긴 했지만 다행히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이나 마족은 없었다.
우리는 잠깐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다가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우, 들키는 줄 알았네. 그런데 뭐야 이건?”
나는 창고 안에 있는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보자마자 절로 인상이 찡그러졌다.
수레에는 1미터 정도 되는 유리통들이 잔뜩 실려 있었고 유리통 안에는 커다란 유충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나는 분석스킬을 사용했지만 이미 다 죽은 것들이라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완전히 밀봉되었으니 내 가방에 넣어가서 기사단에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좋았어. 잘 들어가네.”
내가 기대했던 대로 유리통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가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라우라와 함께 유리통을 전부 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유리통을 파괴할 때 나는 소리 때문에 적에게 들킬 염려도 없고 적들의 노력을 완전히 허사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창고에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지도창을 확인한 뒤에 라우라를 데리고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갔다.
“레베카님! 라우라!”
혼자서 통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리스는 우리가 돌아오자마자 아주 반가워했다.
그녀에게 꼬리가 있었더라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별 일 없었지?”
“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레베카님은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셨나요?”
“일단 놈들이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얻어낸 것들을 다 훔쳐왔어. 분석 같은 건 기사단이 알아서 할 거야. 그럼 얼른 돌아가자.”
우리는 좁아터진 비밀통로를 빠져나와 다시 동굴로 발을 디뎠다.
동굴 바닥은 곳곳에 시뻘겋게 물들어 있어서 보기 좋지 않았지만 갈수록 붉은 기운이 옅어졌고 결국은 원래의 맑은 물만 보였다.
우리는 가다가 작은 연못을 하나 발견했는데, 마법갑옷을 입은 채로 한 명씩 그 안으로 들어가 피와 찌꺼기를 씻어냈다.
연못의 물은 철저하게 오염되었지만 나는 자연의 정화능력을 믿으며 자리를 떴다.
우리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다시 눈 덮인 산으로 나왔다.
주변이 아주 조용한 것을 봐서는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다.
“벌써 12시야. 진짜 시간 빨리 간다. 조금만 쉬었다가 바로 전망대로 올라가자.”
시간을 확인한 나는 일단 답답한 투구부터 벗었다.
그러자 내 코와 입으로 신선한 공기가 마구 들어와 내 폐를 깨끗하게 청소해주었다.
차가운 공기가 이렇게 상쾌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레베카님, 혹시 배는 안 고프세요?”
라우라는 정오라는 말에 내 식사를 챙겨주려고 했지만 난 식욕이 전혀 없었다.
그런 끔찍한 곳을 목격하고 오는 바람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라우라,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아.”
“그런가요? 이리스도 안 먹는다니 저 혼자서라도 먹어야겠어요.”
라우라는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혼자서 딱딱한 육포를 물에 불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처량하게 느껴져서 먹지 않아도 라우라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가 애써 숨기려는 미소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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