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45화 (45/271)

〈 45화 〉 44화

* * *

복잡한 마음을 품고 도착한 기사단 본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기사단에 가족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토벌대가 급하게 후퇴하는 동안에 버려진 시신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기사단 병사들은 본부의 입구를 막고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는 않아보였다.

그냥 소리를 치면 다행이고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잘못도 없는 병사들에게까지 저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괜히 조용히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까지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만들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베로니카를 만나기는커녕 본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겠어.’

나는 어떻게든 본부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해봤지만 기본적으로 요새인 기사단 본부에 다른 사람들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베로니카가 밖으로 나와서 대중들 앞에 섰다.

마법갑옷을 입은 그녀는 단상 위에 올라가 소란스러운 상황을 쓱 훑어보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잘 들으시오! 그대들의 비통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지금과 같이 무질서한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없소. 그러니 부디 침착하게 줄을 서서 우리 기사단에 실종자 신고를 해주기 바라오. 기사단은 기필코 그대들의 가족을 찾아줄 것이오!”

베로니카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의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모든 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질서 있게 줄을 섰다.

간혹 흥분을 못 이긴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베로니카가 직접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자 눈물을 쏟아내며 얌전해졌다.

베로니카를 향한 병사들의 시선에는 존경이 담겨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감사함이 담겨있었다.

나는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뒤에 여유가 생긴 베로니카에게 곧장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베로니카님!”

“아, 레베카. 참으로 오랜만이오. 상황이 이러니 제대로 환영하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시오.”

베로니카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했지만 목소리를 낮추고 미소도 자제했다.

다들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와중에 혼자 친구를 만났다고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고생이 많으세요.”

“백성들이 고통에 빠졌는데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소?”

“정말 기사님다운 책임감 있는 반응이시네요.”

“칭찬 고맙소. 그런데 혹시 그대에게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베로니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녀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베로니카가 나에게 전적으로 우호적인 이유를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불안감이 들 때도 있다.

예전 세상에서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에 당해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제가 아니라 지인의 딸이 토벌대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다고 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염치없지만 베로니카님을 찾아뵈려고 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친구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오. 우선 실종자 신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진행하고 그 뒤에 내 집무실로 오시오. 부하들에겐 미리 말을 해놓겠소.”

베로니카는 이번에는 나만 들리도록 귓속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놓고 누군가의 편의를 봐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기사단의 공정성이 실추되니 조용히 내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분명하다.

나도 괜히 베로니카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으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레베카님, 줄은 저희들이 서있을 테니 먼저 가보세요.”

“너희 둘만 있어도 괜찮겠어?”

“노예라고 실종자 신고를 못하도록 되어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고마워, 그럼 먼저 가볼게.”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의 배려 덕분에 바로 베로니카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베로니카의 집무실은 요새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있었는데 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다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았다.

집무실 내부는 귀족이자 부단장으로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서 적절하게 고급지고 비싼 가구들이 들어차있어서 검소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지만 사치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집무실에 친구가 들어오는 건 처음이오. 자, 여기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베로니카가 빼주는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세상에 귀족이 평민에게 의자까지 빼주는 경우는 베로니카 밖에 없을 거다.

베로니카는 집무실 밖의 비서에게 커피와 간식거리를 내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곤 널찍한 탈의실로 들어가 마법갑옷을 벗고 기사단 제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대가 떠난 것은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소. 그대는 어땠소?”

“좋았어요. 병원에 잠깐 입원하긴 했지만요.”

“지금은 괜찮은 것이오?”

베로니카는 내가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떤 경위로 입원했는지 알게 된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걱정을 해줄지 모르겠다.

베로니카 성격이라면 그게 말이 되는 일이냐며 그냥 웃고 말았을 것 같다.

“네, 다 나았어요.”

“정말 다행이오. 그런데 내게도 입원했다고 소식을 전해줬더라면 병문안이라도 갔을 텐데 조금 섭섭하오.”

베로니카는 평소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귀엽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날의 ‘사고’를 생각해서 감정을 절제했다.

한 번 더 저지르면 라우라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겠거든.

“죄송해요. 그래도 단순한 입원인데 베로니카님을 번거롭게 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입원은 입원이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내게 말하도록 하시오. 정 바쁘면 편지와 선물이라도 보낼 수 있으니 말이오.”

“네, 명심할게요.”

우리가 사적인 대화를 하는 사이에 비서가 커피와 쿠키를 가져왔다.

기사단이 마시는 커피는 특별한 게 있나 싶었지만 정말 평범했다.

베로니카는 본인의 저택에서는 고급커피를 마셔도 직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쿠키는 엄청 맛있어서 나중에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가져다주고 싶을 정도다.

내가 쿠키에 집중하는 사이에 베로니카는 우아한 자세로 커피를 마셨다.

귀족들은 사소한 것도 자세를 배운다더니 커피를 마시는 법도 배우는 모양이다.

“그대가 말한 지인은 누구요?”

“마법무기점을 운영하고 있는 칼스란과 미나테린이라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새로 산 노예의 저주를 풀어주기도 했었죠. 정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그런 비극이 생겨서 너무 안타까워요.”

“나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오. 프랑카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마법공학자와 대장장이라서 우리 기사단도 많은 신세를 지고 있소. 그런 사람들에게 큰 불행이 닥치다니 참으로 유감이오.”

나는 칼스란 부부를 베로니카가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고 칼스란 부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인 줄도 몰랐다.

그저 우연히 들렀던 마법무기점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이번에 샀다는 노예는 어떻소? 얼핏 봐도 외모가 출중하던데 말이오.”

“이리스는 라우라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마안을 쓸 수도 있고요.”

“사랑을 위해서 노예를 사는 사람은 정말 희귀한 경우인데 말이오.”

“제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해요. 평범하게 사귈 능력이 없어서 노예를 구입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자기비하는 하지 마시오. 그대가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 나를... 흠흠!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척 해주시오.”

“아, 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하하!”

우리는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서로 말문을 열지 못하고 시선도 마주치질 못했다.

그저 새빨개진 얼굴로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서로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어색한 상황을 참다못한 베로니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리스의 마안은 어떤 종류의 마안이오?”

“일종의 망원경 같은 역할을 해요. 바람이 부는 방향도 알 수 있고 목표를 추적하는 기능도 있다고 들었어요.”

“정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안이구려. 귀족들 상대로는 그 사실을 되도록 숨기도록 하시오. 나도 이 사실은 함구하도록 하겠소.”

“귀족들은 마안을 혐오하나요?”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오. 신기한 구경거리 정도로 여기는 귀족들이야 별로 위험하지 않지만 마안의 능력을 자신들의 혈통에 포함시키려고 온갖 짓을 다 저지르는 귀족은 아주 위험하오.”

“미리 가르쳐주셔서 고마워요. 같은 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난 그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베로니카는 씩 웃으며 여유롭게 커피를 들이켰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이리스가 겪은 비극은 결국 마안에 집착하는 귀족 때문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리스의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이리스에게 저주를 물려주면서까지 마안을 못 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귀족가문이 누군지는 몰라도 언젠가 이리스를 위해서 앙갚음을 해주고야 말겠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우리 기사단은 모레 아침 8시에 토벌대의 시신을 찾고 적대세력을 응징하기 위해서 출병할 것이오.”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건 원칙적으로 불가하오.”

“네? 어째서요? 저번에도 같이...”

“이번 작전은 영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기사단 이외의 인원이 참가하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소. 그렇지 않아도 백성들의 피해가 많은 상황에 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방침이오.”

베로니카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큰아버지이자 영주라는 사람은 이번 사태가 자신의 위신이 실추되는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고 싶은 것이다.

저번에 슬럼가에서 있었던 상급마물 출현으로 황제에게 질책을 받은 전적이 있는 사람이니 이번 사건도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겠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정치적 판단이었지만 가슴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전 칼스란 씨와 미나테린 씨에게 딸을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사람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 사람들은 이리스를 저주에서 풀어줬고 전 그 은혜를 갚고 싶어요.”

“레베카, 그대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소. 그래서 꼼수를 하나 제안할까하오.”

“꼼수라고요? 베로니카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요.”

“칭찬 고맙소. 하지만 나도 부단장의 자리에 있으니 꼼수를 부릴 때가 종종 있소. 어쨌든 한 번 읽어보시오.”

나는 베로니카가 내민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체험입단? 이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설명을 보니 기사단에 체험입단을 하면 기사단의 임무를 일부 경험할 수 있고 해당 기간 동안 기사단원으로 취급받는다고 한다.

원래라면 귀족자제들이나 재력가의 자식들에게 주어지는 기회이지만 베로니카는 평범한 모험가인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줬다.

설마 이게 나를 기사단에 완전히 입단시키려는 포석은 아니겠지?

방금 베로니카가 꼼수라고는 그랬지만 내 의지에 반해서 억지로 일을 추진할 약삭빠른 사람은 아니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보다시피 체험입단 방식으로 잠시 기사단 소속이 되면 이번 작전에 참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소. 그리고 체험입단을 하면 내가 임시로 창단할 직속부대에 넣어줄 테니 안심하고 신청하시오.”

“확실히 이 방법이 최선이긴 하겠네요. 그런데 제 노예들도 데려갈 수 있나요?”

“물론이오. 듣기 거북할지도 모르겠지만 노예는 사유재산이니 말이오.”

베로니카는 내게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귀족이나 되는 사람이 노예를 사랑하는 평민을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고마웠다.

베로니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아참, 제가 베로니카님의 직속부대에 들어가면 말을 놓으실 건가요? 베로니카님에게 명령을 받으면 좀 무서울 것 같네요.”

“부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신병! 하하하, 농담이고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소. 어차피 눈속임을 위한 연출인데 괜히 군기를 잡으면서 서로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지 않소?”

“맞아요. 전 베로니카님이랑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거든요. 기회가 되면 아예 언니라고 불러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언니라... 얼른 나를 언니라고 불러보시오.”

나는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인데 베로니카는 제법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에도 농담인가? 아니야, 저 눈빛은 진심을 말하는 눈빛이야.

“그, 그럼 실례할게요. 흠흠. 베로니카 언니.”

“무슨 일이니? 내 동생 레베카?”

베로니카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어버릴 것처럼 베로니카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려, 레베카! 상대는 애가 딸린 유부녀이고 귀족이란 말이다!

“방금 그건 반칙이야.”

“어째서? 네가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고 그래서 거기에 맞게 해준 거잖니?”

“몰라. 하여튼 그런 게 있어.”

“하핫! 넌 참 재밌는 사람이라니깐. 그나저나 말 놓으니까 좋네. 앞으로도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말하자.”

“그러다 누가 오면 어쩌려고?”

“지금처럼?”

나는 베로니카 내 뒤를 보면서 하는 말에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라우라와 이리스였다. 아니, 얘들은 대체 언제 집무실에 들어온 거야?

나는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너무 놀라지 마. 내가 불렀으니까. 네가 나보고 언니라고 부를 때 슬쩍 들어왔었지.”

“대체 내 주변 사람들은 왜 자꾸 날 놀려먹는 거야?”

“그야 레베카님의 반응이 재밌으니까요.”

라우라는 킥킥거리며 말했고 이리스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나는 전혀 납득이 되질 않는 기분을 느끼며 체험입단신청서를 작성했다.

레지나 카론이라는 이름과 평민이라는 신분 그리고 내 재산으로 등록된 라우라와 이리스에 대한 정보를 적었는데 여전히 빈칸이 많았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할게. 걱정 말고 모레 새벽 5시까지 기사단 본부로 와.”

베로키나는 아직 다 쓰지도 못한 신청서를 가져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기사단과 함께 인류의 배신자들을 쓸어버리고 시신을 되찾는 일 뿐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