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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44화 (44/271)

〈 44화 〉 43화

* * *

오늘은 늦잠을 잤다.

내 생각보다 더 피곤했던 모양이다.

언제나 내 오른쪽에서 잠을 자는 라우라는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본인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난 그 부지런함을 본받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왼팔이 좀 아프네. 아, 이리스구나.’

나는 약간 저리면서 묵직한 감각이 드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스러운 이리스가 내 왼팔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라우라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을 텐데 오늘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녀의 뿔이 내 팔을 눌러서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자국이 진하게 남을 것 같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서 이리스의 부드러운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어제 이리스와 나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고, 보다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라우라에 이어서 두 번째 아름다운 연인이 생겼다는 현실이 당연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져서 이렇게 손으로 직접 만지며 확인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리스는 야한 디자인의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내가 사준 것은 아니다.

내가 바보 같은 짓으로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라우라랑 같이 속옷가게에 가서 산 것이다.

정작 어제는 바로 옷을 다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바람에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리스의 볼을 만지다말고 그녀의 잘 빠진 허리를 쓰다듬었다.

라우라가 약간 탄탄하게 느껴졌다면 이리스는 부드러움 속에 탄탄함이 숨어있는 것 같다.

허리의 굴곡을 적당히 즐긴 나는 이리스의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만지려고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이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 행동을 봉쇄했다.

“아빠...”

“오, 이런.”

나는 바로 이리스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리스는 잠결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이 비수가 되어서 내 양심에 꽂혔다.

그래, 마음을 심하게 다친 사람을 상대로 과도하게 성욕을 추구하면 안 되겠지.

곧 이리스는 잠에서 깨어났고 촉촉하게 젖은 눈을 살포시 떠서 내게 애정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레베카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좋은 아침이야.”

나는 이리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리스는 내 입맞춤에 배시시 웃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사랑스럽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애인이라서 너무 좋다.

“어라? 제가 베개가 아니라 레베카님의 팔을 베고 있었네요. 괜찮으세요?”

“조금 저리긴 한데 괜찮아.”

이리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내 팔에 피가 잘 통하기 시작하자 엄청나게 찌릿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윽! 별로 안 괜찮은 것 같네. 아야야...”

“죄송해요. 제가 팔을 주물러드릴게요.”

“아, 아니야. 지금은 그냥 방치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

나는 이리스의 제안을 마다하고 그냥 팔을 방치해두었다.

괜히 손으로 건드리면 훨씬 더 아플 것 같아서 무섭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겨우 팔의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리스의 뿔이 남긴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지워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이거 멋진 문신이네.”

“저도 모르게 레베카님의 팔을 베개라고 착각했나 봐요.”

“그만큼 내가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리스는 수줍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뽀뽀를 하면서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어디 아프거나 쓰라린 곳은 없니?”

“네? 딱히... 아! 조금 따가운 것 같기도 해요. 헤헤헤.”

이리스는 내 질문의 의도를 알고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이리스에게 좀 과했던 것 같다.

버티기 힘들다는 사람을 붙잡고 계속 절정을 시켰으니 말이다.

이거 라우라가 나한테 했던 짓이랑 비슷한 걸.

어쨌든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겠지.

나는 침대 옆 서랍에서 신전에서 만든 만능연고를 꺼내서 이리스에게 건네줬다.

“이 연고를 줄 테니까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해.”

“감사합니다.”

“기분은 어때?”

“꿈자리가 좀 사납기는 했는데 익숙한 일이라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혹시 힘들면 나한테 의지하도록 해. 알았지?”

“네, 레베카님.”

나는 애써 강한 척을 하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부모님을 잃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라우라도 마찬가지겠지.

앞으로도 두 사람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신경써줘야겠다.

내가 라우라에 대해서 생각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우라는 내가 사준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목에는 땀을 닦은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운동을 해서 얼굴이 약간 발갛게 물든 것이 참 매력적이다.

“레베카님, 일어나셨군요?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응. 아주 잘 잤어. 너는 어때?”

“네, 늘 레베카님 덕분에 잘 자고 있어요. 이리스도 잘났니?”

“그런 것 같아.”

“아침에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깨우기 미안할 정도더라. 그래서 그냥 자게 놔뒀어.”

“그랬구나. 고마워.”

“아유, 귀여워라.”

라우라는 이리스에게 다가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동갑인 이리스를 동생처럼 취급했는데 이리스도 그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라우라가 이리스를 먼저 챙기고 이리스도 라우라를 돕는 모습은 언제 봐도 훈훈했다.

실컷 이리스를 안아준 라우라는 이제 나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아침키스를 할 시간이에요.”

“뭔가 숙제처럼 말하는 것 같지 않아?”

“숙제 맞잖아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숙제. 후훗.”

라우라는 나를 덮치듯이 껴안더니 열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마치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날 쉽사리 놓아주질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도 라우라는 만족했고 떨어진 입술 사이로 투명한 다리가 하나 만들어졌다.

라우라는 짧게 입을 맞춘 뒤에 내 앞으로 이리스를 떠밀었다.

“이제 이리스, 네 차례야.”

“으, 응.”

난 어젯밤 자기 전에 이리스에게도 매일 아침에 내게 키스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라우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었고 이리스는 그냥 미묘한 미소만 지었었다.

난 키스와 섹스에 있어서는 순서를 제대로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라우라가 먼저이고 이리스가 두 번째다.

어제처럼 라우라의 수락이 있다면 이리스에게 먼저 할 수 있다.

이건 셋이서 공식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아니지만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라우라가 언제나 자신이 첫 번째라고 선언했으니 내 입장에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주인이 노예에게 허락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하렘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나는 내게 다가오는 이리스에게 먼저 키스를 하지 않았다.

아침키스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애인들의 의무니까.

이리스는 라우라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용기를 내어서 내게 키스를 했다.

풋풋함이 느껴지는 키스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우리의 키스를 보고 있는 라우라도 전혀 질투를 하지 않고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리스의 키스는 길지 않았지만 정갈하게 끝을 맺었다.

“나 너무 행복한 것 같아. 이게 꿈이라서 정말 좋아.”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리스, 너도 그렇지?”

“응. 레베카님, 저도 행복해요.”

라우라와 이리스는 내 품에 동시에 안기더니 둘이서 함께 내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포옹하고서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너무 좋으면 사람이 멍청해진다던데 그게 딱 지금의 나를 보고 지은 말처럼 느껴진다.

“레베카님, 오늘의 일정은 정하셨나요?”

“칼스란 씨에게 마핵을 주고 모험가길드에 가서 돈을 받을 거야. 왠지 베로니카와 얽힐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레베카님 설마 또...”

라우라는 나를 흘겨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설마 그 날의 ‘사고’에 대해서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 건가?

“아니야! 맹세코 다시는 그럴 일 없어. 믿어주라, 라우라. 응?”

“당연히 믿어드리지요. 그냥 장난이었어요.”

“너 내 노예 맞니?”

“그럼요. 레베카님의 충실한 노예인걸요.”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튼 그 주제는 농담거리로 사용하지 말아줘.”

“네, 레베카님.”

나는 킥킥거리면서 대답하는 라우라에게 순간적으로 꿀밤을 때릴 뻔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했으니 그냥 생각만 하고 말았다.

대신에 라우라의 양쪽 볼을 살짝 잡고서 우스꽝스럽게 도리도리를 하게 만들었다.

그걸 본 이리스는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흠흠. 아무튼 길드에서 의뢰를 받을 생각 없어. 어차피 그쪽도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하긴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한가롭게 평소처럼 일하고 있지는 못하겠죠.”

“그래서 오늘은 오전에 볼 일을 다 끝내놓고 여유롭게 보낼 생각이야.”

“남는 시간은 체력단련을 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래, 그래야지. 아하하.”

라우라는 내가 한가롭게 소파에 누워서 낮잠이나 즐기는 걸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다.

하지만 이건 라우라가 깐깐하게 구는 게 아니라 내가 게으름을 피우면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한 탓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놀기 시작하면 결국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게 운동 같은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누군가 강제로 나를 이끌어줄 필요가 있었다.

“레베카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글쎄? 나가서 먹을까?”

나는 별로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어차피 오전에 할 일이 있으니 나가는 김에 밖에서 먹을까 싶었다.

내 제안에 라우라와 이리스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두 사람을 데리고 호텔에서 나왔다.

여전히 도시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사람들의 입에는 몇 명의 모험가가 죽었는지, 그게 어느 집의 누구인지가 오르내렸고 간혹 집 앞에 당도한 시신을 보고서 오열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프랑카 토박이들이라서 그들이 겪은 참상은 고스란히 도시로 전체로 퍼졌다.

늘 생기 있고 활발했던 도시가 오늘은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도시는 또 다른 하루의 일상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직장이나 영업장으로 향했고 그런 그들을 먹이기 위한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다.

덕분에 우리도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는 위장을 달래줄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고른 아점 혹은 브런치는 번화가 귀퉁이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서 파는 팬케이크와 우유다.

몇 장씩 쌓인 팬케이크 위에 큼지막한 버터를 얹고 메이플 시럽을 잔득 뿌린 아름다운 음식이 내 뱃속으로 들어가니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거기다 라우라와 이리스가 내게 한입씩 먹여주겠다며 포크로 찍은 팬케이크 조각을 내미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나는 순서대로 한 입씩 받아먹고는 엄지를 척 올리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라우라와 이리스는 행복한 미소를 짓더니 서로에게도 먹여주었는데 라우라는 그걸 넘어서서 이리스의 입에 묻은 시럽이나 우유를 닦아주기도 했다.

정말 우애 깊은 자매처럼 보인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우리는 곧장 칼스란의 마법무기점으로 향했다.

마법무기점 건너편의 식당은 오늘은 쉬는 날인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면 낭패를 볼 뻔 했다.

‘설마 이 집도 이번 일로 피해를 본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마법무기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늘 계산대에 있던 칼스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고 안쪽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봤는데 칼스란과 미나테린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칼스란 씨?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저희 딸이 토벌대에 참가했었다가 그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어흐흑!”

칼스란은 울음이 터져 나와서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나는 여태까지 이 부부에게 모험가인 자식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들의 딸이 이번 토벌대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시신조차 수습되질 못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안타깝다.

하필이면 내가 빚을 진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다니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죄송합니다. 가게를 열었으면 손님을 응대해야 마땅한데 이렇게 울고만 있어서...”

“아,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불만을 가질 수 있겠어요? 따님에게 있었던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감사합니다.”

나는 말로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부부와 함께 하루 동안 시간을 보냈던 이리스는 그들을 안고서 함께 울어주었다.

노예라도 차별 없이 친절하게 대해준 부부에게 슬픈 일이 생기니 이리스도 눈물을 참질 못하는 것 같다.

“가족을 잃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그래,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인데 말이야.”

라우라는 내 손을 잡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손을 꼭 잡았다.

반드시 이번 사태를 저지른 놈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싶다.

“칼스란 씨, 미나테린 씨. 제가 따님을 되찾아올 게요. 그러니 이름과 인상착의를 가르쳐주세요.”

나는 이 슬픔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기사단에서 움직일 테니 베로니카에게 가서 이번 작전에도 참가시켜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만약 베로니카가 거절한다면 몰래 그들을 따라가서라도 칼스란 부부의 딸의 시신을 되찾고야 말겠다.

나는 굳은 결심과 함께 부부에게서 정보를 받는 즉시 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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