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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37화 (37/271)

〈 37화 〉 36화

* * *

우리는 사격연습장에서 볼 일을 마치고 곧장 노예시장으로 향했다.

노예시장은 어젯밤보다 사람이 더 많았는데 손님들보다는 노예상인들과 그들이 납품하는 노예들이 더 많았다.

라우라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노예상인들을 바라보았지만 이리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라우라의 가격이 이상하리만치 저렴했던 이유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순종적이지 못한 노예는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나는 어수선한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얼른 이리스를 빌려줬던 가게로 들어갔다.

담뱃대를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주인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이해주었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벌써 저희 가게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이리스를 제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심했거든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드디어 이리스에게도 번듯한 주인님이 생겼군요. 호호호!”

아줌마는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그녀에게 포옹도 해주었다.

사람을 상품으로 파는 노예상인치고는 꽤나 인간적인 태도라서 어색할 정도다.

하지만 이리스의 표정이 밝은 것을 봐서는 가식이 아닌 것 같다.

“이리스의 사격실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11만 라기르만 주시면 된답니다.”

“괜찮은 가격이네요. 여기요.”

“오호호! 감사합니다. 예속각인을 새겨주는 사람은 다른 가게에 있으니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게요.”

아줌마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우리를 노예시장에서 가장 큰 가게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건장한 체격을 갖춘 남성노예들이 대부분이었고 여성노예들도 다들 일을 잘할 것처럼 보였다.

가게 안에는 손님들이 제법 많아서 수시로 매매가 이루어졌고 노예가 팔려 가면 곧 그 자리를 새로운 노예가 채웠다.

아줌마가 종업원과 대화를 좀 나누더니 곧 예속각인을 새겨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라? 라우라에게 예속각인을 새겨줬던 바로 그 늑대족 직원이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간만에 만난 지인처럼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객님. 저번에 구입하셨던 노예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그런데 여기서 일하세요?”

“경매가 있는 날에는 경매장으로 출장을 나가고 평소에는 여기서 근무합니다. 예속각인을 새기는 대상은 거기에 있는 서큐버스입니까?”

“네, 맞아요. 구입목적은 저번과 동일하고요.”

“위치도 똑같이 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준비해주십시오.”

나는 상시 노출상태인 이리스의 하복부에 손바닥을 대었고 직원이 예속각인을 새겼다.

이리스는 엄청나게 부끄러워했지만 반항적인 태도나 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라우라의 예속각인을 봐서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나보다.

“끝났습니다. 다음에 또 노예를 구입하신다면 저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어요.”

나는 직원과 인사를 한 뒤에 이리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이리스는 손으로 예속각인을 가린 채로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러다 나 말고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서서히 손을 치웠다.

분홍빛 예속각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걸 본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걸로 넌 공식적으로 내 노예야. 절대로 나를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해.”

“네, 레베카님.”

“나는 널 성노예로 구입했지만 어제도 말했듯이 강제로 섹스를 요구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모험가길드에는 널 내 소유의 전투노예로 등록할 거니까 네 실력을 마음껏 뽐내도록 해.”

“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게요.”

이리스는 내게 순종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성노예가 된 것은 분명 아주 수치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섹스에 강제성이 없고 본인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니 타협한 것 같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니 이리스의 본심은 전혀 다를 지도 모른다.

라우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신뢰를 주는 게 중요할 것이다.

“이리스,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려요. 라우라 씨.”

“우리 동갑이니까 그냥 편하게 말 놓아도 돼. 친구끼리 존댓말은 어색하잖아.”

“친구?”

“그래, 친구. 설마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아, 아니에요. 아니, 아니. 친구라고 생각해!”

이리스는 라우라의 짓궂은 농담에 허둥지둥하면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이리스를 상대로 분석스킬을 사용했다.

그녀는 나의 성노예로 신분이 바뀌었고 직업은 아직 무직이다.

그리고 상세개인정보창이 해제되어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건강상태는 양호했지만 저주받은 마법방어구 때문에 마안통제 불가능이라는 상태이상에 걸려있었다.

나에 대한 이리스의 호감도는 3. 즉, 친한 친구 수준이었다.

호감도가 예상보다 높아서 엄한 곳에 예속각인을 새겨도 저항이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음란도는 3인데 이 정도 수치면 섹스에 흥미가 있지만 실전에 돌입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수준이다.

우선 호감도를 올리는데 집중하고 그 뒤에 음란도를 올려서 최대한 빨리 예속퀘스트를 활성화시키도록 하자.

다음으로 이리스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을 살펴보았다.

비전투스킬은 내게 익숙한 고통내성과 회피를 포함해서 위장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라우라가 가지고 있는 은신이 적의 시야에서 벗어나 몸을 숨기는 스킬이라면 이리스의 위장은 각종 자연물이나 물건,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적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는 스킬이다.

은신과 달리 위장은 종족특성과는 관련 없는 스킬이니 분명 이리스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전투스킬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사격과 관련된 스킬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스킬레벨은 모두 나보다 높은 8이지만 그게 성장한도였다.

그리고 내게는 없는 전투스킬인 장거리저격의 스킬레벨도 8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제한 없이 나처럼 최고레벨인 10까지 올릴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저격수로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역시나 라우라처럼 패시브스킬은 없었다.

패시브스킬은 어쩌면 나만 터득할 수 있는 스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리스의 스킬을 모두 살펴보자 타이밍 좋게 라우라가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괜찮으세요?”

“응? 아, 괜찮아. 잠시 딴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마법무기점으로 가보자.”

“네, 레베카님. 가자, 이리스”

라우라는 이리스의 손을 잡은 뒤에 나와 팔짱을 꼈다.

그녀는 비슷한 처지인 친구가 생겨서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즐겁게 재잘거리는 두 사람을 데리고 칼스란과 미나테린이 운영하는 마법무기점으로 향했다.

과연 칼스란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힌트를 얻을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일단 이리스에게는 진실을 숨기는 게 좋겠지? 아니야. 신뢰를 쌓으려면 이런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돼. 마법무기점에 가기 전에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해야겠어.’

나는 예전에 들른 적이 있는 마법무기점 건너편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침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서 식당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난 일부러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라우라와 이리스를 내 맞은편에 앉혔다.

“이리스, 넌 커피 마시니?”

“네,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 이제야 나한테 커피동료가 생겼네. 라우라는 못 마시거든.”

“정말요? 그럼 이제부터 제가 커피를 타드릴까요?”

“그건 라우라에게 상담해봐. 원래 라우라가 하는 일이야.”

“아...”

내가 하는 말에 이리스는 라우라의 눈치를 살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을 뺏으려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다행히 라우라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나보다 실력이 좋다면 기꺼이 너한테 양보할 수 있어.”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너한테 민폐인 것 같은데.

“아니야. 네가 나보다 실력이 좋으면 레베카님이 더 맛있는 커피를 드실 수 있잖아. 만약 내가 더 잘한다면 레베카님과 너를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고. 어쨌든 내가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어.”

“실망시키지 않을게.”

“나도 기대할게.”

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대화를 하는 사이에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주문은 식사 대신에 커피 2잔과 홍차 1잔 그리고 달달한 케이크 3조각을 시켰다.

우리는 주문한 것들을 음미하며 적당히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모두의 잔이 거의 다 비었을 때, 심호흡을 하면서 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라우라도 지금 일어날 일을 눈치 챘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해. 알았지?”

“네, 레베카님.”

“내가 마법도구를 분석하는 능력이 있어서 네 팔찌를 확인해봤는데 저주를 받았더라.”

“저, 저주라고요?”

“그래. 주인으로 지정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저주야. 마안을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고 파괴되면 즉시 주인이 사망해. 직계혈통인 여성에게 물려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원래 주인이었던 사람이 24시간 안에 죽고 말아.”

“그렇다면 어머니는 저에게 이걸 물려주시고 돌아가신 건가요? 저 때문에? 어떻게 이럴 수가...”

이리스는 엄청나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울먹였다.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지만 내가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거부하려고 들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보다 못한 라우라는 이리스를 옆에서 안고 그녀를 달래주었다.

“이리스, 분명 너희 어머니는 널 위해서 목숨을 바쳐 그걸 물려주셨을 거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이 당시에 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였을 거라고 생각해.”

“어머니는 그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어요. 그저 부적이라면서 팔찌를 제게 채워주셨어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무엇이 우리 가족을 파괴했을까요? 흐으윽...”

이리스는 결국 라우라의 품에 안겨서 울기 시작했고 라우라도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이리스는 여전히 훌쩍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어째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건가요?”

“나는 너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싶어. 그땐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지금은 널 지켜줄 수 있는 우리들이 있으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제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째서...”

“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니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앞으로 쭉 함께할 가족 같은 사이인데 시작부터 서로를 속이는 건 좋지 않아. 안 그래?”

“감사합니다. 저 같은 노예를 가족으로 받아주시다니 너무 기뻐요.”

“아니야. 널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할 뿐인 걸.”

나는 이리스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모두의 주인인 입장에서 쉽사리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이제 저기 있는 마법무기점으로 가서 유품에 깃든 저주를 풀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해. 좋은 소식이 있기를 빌어보자.”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른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우라와 이리스도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식당주인은 이리스가 불쌍했는지 우리에게 나중에 먹으라고 샌드위치를 챙겨주었다.

예기치 못한 호의를 얻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자주 들러줘야지.

우리가 마법무기점으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잘생긴 미중년 칼스란이 나를 반겨주었다.

“레베카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덕분에 잘 지냈어요.”

“못 보는 사이에 노예가 하나 더 늘었군요. 레베카 씨에게 잘 어울립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이 팔찌의 저주를 해제하고 싶어요.”

“저주라?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칼스란은 이리스의 팔찌를 조심스럽게 받아서 무슨 거대한 현미경처럼 생긴 마법도구에 집어넣고 그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마법술식 자체는 깔끔해서 저주를 없애는 것 자체는 쉽지만 이게 주인의 몸에 어떤 영향을 줄 지 알 수가 없어서 시간을 들여서 검사를 해봐야할 것 같네요.”

“저주를 해제하는 과정에서 이리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까요?”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럼 저주를 없애지 않는 게 좋을까요?”

“제게 노예를 하루정도 맡겨주시는 게 어떨까요? 노예를 정밀검사하고 마법술식을 분석해서 가장 안전하게 저주를 해제하는 방법을 찾으려면 최소한 하루의 시간이 걸리거든요.”

칼스란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왔다.

이리스를 정식으로 구입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하는 일이 생기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칼스란과 미나테린은 지도창에서 하얀색으로 뜨는 무해한 사람이니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인류추적스킬 또한 믿지만 역시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해야겠다.

“이리스, 넌 어떻게 할래? 강요하는 게 아니니 솔직하게 말해봐.”

“저는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우라, 너는?”

“제 생각도 이리스랑 같아요.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요.”

두 사람이 모두 기꺼이 찬성표를 던지니 나도 반대를 할 이유가 사라졌다.

마법무기점과 호텔까지의 거리는 인류추적스킬의 범위 안에 여유롭게 들어오니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최대한 빨리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칼스란 씨, 이리스를 부탁드릴게요. 마음에 상처가 큰 친구이고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잘 보살펴주세요.”

“저희 부부는 노예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아내가 무뚝뚝한 것 같아도 굉장히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랍니다. 하하하하!”

칼스란은 오늘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대놓고 드러냈다.

나도 어디 가서 라우라 자랑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조용히 넘어갔다.

“이리스, 갑작스럽지만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걱정 마. 알았지?”

우리는 이리스를 한 번씩 포옹해주면서 갑자기 찾아온 짧은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한 번 정해진 일이니 믿음을 가지고 호텔로 돌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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