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5화
* * *
어젯밤에는 꽤나 잠을 설쳤다.
라우라가 잠결에 날 안아주지 않았더라면 아예 밤을 샜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나 혼자 침대에 누워있었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다.
그리고 침실의 닫힌 문 너머에 있는 거실에서 라우라와 이리스가 즐겁게 잡담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서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리스한테 언제 팔찌에 대한 걸 말해주지? 어제도 이걸 고민하느라 못 잤었지.’
나는 어떤 식으로 이리스에게 어머니의 유품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전달하면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제 이리스가 팔찌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바로 말해주질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리스를 구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만약 그녀의 과거를 몰랐더라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면한 문제에서 도망가고 싶지 않다.
‘머리가 지끈거리네. 커피라도 마시면 괜찮아지려나?’
나는 편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오늘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우선 모험가길드로 가서 보고서를 제출해야한다.
사람이 마족과 거래를 한다는 걸 믿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그러고 나서 사격연습장으로 내려가 이리스의 사격실력을 확인할 것이다.
사냥에 자신이 있다고 했으니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말로는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 있으니 직접 보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 일정은 마법무기점에 들러서 저주받은 팔찌의 귀속을 안전하게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방법을 찾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방법이 없다면 나로서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남는 시간은 라우라와 함께 체력단련을 하면 되겠다. 그럼 슬슬 일어나볼까?’
나는 여전히 느껴지는 편두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옷을 입었다.
거울로 보는 내 모습은 여전히 완벽해서 자신감이 절로 충전되었다.
내가 침실에서 나오니 소파에 앉아있던 라우라와 이리스가 동시에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와 키스를 했다.
덕분에 편두통이 싹 가라앉고 별로 좋지 않았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레베카님, 어제 제대로 못 주무셨죠?”
“알고 있었구나? 그래도 네 덕분에 잘 수 있었어.”
“어쩐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레베카님이 저를 꼭 안고 계시더라고요. 히히히.”
“기분 좋았어?”
“그럼요. 레베카님은 따뜻해서 좋아요.”
라우라는 내 품에 기대더니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애교를 부렸다.
나는 사랑스러운 라우라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면서 그녀의 향기를 만끽했다.
조만간에 라우라와 섹스를 하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야할 것 같다.
겸사겸사 저번에 특수상점에서 샀던 물건도 한 번 써봐야겠다.
“이리스는 잘 잤니?”
“레베카님께서 저를 위해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라우라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 놓고 내 손길을 즐겼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이리스의 뿔을 만져보았는데 정말 매끄러웠다.
뿔은 언뜻 보기에는 뾰족해보여도 끝은 충분히 뭉툭해서 어제 내가 배를 찔렸어도 살짝 멍이 드는 수준으로 끝났다.
나는 뿔을 너무 오래 만지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손을 뗐다.
“레베카님은 어째서 잠을 설치셨나요?”
“고민거리가 좀 있었거든. 내가 원래 자기 전에 생각이 많은 편이라 가끔 그래.”
“설마 저 때문이신가요?”
“그냥 개인적은 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 그럼 내려가서 뭐라도 먹고 모험가길드로 가자. 얼른 보고서를 내고 싶어.”
나는 이리스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 서둘러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이리스는 내게 캐물을 입장이 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갔지만 라우라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라우라에게는 귀띔을 해줄 수밖에.
“이리스, 2층에 가서 호텔식당이 지금 영업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줄래? 우리는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네, 레베카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이리스가 문을 닫고 나가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라우라에게 내 고민을 말해주었다.
“라우라, 이리스는 저주받은 마법방어구 때문에 마안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야.”
“그럼 파괴하면 되겠네요. 보통 그런 저주받은 마법도구는 파괴하면 문제가 바로 해결되거든요. 어머니의 유품이라도 이리스에게 해를 끼치면 없애야죠.”
“문제는 그걸 파괴하면 주인인 이리스가 즉사해. 직계혈통인 여자에게 상속하면 해방될 수는 있지만 하루 만에 죽어. 이리스의 어머니도 그래서 죽은 것 같아.”
내가 하는 말에 라우라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문이 막혀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에 책임감을 느끼는지 굉장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리스가 들었더라면 큰 충격을 받을만한 말이긴 하지.
“내가 잠을 설칠만한 일이지?”
“네. 정말 심각한 일이네요. 그런데 왜 이리스에게 그런 무서운 것을 물려줬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더 무서운 일을 막기 위해서 본인의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까싶어.”
“왠지 남일 같지가 않네요.”
“이리와 안아줄게.”
나는 라우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축 쳐졌던 그녀의 꼬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레베카님, 식당은 문을 열었는데 9시 40분까지만 손님을 받는다고 해요.”
“그래? 생각보다 늦게까지 아침식사를 주네.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나는 우선 보고할 내용이 잔뜩 적힌 약도부터 챙겼다.
오늘은 도시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마력권총만 허리에 찼다.
그리고 라우라는 마력권총에다가 기사의 검으로 무장했다.
그녀는 검을 선물 받은 이후로 항상 차고 다니면서 만족감을 드러내곤 했다.
이리스는 내 마력권총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레베카님은 혹시 기사님이세요?”
“아니. 저번에 기사단의 작전을 도와주고 포상으로 받은 거야. 라우라도 그렇고.”
“아! 그 용감한 모험가가 바로 레베카님이셨군요! 지금 도시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어요.”
이리스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우러러보았다.
그녀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추켜세워지는 건 어제에 이어서 두 번째다.
물론 어제는 금방 취소를 당했지만 말이다.
“그 날 있었던 일이 소문이 났다고?”
“네. 어느 모험가가 기사단을 도와서 비밀은신처에 숨어있던 갱단보스들을 토벌했다는 내용이에요.”
“그래? 음... 그렇구나.”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이 상급마물이 슬럼가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진실과 다른 내용으로 포장된 무용담을 퍼뜨린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자존심 때문에 상급마물과 싸웠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녀서 높으신 분들을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보상은 제대로 받았으니 그냥 조용히 살아야겠다.
물론 정식으로 이리스의 주인이 된다면 그녀에게 그날의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거다.
외출준비를 끝낸 우리는 객실을 나와서 호텔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바로 모험가길드로 향했다.
호텔에서 모험가길드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라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리가 모험가길드로 들어서자 엠마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는 모습부터 보였다.
그녀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점이다.
추운 겨울아침도 따뜻하게 녹이는 미소라고나 할까?
나중에 그녀에게 애인이 생기면 조금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어서 오세요, 레베카 씨.”
“안녕하세요, 엠마 씨. 오늘은 보고서를 제출하려고 왔어요.”
나는 온갖 정보가 적혀있는 약도를 엠마에게 넘겨주었다.
엠마는 그걸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심각한 표정과 함께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마족에게 팔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엠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용의 파급력은 대단해서 거의 모든 모험가들의 이목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네, 저희들이 직접 목격했어요.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이 끌고 온 사람들을 맹금족에게 넘기는 대가로 상자 같은 걸 받아가더라고요. 요새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잡혀있고요.”
“굉장히 심각한 일이네요. 일단 레베카 씨의 보고서는 담당자가 다시 정리해서 상부로 보고를 올릴 거예요. 아마 기사단에게도 보고가 올라가겠죠.”
“제 승급은 어떻게 되나요?”
“그건 걱정 마세요. 상황의 심각성과 승급은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다행이네요. 붙잡힌 사람들이 최대한 빨리 구조되면 좋겠어요.”
“길드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엠마의 말처럼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구조대를 결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물갈이가 되고나니 이제야 좀 모험가길드다운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레베카씨, 오늘은 의뢰를 수주하실 건가요?”
“아니요. 오늘은 할 일이 좀 있어서 내일이나 모레에 다시 찾아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의뢰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승급이 대가니까 나름 열심히 해봤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엠마와 작별하고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라우라와 이리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곤 둘을 데리고 지하에 있는 사격연습장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로가 딱 하나만 비어있었다.
어차피 이리스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공간이 부족해도 상관없다.
“이리스, 여기선 내 전투노예인 척을 해. 알았지?”
“네, 레베카님.”
이리스는 내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바로 알아듣고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원래 길드의 사격연습장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모험가와 모험가의 전투노예 뿐이다.
그래서 빌려온 노예이자 가사노예인 이리스는 규정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안전요원을 적당한 거짓말로 속여 넘기고 이리스에게 고글과 마력소총을 쥐어주었다.
전부 총을 들고 다니는 곳에서 난동을 피울 미친놈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 깔려있으니 이런 쪽의 보안이 허술한 게 아닐까 싶다.
준비를 끝내고 정해진 사로로 들어간 이리스는 능숙한 솜씨로 총기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순식간에 장전을 마쳤다.
그런 이리스를 보고 있던 안전요원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예전에 내가 사격을 했을 때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그녀에게 했다.
“난이도는 상으로 할까?”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부탁드립니다.”
“최상으로? 여태까지 아무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괜찮겠어?”
“네.”
“좋아. 실력을 뽐내보도록 해.”
이리스는 여태까지 우리에게 보였던 소심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로에서 연습을 하던 사람들도 이리스에 대한 소식을 듣더니 모두 사격을 멈추고 이리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난이도 최상의 사격훈련이 시작되었다.
표적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거나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런 것들이 동시에 여러 개씩 나타나거나 쏘면 안 될 것까지 튀어나와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만약 내가 저 난이도를 도전했더라면 표적지를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엄청나게 헤맸을 것 같다.
하지만 이리스는 왼쪽 눈으로 조준하며 침착하게 사격을 개시했고 틈틈이 빠른 속도로 재장전을 하면서 쉬지 않고 나타나는 표적지를 상대했다.
거의 1분 가까이 이어지는 정신없는 사격훈련을 끝마친 이리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첫 시도 만에 통과할 줄이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믿기지가 않아.”
“우리 이리스가 바로 통과라고요?”
“네. 워낙에 표적지를 맞추기 어려운 훈련이라서 60%만 명중시켜도 통과인데 70%나 되는 표적지를 맞췄고 그것도 대부분 정중앙을 명중시켰어요. 정말 대단한 전투노예를 구입하셨군요.”
“사실은 임대에요. 이걸로 확실하게 구입할 이유가 생겼네요. 협조해주셔서 고마워요.”
“나 참, 역시 저를 속이셨군요. 그래도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이번 한 번만 눈 감아드릴게요. 대신에 두 번은 없으니 명심하세요.”
“네, 명심할게요.”
나는 안전요원에게 윙크를 날려주고는 사로에서 나와 고글과 마력소총을 반납한 이리스에게 다가갔다.
이리스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숨소리가 살짝 거칠었고 하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있었다.
“이리스, 너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널 만난 건 내게 있어서 정말 큰 행운이야.”
“감사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총을 쏴서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아직은 실력이 녹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오른쪽 눈이 멀쩡했더라면 더 잘 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워요.”
이리스는 안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금 그게 전력이 아니라니 안전요원이 들으면 놀라서 까무러칠 것 같다.
“평소랑 다르게 총을 쐈는데도 그 정도라고?”
“네, 아버지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왼쪽 눈으로도 사격연습을 많이 시키셨어요.”
“그렇구나. 이렇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네 실력을 확인했으니 다음 목적지로 가자.”
이리스는 칭찬을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여기서 더 대화를 하면 또 슬픈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리스의 아버지는 ‘만일의 사태’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단 말이야.
이리스의 어머니도 그렇고 뭔가 더 큰 비밀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레베카님, 이리스가 우리와 함께하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리스가 예쁘고 몸매도 좋으니까 레베카님의 계획에 딱 들어맞는 인재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법무기점에 가기 전에 노예시장에 들러서 정식으로 구매계약을 맺도록 해야겠어.”
내 말을 들은 이리스는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보였고 라우라도 기뻐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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