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4화
* * *
나는 노예시장을 나오면서 이리스에게 내 외투를 입혀주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추운 겨울밤에 그냥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바로 호텔로 들어가서 룸서비스를 시키려다가 옆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식당 안으로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 들어갔고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라우라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와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리스는 비어있는 우리의 맞은편에 앉지 않고 쭈뼛쭈뼛 서있었다.
“이리스, 왜 그러니?”
“레베카님, 제가 감히 동석을 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 그래야 같이 밥을 먹지.”
“하지만 저는 노예잖아요.”
이리스는 처음 만났을 때의 라우라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라우라는 본인이 노예라도 거리낌 없이 나랑 같이 앉아서 식사를 했는데 이리스는 본인의 신분을 강하게 의식했다.
보통 이리스 같은 태도가 일반적이고 라우라가 특이한 경우겠지.
“노예라면 임시라곤 해도 주인의 말을 잘 들어야지. 얼른 앉아.”
“죄송합니다, 레베카님.”
내 명령을 받은 이리스는 몹시 어색함을 느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주변의 눈치를 엄청 살폈지만 우리에게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여자종업원을 비롯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얘들아, 우리 뭐 먹을까?”
“날도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요리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전골은 어떠세요?”
“좋지. 마침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리스, 너는 어떠니?”
내 질문을 받은 이리스는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면서 쉽사리 답변을 못하자 보다 못한 라우라가 나섰다.
“레베카님, 제가 이리스에게 몇 마디해도 될까요?”
“그래.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해.”
“이리스, 레베카님께서 제안을 하시면 성의껏 대답하도록 해. 네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레베카님께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어? 우리 같은 하찮은 노예에게도 기꺼이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니까 그 선의에 제대로 응하도록 해. 알았지?”
“네, 라우라 씨. 제 잘못된 태도를 고치도록 할게요.”
이리스는 라우라의 말을 듣고는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졌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라우라의 진지한 표정은 흡사 엄격한 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라우라의 교육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이리스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자, 이리스. 뭐가 먹고 싶니?”
“저는 칼국수가 먹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 김치전골을 시키고 국수사리를 넣어먹자. 둘 다 괜찮지?”
내 제안에 라우라와 이리스는 적극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라우라의 말 몇 마디에 용기를 내서 태도를 바꿔가는 이리스가 대견하다.
‘여기서도 김치전골이라니 뭔가 웃기네.’
내 설정에 따라서 아르카디아는 예전 세상의 온갖 음식들이 다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사먹을 기회가 없는 음식을 가상현실에서라도 즐기고 싶어서 그런 설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풍요로운 땅이 제공하는 다양한 식재료와 각종 보존마법 덕분에 이 추운 겨울에도 현대문명 수준에 가까운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낯선 세계의 식탁에 국수사리가 들어간 매콤한 김치전골과 계란찜을 비롯한 각종 밑반찬이 올라오는 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만약 생판 다른 식문화를 가진 세계로 설정했거나 아예 관련 설정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꽤나 힘든 식생활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음식은 익숙한 게 최고라는 말이 틀린 게 아닌 것 같아.’
나는 라우라가 접시에 덜어준 전골의 얼큰한 국물을 맛보면서 귀염둥이들을 관찰했다.
라우라는 언제나처럼 먹방을 찍으면 엄청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정도로 잘 먹었다.
반면에 이리스는 음식을 식탁에 흘리는 일이 없도록 조금씩만 입에 넣어 조용히 오물오물 씹어 먹고 수시로 입을 닦아 청결을 유지했다.
이리스를 보고 있으니 문득 베로니카가 음식을 먹던 모습이 생각난다.
베로니카의 귀족적인 예절이 일부나마 이리스에게서도 느껴졌다.
나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리스, 혹시 귀족출신이니?”
“아니요. 집안 대대로 평민이었어요.”
“식사예절이 귀족 같아서 물어봤어. 어디서 배웠어?”
“제가 어릴 때 가족들이 귀족의 저택에서 생활했었어요. 아버지는 숲지기를 하셨고 어머니는 하녀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반강제로 배우게 되었어요.”
“그렇구나. 숲지기는 어떤 일을 하니?”
“귀족이 소유한 숲을 관리하는 일을 해요. 무단침입자를 단속하거나 사냥감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맹수를 쫓아내죠. 아버지는 원래 마을에서 유명한 사냥꾼이셨는데 우연히 귀족의 눈에 들어서 고용되셨어요.”
“그럼 총을 잘 쏘시는 분이셨겠네?”
“네! 사격실력만큼은 기사님들보다 훨씬 뛰어나셨어요! 그래서 저도 아버지로부터 총 쏘는 법을 배웠고 같이 사냥도 많이 했었어요. 지금도 사냥은 자신이 있고요.”
이리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났는지 표정이 밝아졌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역시 사람은 웃어야 아름다운 법이다.
“들어보니 너에게 마안이 있는 게 우연은 아닌 것 같네.”
“마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어요. 하지만 어머니도 저처럼 통제를 못하셔서 안대를 쓰셨어요.”
“난 네가 마안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 우리 파티에 저격수가 필요하거든.”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네 탓하는 게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그런데 어쩌다 노예가 된 거니? 부모님이 두 분 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할 정도면 안정적인 삶이었을 텐데.”
내 질문에 이리스는 갑자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하여튼 나는 이놈의 주둥아리가 문제다.
이런 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큰 실수를 해버렸다.
그런데도 이리스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내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작년에 아버지가 누명을 쓰시는 바람에 처형당하시고 어머니와 저는 노예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도 다음날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라우라 정도는 아니어도 부모님을 비참하고 허망하게 잃어버렸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유감을 표하기 전에 계속 이어지는 이리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전 그때부터 마안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팔리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지금의 주인님이 저를 구입하신 뒤로는 계속 그 가게에서 청소랑 빨래만 했어요. 그러다 오늘 레베카님을 만나 뵙게 된 거예요.”
아무도 사가지 않는 노예는 결국 검투경기장에 팔려가서 죽게 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그 다크엘프 아줌마는 이리스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다.
어쩌면 보기보다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분위기만 망쳤네요.”
“아니야. 말하기 힘든 일인데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는 손을 뻗어서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이리스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라우라는 동질감 때문에 아예 눈물까지 훔치고 있었는데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여자들이 둘 다 부모님을 눈앞에서 잃었다고 생각하니 착잡하다.
더 우울한 기분이 들기 전에 얼른 분위기를 바꿔야겠어.
“그럼 마저 식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자. 너희들 당연히 볶음밥도 먹을 거지?”
“네, 레베카님.”
나는 두 사람의 대답을 동시에 듣고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식사를 이어가다가 지나가는 남자종업원을 붙잡고 남은 전골로 볶음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미소에 푹 빠졌는지 수시로 날 바라보며 설레는 가슴을 쉽사리 진정시킬 못했다.
‘미안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다.’
나는 행동이 제법 귀여운 종업원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그가 만들어준 맛있는 볶음밥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말 그대로 배가 터질듯이 먹은 우리들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식당을 나와서 호텔로 들어갔다.
이리스는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먹어본 적은 처음이라며 웃었고 라우라는 앞으로 그럴 일이 많을 거라고 말했다.
라우라는 결국은 내가 이리스를 구입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난 그녀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이리스의 외모와 몸매는 이미 내가 정한 합격선을 훨씬 넘어버린 지 오래였고 그녀가 나에게 보이는 사근사근한 태도도 마음에 든다.
거기다 사정이 딱하니 동정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섣불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쁘고 착하고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노예를 살 수는 없다.
내가 노예를 사는 목적은 파티의 전투원을 늘리고 예속퀘스트를 통해서 특수스킬을 얻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하렘의 일원을 수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리스가 뛰어난 사냥꾼인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았고, 직접 사냥꾼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고, 스스로 실력을 자부하니 직접 실력을 확인해서 구입여부를 결정해야겠다.
‘어차피 내일 모험가길드에 가서 보고를 해야 하니까 그때 사격훈련장에 들르면 되겠다. 그나저나 노예를 임대해도 상세개인정보창을 볼 수 없는 건 불편하네.’
나는 임대를 하면 상세개인정보창을 볼 수 있거나 최소한 제한적인 열람은 가능할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확실하게 내 소유가 되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대체 왜 이런 무의미한 제한이 존재하는 건지 모르겠다.
“레베카님.”
“응?”
“이리스는 어디서 자게 하실 건가요?”
“아, 맞다. 방에 침대가 부족하겠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나는 호텔 로비에 있는 접수처로 가서 객실에 침대를 하나 더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보통은 사람이 추가되면 그만큼 돈을 더 받지만 내가 장기투숙객이고 이리스가 딱 사흘만 머무른다는 말에 흔쾌히 무료로 서비스를 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일이거나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침대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객실로 올라갔다.
오늘 새벽에 떠났다가 밤에 와서 그런지 며칠 만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나 먼저 씻을게.”
“네, 레베카님. 침대는 제가 받아둘게요.”
“부탁할게.”
나는 일단 샤워부터 했다.
하루 종일 추운 바깥에 있었더니 전신을 따뜻한 물로 녹이고 싶은 충동이 대단했다.
나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온수가 주는 안도감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고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를 팝송을 중얼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다 씻고 나오니 부탁했던 침대가 객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 작은 1인용 침대는 원래 객실에 있던 침대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놓여있었는데 나는 그냥 두 침대를 붙여서 이리스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이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레베카님, 혹시 제게 봉사를 원하시는 건가요?”
“응? 무슨 봉사? 아, 그거? 걱정 마. 네 원래 주인이 섹스금지를 조건으로 걸었었잖아. 계약은 지켜야지.”
“감사합니다. 아직 처녀라서 그런 게 좀 무섭거든요.”
“만약에 내가 널 구입하더라도 너랑 합의를 하지 않고 강제로 섹스를 하는 일은 없어. 그리고 노예라고 함부로 대할 생각도 전혀 없고. 나의 그런 점은 꼭 기억해주면 좋겠어.”
“레베카님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세요. 꼭 제 아버지처럼 느껴져요.”
“그것 참 영광인 걸? 칭찬해줘서 고마워.”
나는 원래 세상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태도로 과도한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느껴지다는 말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리스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함께하는 사흘 동안은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리스, 같이 씻자.”
“네, 라우라 씨. 헉!”
이리스는 벌거벗은 라우라의 화려한 예속각인을 보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나를 보면서 아버지처럼 느껴진다는 말은 취소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난 그 정도의 극찬을 받을만한 인간이 아니란다.
“오해하지 마. 이건 사랑의 징표야. 그렇죠? 레베카님?”
“그, 그렇지. 아하하.”
라우라는 예속각인을 야릇하게 쓰다듬으며 나를 변호해줬다.
이리스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봐서는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라우라 씨는 레베카님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라우라는 나를 향해서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눈빛을 보내며 미소를 짓고는 아직 옷을 벗지 않은 이리스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욕실 안에서 꺅꺅하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에 문이 슬쩍 열리더니 이리스가 입고 있던 옷과 속옷 그리고 팔찌 형태인 마법방어구가 밖으로 던져졌다.
전투노예도 아니고 가사노예가 마법방어구를 차고 있는 건 처음 봤다.
어쩐지 가게 안에서 그런 옷을 입고 있어도 하나도 안 추워하더라니.
그래도 추운 겨울밤은 체온유지기능에만 의존할 수 없으니 이리스에게 외투를 양보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바닥에 있는 마법방어구를 손에 들고 분석스킬을 써봤다.
이름은 무려 ‘저주받은 모계혈통의 마법방어구’이고 품질은 A등급이다.
마법방어구답게 방어막전개와 체온유지기능이 있고 착용자귀속이라는 특징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 마법방어구는 착용자가 죽을 때까지 귀속되고 착용자가 원한다면 직계혈통의 여성에게 상속하여 귀속에서 해방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게 파괴되면 귀속 대상이 즉사하고, 상속으로 귀속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24시간 안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착용자의 마안을 통제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이다.
즉, 이리스는 이 요사스러운 마법방어구 때문에 안대를 써야하는 것이다.
나 참, 이리스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이렇게 간단하게 찾아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건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는 게 골치가 아프다.
내일 칼스란 아저씨네 가게로 가서 안전하게 귀속을 해제할 방법을 물어봐야겠다.
“레베카님, 제 팔찌 못 보셨나요?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미안. 내가 잠깐 보고 있었어. 자, 여기.”
나는 갑자기 욕실 문을 열고 애타게 팔찌를 찾는 이리스에게 일단 그것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팔찌를 손목에 차고 욕실의 문을 닫고 들어갔다.
저렇게 유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진실을 전하려니 벌써부터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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