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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33화 (33/271)

〈 33화 〉 32화

* * *

새로 잡은 숙소는 신시가지의 상업구역에 위치한 5층짜리 호텔이다.

나는 당분간 프랑카에서 지내면서 장기적인 여행계획을 세우고 간간히 의뢰를 수행하면서 모험가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지려고 한다.

그래서 1박에 몇 천 라기르에서 몇 만 라기르까지 요구하는 고급호텔 대신 한 달 장기투숙에 10%할인으로 9천 라기르를 받는 호텔로 결정했다.

물론 한 달을 다 채울 생각은 없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프랑카를 떠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객실은 이 호텔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이다.

꼭대기 층이라서 햇빛이 아주 잘 들고 하늘도 잘 보였다.

모든 허드렛일은 호텔 측에서 알아서 다 해주기 때문에 라우라가 손에 물을 묻힐 일은 아예 없을 것이다.

나는 숙소를 구한 뒤에 바로 라우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방한복을 비롯한 의뢰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객실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이른 새벽에 호텔에서 나와 일출을 보면서 우리를 태워줄 마부를 물색했다.

고맙게도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며 공짜로 우리를 태워주는 마부가 있었다.

도시성벽 밖의 포장되지 않은 도로는 곳곳이 매섭게 추운 날씨 때문에 꽁꽁 얼어붙어있었지만 마부의 실력 덕분에 무사히 산의 초입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친절을 베풀어준 마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면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지. 그런데 산에 눈이 제법 많아 보이네.’

나는 꽤나 높아 보이는 눈 덮인 산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쪽은 눈이 별로 없었지만 중턱부터는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우라가 겨울산행경험이 풍부해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레베카님, 항상 발밑을 조심하세요. 마법방어구의 체온조절기능을 너무 맹신하지 마시고,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알았어.”

“그럼 출발할게요.”

나는 앞장서는 라우라의 뒤를 따라서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산과 숲은 굉장히 위험한 곳인 만큼 주변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산속이 워낙 조용한 탓에 고작 토끼가 뛰어가는 소리에도 놀라고 말았다.

사람 말고 동물이나 마족도 추적할 수 있는 스킬을 얼른 얻었으면 좋겠다.

라우라가 전직 현상금사냥꾼이라서 예속퀘스트로 인류추적스킬을 얻었으니까 사냥꾼과 모험가 출신인 노예를 구입해서 예속퀘스트를 진행하면 분명 내가 원하는 스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노예를 살 때는 그런 부분을 미리 알아본 뒤에 신중하게 골라야할 것 같다.

‘라우라를 구입했을 땐 정말 운이 좋았어. 마치 튜토리얼 캐릭터라도 지급받은 수준이었지. 그런데 라우라는 지도창도 없으면서 진짜 길을 잘 찾는구나.’

나는 올라가면서 종종 지도창을 열어서 경로를 확인했는데 라우라는 거의 그 경로를 따라서 움직였다.

주변에 물음표가 몇 군데 있었지만 오늘은 한 눈을 팔면 안 되는 날이라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만약 이게 진짜 게임이었다면 퀘스트를 하기 전에 물음표 지역부터 싹 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다 보니 중요하지 않은 것은 미련이 있든 없든 넘어가게 되었다.

‘물음표 지역을 전부 확인하면 어떤 이득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는 없지. 아, 이제 눈이 제법 많네.’

산의 초입부터 중턱까지는 완만한 경사가 유지되어서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발에 설피를 신어야 갈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많다.

나는 설피에다가 등산스틱까지 손에 들었지만 걸핏하면 넘어져서 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반면에 라우라는 눈표범족 아니랄까봐 눈밭이 아주 자기세상이었다.

절대로 넘어지거나 휘청거리는 일이 없었고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워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게다가 길이 애매하다 싶으면 바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주변을 살피고 절벽이 나타나면 먼저 암벽등반을 해서 올라간 다음에 밧줄을 내려주었다.

내가 낑낑거리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갈 때는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거나 아예 다시 내려와서 날 밀어주었다.

나는 계속 도움만 받아서 부끄러울 지경이었지만 라우라는 싫은 내색은커녕 항상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는 안 돼. 대책이 필요하다.

“라우라, 다음에 시간나면 나한테 나무타기랑 암벽등반을 가르쳐줄래?”

“물론이죠!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드릴게요. 그리고 우리 조금 쉬었다가요.”

“벌써? 난 괜찮아.”

“앞으로 길이 더 험해질 것 같아서 미리 휴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쉬어가자.”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장작을 모아올게요.”

나는 근처에 있는 바위의 눈을 대충 치우고 걸터앉았다.

방한복과 마법방어구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엄청 추워서 애를 먹고 있었을 거다.

나는 처음에는 체온유지기능이 있으면 방한복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우라의 말에 따르면 체온유지기능는 가혹한 날씨 앞에서는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겨울등산을 하려면 방한복이 필수라고 한다.

평소에는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다녔었는데 갑자기 두껍고 불편한 옷을 입으려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만족하고 있다.

“레베카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해.”

생각보다 금방 장작을 모아온 라우라는 능숙한 솜씨로 눈을 치우고 불을 피웠다.

불 피우기는 모험가의 필수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것도 라우라에게 배워야겠다.

“라우라, 불 피우는 것도 가르쳐 줘.”

“오늘 레베카님의 학구열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신뢰를 드리는 것 같아서 기뻐요.”

“어디 가서 불도 못 피우는 허접한 모험가라는 소리를 들으면 너한테 부끄럽잖아.”

“그럼 그런 소리 듣지 않도록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라우라는 모닥불 위에 냄비를 올리고 눈을 넣어서 물을 끓이는 와중에 내게 불을 피우는 방법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지식을 확실하게 배우고 실천에 옮기니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싯돌을 이용해 모닥불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아직 마른장작을 구해오는 일이나 불쏘시개를 다루는 법은 서툴렀지만 이제부터 차차 경험을 쌓으면 되는 일이다.

“다음에는 부싯돌이 없을 때 불을 붙이는 방법들을 가르쳐드릴게요. 여기 커피 드세요.”

“고마워. 음... 향 좋다. 역시 네가 타주는 커피는 최고야.”

“정작 커피는 마시지도 못하는데 말이죠. 후훗.”

“먹는 건 잘 먹는데 요리도 못하고 말이지.”

“레베카님!”

“푸흡! 장난이야. 넌 발끈할 때도 엄청 귀엽더라.”

나는 라우라의 반응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가 산이라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끝났지 호텔이었다면 바로 침대로 데려갔을 것이다.

“레베카님은 가끔씩 남자아이들처럼 짓궂을 때가 있으세요.”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장난칠 때 말고도 평소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전생에 남자였을 것 같아요.”

난 순간 커피를 뿜을 뻔 했다가 겨우 삼키고 켁켁거렸다.

어째서 라우라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걸까?

라우라는 가볍게 하는 말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완전히 정곡을 찌르는 수준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 그런데 내가 남자 같은 게 싫은 거야?”

“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오히려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저랑 같은 여자인데도 이렇게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몰라요.”

“내 철없는 모습도 좋아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네 덕분에 따뜻한 걸 마시니까 기운이 나는 것 같아.”

“따뜻한 마실 것은 사기가 충전되고 수분도 보충할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 조금만 더 쉬었다가 바로 출발하도록 해요. 산에서는 해가 더 빨리 지거든요.”

우리는 라우라의 제안대로 잠시 더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각자의 머그컵이 비어버리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우라는 남은 물로 모닥불을 끄고 발로 검게 탄 장작들을 흩어놓은 다음 눈으로 덮어서 흔적을 지웠다.

‘저런 모습도 보고 배워야겠어. 후우, 그럼 다시 출발해보자.’

나는 다시 앞장서는 라우라를 따라서 좀 더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오르는 산은 갈수록 경사가 심해져서 나 같은 등산초보 입장에선 절대로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았던 눈이 점점 더 많아져서 라우라의 움직임도 그만큼 느려졌다.

이런 상태로 적의 습격을 받으면 제대로 피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할 것 같다.

마법방어구가 사람은 몰라도 마족이나 맹수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작동해서 다행이다.

나는 어제 A등급 품질을 가진 마법방어구들을 여러 개 구입했다.

오거가 온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몽둥이를 맞아도 한 번을 버틸 수 있다고 하니 성능은 확실할 것이다.

내가 기존에 사용하던 것은 대신해서 팔찌 2개와 목걸이를 착용했고 라우라에게는 팔찌 2개와 쵸커를 새로 장만해주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3개가 가장 효율적이고 그 이상은 낭비라는 조언을 듣고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조용히 길을 걸었지만 나는 결국 심심함을 참질 못하고 라우라에게 말을 걸었다.

“라우라, 내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마법방어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마족에게 죽는 사람들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레베카님이나 저처럼 마력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몰라도 대부분의 마력을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겐 마법무기나 마법방어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렇다면 모험가는 전부 마력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네?”

“맞아요. 간혹 마력을 쓸 수 없어도 모험가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기존의 방어구는 마법방어구보다 성능이 한참 떨어지니 금방 죽거나 부상을 입고 은퇴해버려요.”

내 생각보다 모험가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모험가는 단순히 의뢰로 생업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력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런 위험한 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갱단은 아무나 다 마력총을 쓰는 것 같던데 그건 왜 그런 거야?”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는 천사의 마법술식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구조라서 그냥 있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마법술식이 개발되고 그걸 기반으로 마력총이 만들어서 아무나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렇구나. 인간의 마법술식을 마법방어구에도 적용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게 개발된 지 30년이 넘도록 마력총을 제외하면 성공한 사례가 단 하나도 없다고 해요. 그래서 마력총의 발명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들 해요.”

이건 내가 총이 있는 판타지 세상을 골라서 생긴 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천사의 마법술식은 뭐가 문제라서 마법방어구를 애매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걸까?

“라우라, 마법방어구가 좀 이상한 것도 천사의 마법술식 때문이야?”

“앞서 말씀드렸듯이 천사의 마법술식은 있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원하는 기능을 내려고 여러 가지 마법술식을 섞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요. 마법방어구는 개선하고 싶어도 완성된 마법술식을 건드릴 때마다 악화되어서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고 해요.”

이제야 마법방어구가 이상한 이유를 알겠네.

별 것 아닌데 속이 다 시원했다.

앞으로는 불만 없이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마법갑옷은 기적처럼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창조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마법갑옷이 완성되면 성직자들이 축성을 해줘요.”

“그것 참 신기한 일이네. 나 같아도 축복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런데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좀 지치네.”

“그럼 우리 저기까지만 올라가서 쉬기로 해요.”

라우라는 나를 데리고 사방이 가파른 와중에 유일하게 평평한 곳으로 올라갔다.

나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지도창을 확인했는데 처음 쉬었던 곳에서 제법 많이 걸어왔다.

이 속도라면 오늘 안에 정찰을 끝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레베카님, 커피에요.”

“고마워.”

라우라는 이번에도 날 위해서 모닥불을 피우고 커피를 타주었다.

지친 기색 하나도 없이 뭐든지 척척 해내는 모습이 정말 믿음직스럽다.

돌아가면 상을 줘야겠어.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산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연기 같은 게 피어올라서 깜짝 놀랐다.

요새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라우라! 저기에!”

“레베카님도 연기를 보셨나요?”

“응. 마족일까? 사람은 아니겠지?”

“아마도 야수족이나 맹금족일 거예요. 나머지는 저렇게 추운 곳에서 터를 잡고 살 수 없으니까요.”

“맹금족이라...”

맹금족은 인간 남성의 몸에 맹금류의 머리와 다리가 붙어있고 깃털로 뒤덮인 모습을 가진 마족이다.

팔은 얼핏 날개처럼 생겼지만 인간과 비슷한 형태로 움직이는 손이 달려있고 다리처럼 비늘로 덮여있다.

비행은 불가능하지만 날개 같은 팔과 꽁지깃으로 제한적인 활강이 가능해서 높은 지대에서 사는 걸 선호한다.

비슷한 스타일인 야수족보다는 힘이 약하지만 보다 지능적이고 시력이 월등히 뛰어나서 더 위험한 편이다.

“진짜 맹금족이 차지하고 있으면 밤이 되기 전에 일을 끝내거나 바로 돌아가도록 하자.”

“네, 레베카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맹금족 중에서 부엉이나 올빼미 머리가 달려있는 놈들은 뛰어난 야간시력을 가지고 있고 굉장히 조용히 움직이기 때문에 밤이 되면 무조건 피하는 게 좋다.

“혹시 모르니 불을 끄고 숨자.”

네 지시를 받은 라우라는 서둘러 모닥불을 끄고 뒷정리를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수풀 뒤에 숨은 채 햇빛에 망원경의 렌즈가 반사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요새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그냥 차가운 돌덩이만 보였지만 요새 위로 커다란 맹금류대가리들이 눈에 띄었고 요새 근처에서 활강을 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놈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다행히 놈들은 그 뛰어난 시력으로도 우리가 피운 모닥불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라우라, 요새에 맹금족이 제법 많아. 가까이서 정찰하는 건 위험할 것 같으니 요새가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봉우리에서 정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오늘은 이미 오후 2시가 넘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고 내일 저 봉우리를 목표로 올라가자.”

내가 정한 방침에 라우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짐을 챙기며 하산을 준비했다.

투자한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굳이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하산했고 프랑카까지는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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