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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32화 (32/271)

〈 32화 〉 31화

* * *

우리가 베로니카와 거하게 술을 마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오전에 그녀의 저택에서 나왔다.

이미 받아야할 것은 다 받았고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슬슬 모험가다운 일을 다시 하고 싶어졌다.

내가 모험가가 된 이후로 의뢰를 수행한 것은 겨우 두 차례에 지나지 않아서 좀 더 많은 의뢰를 경험해보고 싶다.

베로니카는 우리를 직접 배웅해주겠다며, 우리가 처음 저택에 왔을 때처럼 대문 앞까지 나와 주었다.

“레베카, 그대가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소. 만약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찾아오시오.”

“그동안 저희들을 잘 대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마웠소. 잘 가시오. 창조신께서 그대의 여행길을 지켜주시기를.”

“베로니카님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베로니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라우라도 나를 따라서 인사했다.

베로니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든 나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고 나도 좋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베로니카의 저택을 등지고 모험가길드로 향했다.

20여일 만에 다시 방문한 모험가길드는 분위기가 좀 달라진 상태였다.

이 시간이면 서로 좋은 의뢰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오늘은 다들 얌전히 본인들에게 어울리는 의뢰를 찾고 있었다.

그 사이에 길드의 정책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어색함을 느끼며 오늘도 귀여운 접수원 엠마에게 다가갔다.

엠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함박미소를 지었다.

“레베카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어요. 갱단이 길드에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나요?”

“전임 길드장이 기사단에 의해서 체포되는 바람에 소란이 벌어지기는 했었지만 그것 말고는 별 탈 없었어요.”

“체포요? 설마 갱단이랑 협상을 맺은 것 때문인가요?”

“3대 갱단에게 뇌물과 향응을 받고 자격이 없는 갱단원들을 길드에 받아들여서 사익을 취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저께 갱단보스들과 같이 처형당했어요.”

어쩐지 모험가길드가 슬럼가의 갱단들과 협상을 한 것부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니까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거라고.

“길드의 분위기가 바뀐 이유가 있었네요.”

“네, 새로운 길드장님께서 길드의 갱단원들을 전부 색출해서 기사단에 고발하고 다른 부적격자들도 싹 추방하셨거든요. 덕분에 저 같은 접수원들이 아주 편해졌어요.”

“더 이상 찰스 같은 놈들이 엠마 씨를 괴롭힐 일이 없어져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엠마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내게 묘한 눈빛을 보내왔다.

일단 난 아직 라우라말고 다른 여자랑 잘 생각은 특별히 없다.

저번에 베로니카가 술에 완전히 취해서 나를 유혹했을 때도 끝까지 참아냈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라우라가 눈에서 불을 켜고 상황을 주시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내 정신 좀 봐. 저번에 레베카 씨가 E급 펜던트 4개와 D급 펜던트 1개를 회수해주신 것에 대한 보상으로 9천 라기르가 나왔어요. 받으세요.”

“고마워요.”

나는 엠마에게서 작은 동전주머니를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E급 펜던트는 개당 1천 라기르라고 했으니 D급 펜던트는 개당 5천 라기르의 보상금이 나오는 셈이다.

예전 같으면 쉽게 돈을 벌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을 텐데 재산이 130만 라기르쯤 되니까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죽은 모험가분들의 펜던트를 발견하시면 꼭 회수해주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신임 길드장님께서 길드규정을 몇 가지 바꾸셨는데 딱 하나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길드원 사이의 폭력은 정당방위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는 거예요.”

“그럼 여태까지는 그냥 막 때려도 상관없었다는 거군요.”

“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임 길드장이 있었을 때의 우리 지부는 거의 갱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봐요.”

“그런 무책임한 사람이 책임자로 있으면 여러 사람 피곤해지죠.”

“그러게요. 신세한탄이나 해서 죄송해요. 오늘은 의뢰를 받으실 건가요?”

“저번에 좋은 의뢰를 추천해주신다고 하셨죠?”

“마침 며칠 전에 그런 의뢰가 들어온 참이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엠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수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자동적으로 흔들리는 동그란 엉덩이가 꽤나 매력적이다.

난 머릿속으로 저 섹시한 엉덩이를 찰쌀 때리는 상상을 하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레베카 씨, 의뢰서를 가져왔어요. 잠깐 사이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그냥 혼자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어떤 의뢰인가요?”

“짜잔! 다름 아닌 ‘승급의뢰’에요. 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시면 실적과 관계없이 바로 D등급 모험가가 되실 수 있어요.”

엠마는 좋은 의뢰를 주기로 했었던 약속을 지켰다.

내가 알기론 모험가가 승급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속한 등급에 속하는 의뢰를 수십 번은 성공적으로 완수해서 실적을 쌓아야한다.

그래서 변변찮은 실력으로는 제대로 실적을 쌓지 못해서 평생 승급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승급의뢰라면 나는 총합 3번의 E급 의뢰를 달성하는 것만으로 D급 모험가가 될 수 있다.

당장 돈이 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당 1천 라기르의 의뢰완수금이 5천 라기르로 단번에 오르는 건 큰 이득이다.

“그거 정말 좋은 의뢰네요. 의뢰내용은 어떤가요?”

“목표지역을 정찰하고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의뢰에요. 기한은 착수일로부터 일주일이에요. 이 약도를 챙겨가세요.”

엠마가 약도를 넘겨주자마자 내 지도창에 정보가 갱신되었고 목표지역의 하얀색 물음표가 빛나는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빨간색 물음표는 메인퀘스트 같은 것이었으니 파란색 물음표는 일종의 서브퀘스트일까? 아무튼 평범한 의뢰가 될 것 같지는 않네.’

나는 물음표의 색이 바뀌니 괜히 긴장되었다.

만약 특별한 일은 없더라도 목표지역은 프랑카에서 10km정도 떨어져있는 산꼭대기에 위치해있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야겠다.

“주의사항은 있나요?”

“오래 전에 버려진 요새라서 마족이나 다른 위험한 생물들이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해주세요.”

“네, 조심할게요. 그런데 보고서는 어떤 식으로 작성하면 될까요?”

“레베카님이 정찰을 통해서 얻으신 정보를 그대로 약도에 써서 제출하시면 돼요. 나머지는 담당자가 알아서할 텐데, 경우에 따라서는 길드 측에서 레베카님을 직접 불러서 질문을 드릴 수도 있어요.”

“제가 직접 문서작업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들어보니 의뢰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좀 걸릴 것처럼 들리네요.”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하루 만에 결론이 나올 거예요. 길어도 사흘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자체적인 휴가를 보내도 될 것 같네요. 좋은 의뢰를 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저는 가서 준비를 좀 해야겠어요. 다음에 봐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오늘도 엠마는 사람 좋은 미소로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엠마를 뒤로하고 라우라와 함께 모험가길드에서 나왔다.

일단 숙소를 먼저 구하고난 뒤에 의뢰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야겠다.

“레베카님, 길드숙소는 사용하지 않으시나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그리고 널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고.”

모험가길드는 식사를 편하게 해결할 수 있고 물건을 사기에도 편리하지만 라우라가 찬물로 빨래를 하고 온 날이 계속 생각나서 거부감이 든다.

게다가 돈에 여유가 생긴 마당에 굳이 싼 맛에 숙소를 잡고 싶지는 않다.

“라우라, 이번 의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런 의뢰는 접수원과의 인맥이 없으면 받을 수 없는 의뢰로 통해요. 엠마 씨가 레베카님에게 은혜를 갚았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기한은 일주일이라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가려고 해.”

“그렇군요. 그런데 레베카님. 갑작스럽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뭐든 말해봐.”

“여기서는 곤란하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요.”

라우라는 내 팔을 잡아끌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내가 지도창으로 확인해보니 마침 근처에 아무도 없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라우라는 주변을 열심히 살피다가 겨우 안심하고는 먼저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를 냈다.

“레베카님, 저번에 베로니카님이랑 같이 술을 마셨을 때 기억나세요?”

“그럼 베로니카가 날 유혹해도 다 참아냈지.”

“역시나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시네요.”

“그,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난 순간적으로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기억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난 나도 모르게 라우라의 양팔을 붙잡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완전히 취한 레베카님이 베로니카님을 일방적으로 덮쳤어요. 저는 감히 귀족에게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두 분을 말리지도 못하고 뒷정리만 했어요.”

망했다. 완전히 좆됐다!

자식도 있는 유부녀 귀족에게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것도 라우라가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씨발, 환장하겠네.

라우라말고 다른 여자와 잘 생각이 없다던 인간이 사실은 베로니카를 상대로 이미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뒤였다.

“베로니카님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그럼요. 다음날에 바로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셨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두 분이 같은 침대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일이 없도록 했으니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나는 라우라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분명히 필름이 끊기도록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결국 술이 들어가니 절제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제 어쩌면 좋지? 사과를 해도 라우라가 받아줄까?

후우, 일단 사과를 하고 난 뒤에 생각하자.

“라우라, 내가 기억은 없지만 정말 미안해. 그런 짓을 한 나를 보호해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

“레베카님. 전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에는 술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고 싶지 않아요.

“응. 명심할게. 그리고 네 덕분에 살았으니 상을 주고 싶어.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

내가 하는 말에 라우라는 고민에 빠졌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약간 수줍어하면서 내 귀에다 속삭였다.

“레베카님의 처녀를 제게 주세요.”

“어, 그래. 응? 앗! 라우라 잠깐만, 그건...”

“분명히 저한테 약속하신 거예요.”

라우라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고 나는 대꾸도 하질 못했다.

생명의 은인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니 헛웃음이 막 나온다.

만약 베로니카가 남자였고 내 처녀를 가져갔더라면 라우라가 내게 대체 무엇을 요구했을까?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라우라가 말하는 처녀의 기준이 뭐지? 손가락을 넣는 건 처녀상실이 아닌가? 딜도나 자지처럼 깊숙이 넣어야 처녀상실인가? 기나긴 토론이 필요한 주제이지 싶다.

어쨌든 라우라는 내 처녀를 원하고 나는 얼떨결에 넘겨주기로 약속해버렸으니 다음에 섹스를 할 때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어야할 것 같다.

세상에 뭐 이런 기가 막히는 문제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라우라의 호감도를 확인해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날 걱정해서 베로니카와의 일을 알려주고 주의를 준 것이었다.

아, 정말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라우라,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니?”

“사실은 하나 더 있어요.”

“심각한 일이야?”

“안심하세요. 그런 일은 아니에요. 단지 레베카님께서 만약에 애인을 더 만들고 싶으시다면 제게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해요.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거든요.”

라우라는 내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두 번이나 꺼냈다.

하지만 이건 좋은 징조였다.

라우라가 내 하렘계획을 사실상 받아들여준 것이니 말이다.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이런 말을 꺼내줘서 고맙기까지 했다.

“그건 꼭 약속할게.”

“고마워요. 실은 만약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레베카님께 새로운 여자가 생기면 제가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말씀을 드린 거예요.”

좋은 징조라고 했던 말은 취소다.

라우라는 귀엽게 웃으면서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만약 내가 전제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유혈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라우라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예속퀘스트를 완전히 달성하는 게 내 새로운 인생을 지키는 방법인 것 같다.

일단 라우라를 제대로 안심시켜서 그녀가 나쁜 생각을 품지 않도록 해야겠다.

“라우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넌 항상 내 첫 번째.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너야. 그러니까 너 몰래 애인을 만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

“죄송해요. 저처럼 질투 많은 여자 때문에 괜히 민폐만 끼쳐드렸네요.”

“아니야. 민폐는 내가 너한테 끼쳤지. 다시 한 번 약속하는데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내 진심이 통했는지 약간 살기가 돌았던 파란 눈이 다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담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라우라는 내 품에 안겼고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오늘 얻은 교훈은 항상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예전부터 생각했던 걸 라우라에게 물어봐야겠다.

“라우라, 곧 노예를 한 명 더 살 거야.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니까 머릿수를 늘리는 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보상금도 많이 받으셨으니까 분명 좋은 노예를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여자노예로 구입하실 거죠?”

“응. 남자는 서로 불편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미리 말해달라는 거 맞지?”

“네, 레베카님. 혹시 제가 너무 건방진 부탁을 한 건가요?”

“아니. 그랬으면 내가 처음부터 대놓고 싫어했겠지. 이제부터 더는 그걸로 고민하지 마. 난 이미 널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였으니까.”

난 반쯤 거짓말을 하면서 라우라에게 먼저 진하게 키스를 했다.

다행히 라우라는 내가 해주는 키스에 취해서 내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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