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0화
* * *
라우라에게 피어싱을 넘긴지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였고 나도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라우라는 가끔씩 피어싱이 담긴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다시 본인의 가방에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확실하지만 그만큼 거부감이 큰 물건이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나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긋하게 라우라의 결정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라우라의 마음에 달린 문제이니 말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여야지. 아, 그런데 오늘도 너무 빡세네.’
나는 오늘부터 다시 체력단련을 시작했는데 라우라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에 맞추는 건 역시나 몹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번처럼 이를 악물고 버텨냈고 라우라의 격려를 받으며 더 강해진 내 신체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힘든 훈련은 내가 저번 진압작전 이후로 한 번도 확인해보지 않은 상태창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코코를 죽이는데 공헌해서 그런지 몰라도 레벨이 단번에 15에서 20으로 올랐다.
덕분에 특수 포인트를 하나 더 얻었고 이번에도 마력에 투자해서 C랭크로 올렸다.
처음 마력을 올렸을 때처럼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감돌았고 오전 훈련으로 쌓였던 육체의 피로도 싹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패시브스킬인 마력순환을 얻었다.
설명에 따르면 체내에 흐르는 마력을 더 효율적으로 순환하게 만들어서 한 번에 더 많은 에너지를 몸에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내 신체능력과 건강이 전반적으로 약간 향상되어 훈련의 성과가 더 높아지고 마법무기를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마력을 먼저 올리기로 한 선택이 옳았던 모양이다.
힘과 지구력, 민첩성 스테이터스는 한동안 훈련을 하질 못해서 경험치가 다 깎여있었다.
아쉽지만 게으름피운 결과물도 아니니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남들은 평생에 걸쳐서 노력해야할 것을 터치 몇 번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이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다음으로 비전투스킬을 살펴보았다.
코코의 공격을 죽어라고 피하고 몇 번 얻어맞은 덕인지 회피는 1에서 3으로, 고통내성이 3에서 5로 올랐다.
그리고 전투스킬을 보았다.
제압작전을 통해서 얻은 일련의 전투경험은 모든 전투스킬의 스킬레벨을 1씩 향상시켰다.
그래서 총기사격과 제압사격의 스킬레벨은 5, 신속조준과 고속장전은 각각 6과 7로 올랐다.
그리고 새로운 패시브스킬을 얻었는데 바로 마법갑옷숙련과 마법방패숙련이다.
앞으로 기사단 전용이라는 마법갑옷을 입을 날이 한 번이라도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은 일단 얻고 볼 일이다.
반면에 마법방패는 기사단 전용은 아니라서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렀던 마법 관련 상점들에서는 마법방패는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소환마법스킬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세상은 마법이 있는 것치고는 별로 신비로운 게 없단 말이지. 마법사가 다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세상이니 어쩔 수 없는 건가보네.’
자고로 마법이라고 하면 반드시 신비함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총이 있는 세상을 골라서 그런지 마법다운 마법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신기한 건 신전에서 제공하는 각종 연고나 물약이다.
어떤 상처든 죽지만 않으면 금방 치료를 해내니 마법이나 마찬가지로 보였지만 본인들이 마법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주장하니 그렇게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 경험상 마력이라는 건 그냥 사람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동력원정도로 여겨져서 전기나 배터리라고 치환해도 어색할 게 별로 없었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법갑옷은 배터리로 움직이는 동력갑옷이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 곳곳에서 일종의 산업혁명을 촉발시킬 기술개발이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난 생각을 하다보면 자꾸 중요하지도 않은 다른 주제로 빠진단 말이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던지고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장전연습을 했다.
아무리 장전속도가 빨라져도 한 발씩 장전하는 건 언제나 지겨운 일이라서 한 번에 6발을 다 장전하는 도구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기사들이 그런 걸 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땐 바빠서 제대로 확인해보질 못했네. 좀 있다가 베로니카에게 물어봐야겠다.’
마침 베로니카와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졌다.
베로니카는 이번에도 우리 방으로 직접 찾아온다고 해서 그녀가 오기 전에 라우라와 함께 방을 정리하고 환기를 했다.
그리고 난 뒤에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다보니 누군가 노크를 하면서 베로니카의 방문을 알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고 베로니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면서 굉장히 반가워했고 포옹까지 해주었다.
다행히 베로니카가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갑자기 포옹을 당해도 아프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소. 그동안 잘 지냈소?”
“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어요.”
“내가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그대에게 관심을 제대로 주질 못해서 미안하오.”
“아, 아니에요.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걸요. 하하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 이상 나를 보호할 의무가 없는데도 계속 자신의 저택에 머무르게 해준 베로니카에게는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호의가 부담스러울 정도라서 곧 저택에서 나갈 준비를 슬슬 하려던 참이었다.
“그렇소? 부담가지지 마시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아, 네. 들어오세요.”
우리는 소파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고 라우라는 내 옆에서 공손한 자세로 섰다.
곧 하녀들이 다과를 내왔고 신분이 높은 베로니카가 먼저 차를 음미하고 난 다음에 내가 마시는 식으로 예의를 지켰다.
예의를 지키는 것은 어디서나 중요하고 특히 지금처럼 신분제사회에서 살아가는 입장에선 더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베로니카처럼 평민에세 호의적인 귀족 앞에서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오늘은 그대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가져왔소.”
“나쁜 소식부터 듣고 싶네요.”
“영주님께서 그대를 초대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하셨소. 최근에는 조촐한 연회를 열 시간조차 없으시다니 뭐요. 미안하게 되었소.”
“기대했었는데 정말 유감이군요. 영주님께는 괘념치 말아달라고 전해주세요.”
내 생각에는 전혀 나쁜 소식이 아니다.
괜히 누군지도 모르는 높으신 분 앞에서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졌다니 너무 기쁘다!
하지만 난 겉으로는 못내 아쉬운 척을 했다.
대놓고 좋아하면 베로니카의 기분이 팍 상해버릴 테니까.
“좋은 소식은 뭔가요?”
“영주님께서 그대에게 보상을 내리셨소. 아마 마음에 들것이오.”
“보상이요?”
“그렇소. 직접 살펴보시오.”
베로니카가 박수를 두 번 치자 기사단 소속 병사 2명이 크고 고급스러운 상자가 올려져있는 손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이건!”
상자 안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바로 마력총 3종 세트다.
나는 기대를 품고서 즉시 분석스킬을 사용해서 성능을 확인했다.
모두 품질은 A등급이고 앞에 ‘제국기사의’라는 접두사가 붙어있었다.
공통된 기능은 화력 50%증가와 반동 50%감소, 내구력 강화이다.
그리고 마력권총은 전조등, 마력산탄총은 사거리 50%증가, 마력소총은 관통력 50%증가 기능이 각각 달려있었다.
하나같이 아쉬울 게 전혀 없는 뛰어난 성능을 가져서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제국기사의 마력권총의 전조등기능은 앞으로 회중시계의 조명기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회중시계를 꺼내기가 귀찮았는데 잘 됐다.
“영주님께서는 그대에게 이 총기세트를 보상으로 내려주셨소. 본래 기사서임을 받은 자에게만 지급되는 것이지만 그대의 공로가 커서 특별히 예외를 적용하셨소. 단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기사들이 이번 예외를 인정하고 있으니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주시오.”
“영주님과 다른 기사님들께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물론이오. 그리고 이건 약속했던 보상금이오. 영주님께서 추가로 보상금을 더 얹어주셨으니 알고 계시오.”
베로니카는 내게 소금화 1닢, 다시 말해서 100만 라기르나 되는 거금을 쥐어주었다.
얼마 전에 내 수중에 30만 라기르 정도가 생겼다고 엄청 좋아했었는데 그것의 3배가 넘는 돈을 한 번에 받으니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게임에서는 흔히 보았던 금화가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
난 솔직히 많이 받아도 10만 라기르정도 받을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기사단과 영주를 너무 짠돌이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셨네요. 고마워요.”
“나는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오. 그리고 지금 주는 것은 내 개인적인 선물이오.”
개인적인 선물이라? 저번에는 딜도를 줬으니까 이번에는 양방향 딜도 같은 걸 주려나?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런 선물을 다른 병사들이 있는데 대놓고 줄 리가 없지.
그리고 그건 내가 이미 라우라 몰래 특수상점에서 사버렸잖아.
‘아직 쓸 용기가 나지는 않지만 조만간에 라우라의 성욕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땐...’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방금 전에 들어왔던 상자처럼 큰 상자와 길쭉한 상자가 각각 놓여있는 손수레가 들어왔다.
대놓고 기사단 보급품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번에도 무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충분한 양의 무기를 선물 받았는데 굳이 또 무기를 주는 건가?
“사실 이것들은 그대가 아니라 라우라를 위한 선물이오.”
“저 말씀인가요?”
“노예라 할지라도 이번에 열심히 싸웠으니 보상을 주고 싶었어.”
“가,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직접 열어보렴.”
라우라는 베로니카의 제안에 살짝 떨리는 손으로 큰 상자부터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내가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마력총 3종 세트가 들어있었다.
라우라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쩍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 기사단을 포함해서 제국군에 소속된 일반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것이다. 너는 그걸 받을 자격이 있어.”
“미천한 저를 위해서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라우라가 베로니카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받은 선물이 내 것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서 분석스킬을 써보았다.
모두 품질은 B등급이고 앞에 ‘제국병사의’라는 접두사가 붙어있었다.
공통된 기능과 총기별 기능은 모두 내 것과 같았지만 50%가 아니라 25%의 증감이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등급이 한 단계 낮아서 그런지 그만큼 기능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시중에 팔리는 것들에 비하면 월등히 뛰어난 성능이었다.
나를 이어서 라우라까지 총기세트를 선물 받았으니 기존에 라우라가 쓰던 마력권총은 팔아야겠다.
그리고 기생버섯을 처리하고 얻었던 마력산탄총은 일단 가방에 보관해둬야겠다.
“작은 상자도 열어보도록 해라.”
“네, 베로니카님.”
라우라는 이번엔 길쭉한 상자를 열어보더니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물은 바로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이다.
분석스킬을 써보니 품질은 B등급이고 라우라가 앞서 받은 선물처럼 ‘제국병사의’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다.
기능은 내구력 강화와 녹슮 방지가 전부라서 아쉬웠지만 라우라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다.
“베로니카님, 라우라를 챙겨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제 선물은 따로 없나요?”
“당연히 준비했소. 바로 이것이오.”
“이게 뭔가요?”
“프랑카 기사단과 내 이름으로 그대의 신분을 보장하는 증서요. 그대가 제국 어디를 가든 신분증명이 사소한 행정상의 문제로 곤란할 일은 없을 것이오.”
베로니카가 건네준 작은 증서는 네모난 수정 같은 것 안에 들어있었는데 작은 마법진 같은 것을 꾹 누르니 홀로그램처럼 증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레베카, 비록 작은 선물이지만 그대가 프랑카를 위해서 헌신했던 일을 내가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준비했소.”
“제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대는 고아원의 아이들을 지켜준 것으로 시작해서 불법마물연구에 대한 완벽한 증거를 확보했고 우리와 함께 상급마물을 상대로 분투하여 바깥의 전우들에게 놈을 물리칠 시간을 벌어주었소. 게다가 그대는 지하의 노예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조대를 요청했소. 참으로 고맙소. 또한 라우라도 최선을 다해 그대를 곁에서 보필했으니 칭찬해야 마땅하오.”
베로니카는 나를 추켜세우면서 라우라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나는 뭔가 영웅이 된 기분에 우쭐했지만 스스로 그런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도 베로니카님과 함께 싸웠던 날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하하! 고맙소! 레베카, 그대라는 좋은 사람을 알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그런데 술은 잘 마시오?”
“네, 그럭저럭요.”
“좋소! 오늘은 함께 마음껏 마시고 즐기며 취할 수 있겠구려. 하하하!”
베로니카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자꾸 내면서 즐거워했다.
내가 예의상 했던 말을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다.
“저도 참 기대가 되네요. 라우라도 같이 마셔도 될까요?”
“물론이오. 오히려 빠지면 섭섭할 것이오.”
“다행이네요. 항상 라우라도 신경써주셔서 고마워요.”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기사인 내가 지켜야할 백성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 말이오.”
베로니카는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긴 귀족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애민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자랑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친분을 쌓은 귀족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다.
“그럼 나중에 사람을 보낼 테니 시간 맞춰서 약속장소로 오시오. 성대한 술상을 준비할 터이니.”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평소에 주는 밥도 대단한데 성대한 술상이라고 하니 엄청 기대가 된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으로 넘어온 뒤로 한 번도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식사를 할 때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튼 술에 취하면 예전의 삶에 대해서 늘어놓을지도 모르니 적당히 마셔야할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