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7화
* * *
내가 어릴 적에는 소방관들을 보면서 어른이 되면 꼭 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구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약해빠졌던 나는 결국 그런 용감한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면 다행인 어른이 되어 겨우 사회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진작 새로운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라우라를 구해서 어릴 적의 꿈을 이룰 것이다.
“라우라!”
나는 이 근방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인 코코의 입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준 부러진 대검으로 라우라를 붙잡고 있는 촉수다발을 단번에 잘라낸 뒤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
코코는 그대로 주둥이를 닫으려고 했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덫을 빠져나와 멀찍이 도망쳤다.
베로니카와 기사들은 내가 라우라를 구출하는 동안 열심히 엄호사격을 하여 코코의 시선을 끌어서 우리가 잠깐 안전을 확보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나는 아직도 라우라의 몸에 붙어서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를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마법갑옷에 붙어있는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죄송해요, 레베카님. 다 제 잘못이에요.”
“다친 곳은 없니?”
“네, 덕분에 무사해요.”
“그럼 됐어.”
“하지만 저 때문에...”
“세상에 목이 잘려도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거야.”
나는 스스로를 탓하는 라우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뒤늦게 울먹였지만 끝까지 울지 않고 참아냈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무사히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당장에라도 키스를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내 기대를 저버리는 구나. 벌써 두 번째야!”
“엘카힘!”
나는 인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엘카힘를 향해 주저 없이 마력소총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마력철갑탄은 엘카힘의 대가리를 뚫어버리기는커녕 그 빌어먹을 년의 머리 앞에서 둥둥 떠 있다가 맥없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마법방어구는 인간의 공격을 막아주지 못하니까 다른 방법으로 총알을 막아낸 것이 분명했다.
마법인가? 아니면 개선된 마법방어구? 뭔지 몰라도 골치가 아프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일단 경청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면 곤란해.”
“너 같은 씨발년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어서 말이야.”
나는 엘카힘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그 쌍년의 머리를 쳐부쉈다.
흥! 이건 못 막나보네.
엘카힘의 역겨운 피와 살점, 뼛조각과 눈알, 뇌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것의 몸뚱이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나는 몸도 밟아서 터뜨리려고 했지만 예상과 달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피해버렸고 나는 애꿎은 강당 바닥만 꺼뜨렸다.
머리도 없이 벌떡 일어난 엘카힘의 몸은 몇 번씩이나 기괴하게 꿈틀거리더니 가면을 비롯해서 새로운 머리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도 재생단계에서 가면이 먼저 생겨버리니 답이 없었다.
“지금은 피차 서로의 얼굴을 알 수 없으니 너무 상심하지는 마. 언젠가 함께 대화를 할 때가 있을 테니까.”
“요즘은 일단 죽이고 보는 걸 대화라고 하나?”
“어차피 너희들에게는 우릴 죽일 방법이 없으니 결국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께서 네게 관심을 보이셨으니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렴.”
“지랄하고 있네. 난 너희들 같은 괴물과는 나눌 말 따윈 없어.”
나는 이번에는 아예 엘카힘의 몸을 전부 박살낼 작정으로 달려들었지만 갑자기 나를 후려치는 꼬리촉수에 맞아 뒤로 날려갔다.
운이 좋아서 벽에 부딪힌 덕분에 밖으로 날려가지는 않았지만 마법갑옷이 반파되고 몸이 엄청 아팠다.
“레베카님!”
“난 괜찮아. 울지 마.”
나는 다친 내 곁으로 다가와 결국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라우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마법갑옷이 반파되어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맨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너희들과 놀아주고 싶지만 너희 측에서 실험체를 죽일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봐야겠어. 언젠가 재회할 날을 고대할게. 흐흐흐흐.”
“기다려! 으윽!”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카힘을 붙잡으려다가 갈비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걸 보니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진 모양이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레베카! 피하시오!”
나는 베로니카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러자 내 눈에는 코코가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은 이미 전부 제압을 당한 상태였고 내게 경고를 한 베로니카는 상태도 좋지 않아보였다.
우릴 보호해주거나 코코의 시선을 끌어줄 사람은 단 한명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나는 라우라를 끌어안고 그나마 마법갑옷이 멀쩡하게 남아있는 등을 코코 쪽으로 향했다.
내가 씹어 먹히더라도 라우라만큼은 살려낼 것이고 밖으로 던져지더라도 내 몸을 바쳐서 라우라를 구해낼 것이다.
그렇게 굳은 각오를 하는 찰나에, 맞은편에 있는 비슷한 높이의 건물옥상에서 대포 같은 무기가 발사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정체모를 길쭉한 발사체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갔고 곧 근육이 깊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코코의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코코의 목구멍에 작은 기둥 같은 것이 박혀있었고 곧 한 발이 더 날아와 코코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러자 코코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스듬히 쓰러졌다.
“지금이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모두 적의 배를 쏴라!”
나는 베로니카의 필사적인 외침에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코코의 배가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마력산탄과 마력철갑탄을 있는 대로 퍼붓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력권총탄까지 아낌없이 쏟아냈다.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라서 코코의 약점인 배 중심부에는 남아있던 모든 총알이 퍼부어졌다.
“씨발! 좀 죽어라!”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또 다시 일어나는 코코의 끈질긴 생명력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 화가 나서 코코의 다리에다가 아무 쓸모도 없는 발길질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코코가 풀썩 쓰러졌다.
뭐야? 발차기가 먹혔나?
당연히 아니다.
코코는 다시 한 번 날아온 기둥 같은 것에 두 번 연속으로 몸통이 관통당해 완전히 힘을 잃었고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아 너덜너덜해진 놈의 배에서 시커먼 생체물질과 금속파편이 쏟아져 나왔다.
금속파편은 잡아먹혔던 기사들의 마법갑옷이나 마력총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지만 살과 뼈는 이미 소화가 다 되어버렸는지 흔적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코코는 몇 번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주둥이에서 대량의 생체물질을 토하며 죽었다.
레벨 80이고 뭐고 강한 화력 앞에서는 결국 짐승일 뿐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짐승에게 20명이 넘는 기사들이 죽거나 다쳤고 우리가 최후의 사격을 가하는 사이에 엘카힘은 유유히 도망가 버렸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라우라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기사단의 지원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 모두 끝장이 나버렸을 것이다.
“이거 확실히 죽은 거 맞겠지?”
나는 발로 코코의 머리를 툭툭 건드려보았는데 미동도 없었다.
놈이 그렇게 열심히 휘두르면서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던 촉수와 그 많은 사람들을 잡아먹었던 주둥이가 축 늘어졌고 몸통의 거대한 구멍과 배에 남은 수많은 총상은 재생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그렇게 애먹인 것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어이가 없어도 좋으니 더 빨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고 엘카힘을 붙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레베카님, 아픈 곳은 어떠세요?”
“그거? 으윽! 네가 말하니까 갑자기 확 아픈 것 같아.”
“네? 또 저 때문인가요? 죄송해요.”
“하하하, 농담이야. 아야야야... 일단 거기서 쉬고 있어. 여긴 좀 더럽거든.”
나는 옆구리에서 다시 큰 통증을 느끼며 엉망이 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이 온통 맹독성 생체물질 범벅이라서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우라에게 위로를 받고 싶기는 했지만 혹시나 그녀의 몸에 상처가 있을 지도 모르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알몸에 망토만 걸친 라우라가 걱정이었지만 그나마 해가 뜨고 날이 포근해져서 다행이다.
나는 더러워지고 망가진 마법갑옷에서 빠져나와 라우라의 곁으로 가고 싶지만 마법갑옷이 고장이 났는지 도저히 벗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마법갑옷을 벗어보려고 낑낑거리는 사이에 베로니카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망토를 벗어서 바깥으로 노출된 내 속살을 덮어주었다.
“그대들이 무사해서 참으로 기쁘오.”
“베로니카님도요.”
“고맙소. 많이 다쳤소?”
“잘 모르겠지만 갈비뼈가 금이 간 것 같이 아프네요.”
“그만하길 다행이오. 곧 의무기사가 올 테니 조금만 더 참으시오.”
베로니카는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반쯤 깨진 투구를 통해서 얼굴이 얼핏 보였는데 굉장히 힘들고 원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부하들을 많이 잃은 것이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그럴싸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베로니카는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려는 듯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코코를 죽인 무기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마물을 끝장낸 무기는 최근에 각 지역의 기사단에 보급되기 시작한 마력포라는 최신형무기요. 저기 기둥 같은 게 보이시오? 저게 바로 마력포탄이오. 마력탄과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 중심부에 철심이 박혀 있소.”
베로니카의 설명에 따라서 마력포탄을 보니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대장군전이라는 무기가 떠오른다.
형태나 크기가 너무 비슷해서 놀라웠고 혹시나 조상님 중 한 분이 나처럼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게 아닐까하는 망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갱단을 진압하다가 최초의 실전사례를 남기게 될 줄은 몰랐소.”
“최초의 실전사례요?”
“그렇소.”
“그것 참... 영광이네요.”
“나야말로 그대와 함께 싸워서 영광이었소. 기사가 아닌 사람이 그토록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오.”
나는 은근히 비꼬는 식으로 말했는데 베로니카는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했다.
이 사람 은근히 순진하단 말이지.
“과찬이세요. 그런데 저나 베로니카님이나 당분간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오. 영주님께 초대를 나중으로 미뤄달라고 부탁드려야할 것 같소. 걱정 마시오. 영주님께선 무뚝뚝하시지만 내 부탁은 잘 들어주시는 편이니.”
“두 분이 서로 친하신 모양이네요?”
“사실 영주님께서는 내 큰아버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아껴주셨소.”
“정말요? 베로니카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신분이 높은 분이셨네요.”
“나는 그저 백성들을 지키는 일개기사일 뿐이오. 이제 다시 부하들을 살펴봐야할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소. 라우라, 이걸로 불을 피워라.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말이다.”
베로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우라에게 부싯돌을 던져주었다.
내게 망토도 덮어주는 것도 그렇고 참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
베로니카는 나를 보며 씩 웃더니 강당 한쪽에 모여 있는 부상당한 기사들 곁으로 돌아가 그들을 위로했다.
기사들은 본인들의 상처보다 죽은 전우들에 대한 슬픔이 큰 모양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심정적인 고통을 느꼈고 간혹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다들 많이 힘들겠지. 분명 나보다 훨씬 더 힘들 거야. 그건 코앞에서 원수를 놓쳐버린 라우라도 마찬가지일 거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라우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충분한 땔감을 모은 라우라는 베로니카가 던져준 부싯돌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그녀가 급조한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서 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레베카님, 전 춥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눈표범족은 추위에 강하거든요.”
“그래도 알몸은 좀 춥지 않아? 아무리 날이 포근해도 겨울은 겨울이잖아.”
“고향에서는 지금 같은 온도면 소풍가도 되는 따뜻한 날씨로 여겨요.”
“그래? 대단하다.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은 걸. 그래, 우리 여행의 목적지를 너희 고향으로 잡을까?”
나는 신이 나서 제안을 했지만 정작 라우라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거 말실수를 한 것 같네.
“제 고향은 오크들이 공격하는 바람에 이미 사라졌어요. 저희 가족이 고향을 떠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씨발... 내가 설정한 세계관 때문에 라우라의 고향이 사라지고 말았다.
라우라의 부모님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나 때문이다.
하다못해 오크를 유목민 스타일의 마족이 아니라 평범한 종족으로만 설정했어도 라우라가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인류의 천적 같은 걸 재미로 설정한 내 잘못이다.
“레베카님, 갑자기 왜 우시나요?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미 저질러버려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인데 세상을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창조했던 예전 세상의 내가 원망스럽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진지한 자세로 대했더라면 분명 라우라가 비극적인 운명과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의무기사들이 올 때까지 계속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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