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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1화 (21/271)

〈 21화 〉 20화

* * *

지금 내가 앉아있는 곳은 기사단 본부에 있는 심문실이다.

다행히 가해자 신분으로 잡혀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호조치를 받고 있다.

아마도 내가 죽인 양아치들이 속한 갱단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물론 나는 하나도 놈들이 무섭지 않다.

마력탄으로 머리를 날려버리면 그만인 놈들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레베카님, 다 끝났어요. 좋은 약이니까 하루면 말끔하게 다 나으실 거예요.”

내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라우라는 조심스레 그 위를 쓰다듬었다.

기사단에서 제공한 약은 신전에서 제작하는 것인데 축복을 받아서 대부분의 상처를 흉터도 없이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힐링포션의 연고버전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도 돈을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하니까 다음에 신전에 들러서 넉넉하게 사둬야겠다.

“전 앞으로는 레베카님 곁을 떠나지 않을래요.”

라우라는 자기가 떠난 뒤에 내가 습격당한 일에 대해서 자책하고 있었다.

본인이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 듯 했다.

사실 내가 어이없게 죽을 뻔했었다는 말을 꺼냈다가는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다.

“괜찮아. 나 혼자 다 쫓아냈잖아.”

“하지만 다친 건 사실이잖아요.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요.”

“라우라, 운도 실력이라잖아. 걱정할 필요...”

“아니에요! 저는 그러다 레베카님이 죽을까봐 무서워요! 또 혼자가 되는 건 싫어요!”

라우라는 갑자기 날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난 그저 라우라에게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모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달래주는 것밖에 없었다.

“미안해, 라우라. 내가 잘못했어.”

“아니에요. 제가 감히 주제를 넘었어요. 죄송합니다.”

라우라는 겨우 울음소리를 그치자마자 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노예라는 신분이 그녀를 최대한 저자세로 만들었다.

나는 말없이 라우라를 일으켜서 내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의 입술로 다가가 키스했다.

우리는 여기가 애정행각이 금지된 곳이라는 게 아까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애정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심문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우리들의 애정행각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 낯익은 기사는 분명 내가 찰스의 동료들을 고발할 때 이것저것 설명을 해줬던 엘프족 미녀기사였다.

“이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조금 더 늦게 올 걸 그랬소. 하하하하!”

그녀는 우리들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호탕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나름 배려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쪽팔려 죽을 맛이다.

나와 라우라는 괜히 서로 어색해졌고 라우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섰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렸던 기사는 내게 먼저 악수를 요청했다.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겠지. 내 이름은 베로니카 파라이네라고 하오.”

“저는 레베카 카론이에요.”

나는 베로니카의 악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서 그런지 손도 나보다 컸다.

이렇게 예쁜 사람과 악수를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라우라가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우리 기사단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대가 정당방위로 스스로와 고아원을 보호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했소.”

“좋은 소식이네요.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될까요?”

“안 듣고 넘어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텐데 괜찮겠소?”

“부디 계속 말씀해주세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그대가 죽인 자들이 소속된 갱단에서 보복을 선언했다는 거요.”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찌질한 놈들은 꼭 당하고 나면 단체로 몰려와서 염병을 떤다니까.

이번에도 훌륭한 대화수단으로 다 박살내버려야지.

“걔들이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카리우스라는 자가 이끄는 ‘붉은 고블린’이라는 이름의 3대 갱단 중 하나인데 가장 험하게 노는 자들이라 우리 기사단에서도 항상 주시하고 있소.”

“뭔가 촌스러운 이름이네요. 어쨌든 그 놈들을 상대로는 계속해서 정당방위가 성립하는 거 맞죠?”

“그렇소. 하지만 교전을 하다가 관계없는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다면 법적처벌을 받게 되오. 따라서 이번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우리 기사단에서 그대를 직접 보호하고자 하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대로 계속 기사단 본부에 잡혀 살게 되는 건 아니겠지?

모험가길드 숙소에서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어도 기사단이 직접 관리하는 곳에서는 라우라랑 마음대로 즐기지도 못할 것 같은데.

“거부할 수 있나요?”

“물론이오. 지금까지처럼 모험가길드의 ‘보호’를 받아도 상관없소. 하지만 모험가길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오.”

“기사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지만 모험가길드를 상대로는 선을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또한 모험가길드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을 거요.”

“듣기로는 모험가길드가 슬럼가의 범죄조직들과 협상을 맺었다던데 그것 때문인가요?”

“현 상황에서 협상은 의미가 사라졌소. 그보다는 모험가 중에서 갱단에 소속된 자들이 제법 많다는 게 문제요. 그대가 전에 우리에게 넘기지 않았던 찰스처럼 말이오.”

베로니카는 이미 찰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찰스에게 저지른 짓도 알고 있는 걸까?

이러다 자칫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겠는 걸.

“긴장할 필요는 없소. 그대가 오늘 모험가길드에 신고한 바에 따르면 찰스는 기생버섯에 감염되어 죽었고 그대는 방역조치에 따라서 시신을 불로 태운 것이니. 혹시 내가 아는 것이 틀렸소?”

“마, 맞아요. 그랬었죠.”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꿰뚫어보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새로운 인생을 발목 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날 괴롭혔다.

“따라서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내 집에서 지내도록 해주겠소. 아무리 어리석은 자들이라도 부단장의 집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

뭐? 그냥 기사도 아니고 무려 부단장이라고? 엄청 젊어 보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베로니카에게 분석스킬을 써볼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한 번 써보자.

레벨 : 50

이름 : 베로니카 파라이네

성별 : 여성

종족 : 엘프족

나이 : 32

신분 : 귀족

직업 : 기사단 부단장

베로니카는 내 예상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고 레벨은 훨씬 높았다.

방금 교전으로 레벨이 올랐어도 아직 15에 불과한 나는 간단하게 살해당할 거다.

그런데 나 같은 평민이 귀족의 집에 이렇게 쉽게 들어가도 되나?

“호의를 베푸시는 와중에 죄송스럽지만 대체 뭘 믿고 저를 집에 들이시는 건가요?”

“처음 보는 아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을 못 믿으면 누구인들 믿을 수 있겠소? 걱정 마시오. 나쁘게 대우하지는 않을 테니.”

난 그저 내가 죽기 싫어서 싸운 건데 좋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니 뭔가 죄책감이 든다.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서 기분이 영 별로다.

말이 나온 김에 고아원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

“고아들은 어떻게 되나요? 계속 그런 곳에 살면 위험할 텐데요.”

“단장님의 뜻에 따라서 고아들을 모두 기사단에서 수용하기로 했소. 그리고 원장은 기사단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에 보육교사로 고용될 것이오.”

“그거 참 좋은 소식이네요. 나중에 과자라도 잔뜩 사들고 아이들을 찾아가야겠어요.”

내 목숨을 구해준 기사단장이 이번엔 고아들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기사단장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왜 슬럼가의 갱단들을 처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아예 슬럼가를 싹 정리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 같은데 어째서 그냥 놔두시나요?”

“지금까지는 영주님께서 슬럼가의 갱단들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소. 몇 번 진언을 드렸지만 다른 일에 더 관심을 보이시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지 뭐요. 하지만 이번 사건이 영주님께 보고된 뒤로 태도를 바꾸셨소. 따라서 곧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일 것이오.”

이거 아무래도 내가 프랑카의 역사를 바꾸는 일을 저지른 모양이네.

내 마음대로 그리고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의도치 않게 큰일을 만들고 말았다.

아까 보호조치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괜히 인생이 피곤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정말인가요? 다행이네요.”

“그대만 좋다면 이번 작전에 참가할 기회를 주고 싶소.”

“제가요? 하지만 전 모험가길드 소속이라...”

“영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신 이상, 모험가길드와 슬럼가의 협상은 무효요. 앞서 내가 협상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말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는 저를 보호해주신다면서요?”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보호이고 그 다음부터는 전적으로 그대의 의사를 존중할 것이오. 만약 작전에 참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명예와 보상이 주어질 것이오.”

명예는 둘째 치고 보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내게 합당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참가해서 그 쓰레기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에 협조할 용의가 있다.

“실례지만 어떤 보상인지 귀띔을 주실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돈이오.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공을 많이 세운다면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서요.”

“알겠소. 일주일 안에만 답변해주면 되는 일이니 천천히 생각해보시오.”

나는 당장에라도 참가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걱정에 울어버렸던 라우라를 생각해서 일단 그녀와 함께 고민할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럼 숙소에 가서 짐을 가지고 오시오. 부하 넷을 호위로 보내도록 하겠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나는 베로니카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서 그녀가 호위로 붙여준 기사들과 합류했다.

사방으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있으니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점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모험가길드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다른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대부분 무관심했지만 적대감을 가지고 나를 노려보는 놈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엠마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친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지금은 아무래도 의뢰 때문에 오신 건 아닌가보네요.”

“사정이 좀 생겨서 당분간 다른 곳에서 지내야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의뢰도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생길 문제가 있나요?”

“규정에 따르면 1년 이상 의뢰를 수행하지 않을 시에는 등급이 떨어지거나 제명을 당하게 돼요. 그러니 레베카 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할 수 있죠.”

“그럼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모험가길드에서 쫓겨나려면 최소한 1년은 먹고 놀아야 한다는 건데 설마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일은 없지 싶다.

만약에 모험가길드에서 제명된다면 베로니카에게 책임을 지라고 들러붙어야겠다.

“레베카 씨, 혹시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요?”

“찰스일당과 관련된 건 아니고요. 몇 시간 전에 생긴 일 때문에 그래요.”

“맙소사! 기사님들이 보호를 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붉은 고블린 갱단은 엄청 위험한 사람들이거든요.”

엠마는 내 손을 잡으면서 안도했다.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고 말았다.

그러자 엠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고 난 아차 싶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라우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흠흠. 아무튼 저 때문에 모험가길드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그건 걱정 마세요. 갱단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모험가길드 자체를 상대로는 싸움을 걸지 못하니까요.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저도 얼른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잘 지내요.”

“레베카 씨가 무사히 잘 지내시길 기도할게요.”

나는 엠마에게 일시적인 작별인사를 하고는 일행들과 함께 숙소로 올라갔다.

기사가 둘이나 따라오는 바람에 마법승강기가 엄청 좁게 느껴졌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5층의 숙소에 도착한 나는 라우라와 함께 얼마 없는 짐을 챙겼다.

잠시 지낼 생각으로 머물렀던 장소지만 떠나려니 왠지 모르게 아쉽게 느껴졌다.

나는 텅 빈 숙소에서 나가기 전에 라우라와 함께 야릇한 손길을 나누었던 샤워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이나 내일쯤에 침대에서도 즐겨보려고 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레베카님, 짐을 다 챙겼어요.”

“수고했어. 그럼 가보자.”

우리는 그동안 신세를 졌던 507호를 등지고 4층으로 내려와 잔금을 치렀다.

그리고는 1층으로 내려와 모험가길드에서 나왔다.

나는 배웅해주는 엠마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베카님, 엠마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친구에게 인사하는 기분이니까 걱정 마. 귀엽기는.”

나는 이젠 대놓고 질투하는 라우라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자 라우라는 더 이상 질투도 하지 못하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기사님,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목적지는 기사단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소. 조심해서 따라오시오.”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모험가길드에 올 때처럼 사방에서 우리를 호위하면서 길을 걸어갔다.

우리는 번화가를 지나서 기사단 본부로 향하는 대로를 걷다가 도중에 인적이 드문 고급주택단지로 들어섰다.

아마 여기를 지나야 베로니카가 사는 집이 나오는 모양이다.

베로니카는 귀족이고 부단장이니까 여기처럼 상류층이나 살법한 곳에 집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게 우리는 고급주택단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는 마법갑옷 대신에 평상복을 입은 베로니카가 직접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네들도 수고 많았네.”

베로니카는 기사들을 돌려보낸 뒤에 우리를 저택 안으로 들였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집에 들어오는 건 처음인지라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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