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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8화 (18/271)

〈 18화 〉 17화

* * *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하지만 뭔가 쌀쌀한 기분이 들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기온을 보니 아마도 겨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처음 로그인,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왔을 때는 날이 따뜻하게 느껴졌었는데 아마 그 날이 유독 날씨가 좋았던 모양이다.

나는 무심코 옆으로 손을 뻗었지만 라우라가 만져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라우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우라.”

나는 약간 쉰 목소리로 라우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라우라는 즉시 뒤를 돌아보았고 나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레베카님, 좋은 아침이에요.”

라우라는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따스한 키스를 해주었다.

차갑게 식었던 내 얼굴에 순간적으로 열이 올랐다.

어젯밤에 라우라와 함께 했었던 경험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또 경험하고 싶은 기억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언제 일어났어?”

“한 시간 전에요. 주무시는 동안 오늘 의뢰에 필요한 짐을 싸고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 어떤 걸 준비 했어?”

내 질문에 라우라는 가방에 넣었던 것을 굳이 다시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냥 나중에 내가 직접 확인할 걸 그랬다.

“복면과 망토, 고글, 장갑이에요. 레베카님이 준비금으로 따로 책정하신 돈을 써서 구매했어요.”

“잘했어. 그런데 마물을 잡는데 이런 것들이 필요해?”

나는 이번에도 내가 관여한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정보를 라우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우라는 언제나처럼 친절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물은 검은색 맹독성 생체물질로 뒤덮여있는데 이걸 채찍처럼 휘두르거나 물총처럼 발사하는 방식으로 공격해요. 어떤 방식으로든 몸속으로 들어가면 해독할 방법이 없어요.”

“그것 참 살벌한 능력이네. 그래도 마법방어구가 막아줄 수 있겠지?”

“네. 하지만 마물을 죽일 때 생체물질이 튀는 경우나 착용자가 먼저 만지는 경우에는 방어막이 작동하지 않으니 주의하셔야 해요. 그래서 이렇게 생체물질이 체내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줄 물건들이 필요한 것이고요.”

나는 또 한 번 마법방어구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약점이나 한계점이 드러난다면 아예 갑옷이나 방패를 구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모험가들을 보면 전부 마법방어구만 가지고 다녀서 괜히 샀다가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목숨이 걸린 문제에 간단한 대응책이 있는데도 거부하는 바보들은 아닐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런 바보들이야 실존하겠지만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게 분명하다.

“레베카님, 방금 방패나 갑옷을 살까 고민하셨죠?”

라우라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나를 추궁했다.

그녀의 새파란 눈이 얼른 진실일 말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잘못한 건 전혀 없는데 왠지 다 불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 거야? 내 머리 위에 그런 게 뜨기라도 해?”

“아니요. 전직 현상금사냥꾼의 직감이라고나 할까요.”

“네 앞에서는 말 뿐만 아니라 생각도 조심해야겠다.”

“레베카님은 언제나 저에 대해서 좋은 생각만 하시잖아요. 걱정 마세요.”

라우라는 내 양심을 후벼 파는 기대감을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라우라를 상대로 온갖 흑심을 다 품고 있는데 말이다.

설마 라우라도 그걸 기대하는 걸까? 아니야, 섣불리 나서지 말자.

적어도 음란도가 8은 되어야 그런 망상을 실현할 수 있을 거야.

참고로 어제 확인한 라우라의 음란도는 6이다. 그저께보다 1이 올랐다.

아마 나한테도 음란도 스탯 같은 게 있었다면 어제의 경험으로 1정도 올랐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못할 이야기이지만 어제의 첫 경험은 말로 쉽게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신선하고 짜릿하고 예술적이었다.

“아무튼 네 생각은 어때? 그런 방어구가 쓸모 있을까?”

“급할 땐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마법방어구가 못 막는 건 갑옷과 방패로도 못 막는 게 보통이에요. 그래서 그 무거운 것들을 입거나 가지고 다니면서 기운을 빼느니 여분의 마법방어구를 준비하는 게 좀 더 효율적이죠. 저희는 지금 하나씩만 착용했지만 여유가 있는 모험가들은 각 부위에 하나씩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면 여러 개의 마법방어구를 착용하면 방어막이 훨씬 더 강해지겠네?”

“아니요. 간섭효과 때문에 한 번에 하나씩만 작동해요. 팔찌가 고장 나면 목걸이가 뒤를 잇는 방식이죠.”

그럼 그렇지. 이놈의 마법방어구는 갈수록 제약만 늘어나는 웃기는 물건이다.

인간을 상대로는 무용지물이고 충분히 위험한데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위협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지 몰라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아, 어쩌면 게임적인 이유로 금지된 설정이 이 세상에 적용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마법에 대한 설정은 하지 않은 내 잘못인 건가?

아니야. 바보 같은 인공지능이 잘못한 게 분명해.

“설명 잘 들었어. 조만간에 베네사의 보물과 그 노예들이 팔린 돈이 들어올 테니 그때 마법방어구를 몇 개 더 사자. 더 좋은 걸로.”

“네, 레베카님. 아참, 배고프시죠? 제가 가서 아침식사를 받아올 게요.”

“그냥 더 자고 싶은데.”

“안 돼요. 일을 하시려면 꼭 드셔야 해요. 안 그러면 건강이 나빠진다고요.”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역시 라우라는 못 이기겠다.

노예에게 잔소리를 듣는 주인이라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그래도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나는 라우라가 가져다 준 팬케이크와 따뜻한 우유로 배를 채웠다.

혹시나 싶어서 라우라 몫의 우유가 담진 잔을 만져봤는데 따뜻했다.

어제 라우라가 차가운 손으로 돌아온 건 정말 온수기고장 때문이었나 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고의로 그런 것이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거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외출 준비를 끝내고 방을 나섰다.

이번 의뢰는 의뢰인을 따로 만나봐야 하는 일이라서 번거롭게 느껴진다.

분명히 10시부터 만날 수 있다고 했었지?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9시다.

나는 약간의 여유를 느끼며 라우라와 함께 의뢰인이 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주소를 읽으니 지도창에 그대로 목적지가 표기되었고 경로까지 나타났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으면 이런 식으로 편한 기능이 발동되는 모양이다.

내가 주소를 읽으니 지도창에 그대로 목적지가 표기되었고 경로까지 나타났다.

모험가길드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져있지만 시간은 충분하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오래된 목재가옥이 우리를 반겼다.

“실례합니다. 모험가길드에서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나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하면서 의뢰인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낡은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이제야 모험가가 찾아오는 군. 날도 추운데 얼른 들어와.”

꽤나 괴팍한 인상의 할머니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가운 목소리로 우리를 집 안으로 초대하셨다.

집은 내부도 조금 낡았지만 할머니가 청소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내 형편에 커피는 무리고 보리차라도 줄 테니 거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할머니는 우리를 삐거덕거리는 소파에 반강제로 앉혀놓고 불편한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더니 따뜻한 보리차를 두 잔 내오셨다.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쌀쌀한 날씨에 식었던 몸이 단번에 따뜻해지는 게 기분이 좋다.

라우라도 보리차를 홀짝이면서 그 따뜻함에 절로 미소를 지어지는 모양이다.

할머니는 우리가 보리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의뢰를 한 지가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고. 이제라도 너희들이 찾아와줘서 참 다행이야.”

“고블린을 잡는 게 싫어서 다른 의뢰를 찾아보다가 마침 할머니가 의뢰하신 게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 그 놈의 고블린들이 또 수가 많이 늘어난 모양이야. 하여간 징그러운 놈들이라니깐.”

“맞아요. 여러 면에서 징그러운 놈들이죠. 그런데 최하급마물은 어디에 있나요?”

“그 녀석은 저기 있는 버려진 창고에 갇혀있어.”

할머니는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반쯤 무너진 창고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진작 탈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 그런 괴물이 있다니 이상하다.

할머니의 슬픈 표정도 마음에 걸리고.

“아직도 저기에 있을까요?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매일 확인하고 있어. 오늘 새벽에도 다녀왔고. 원래부터 몸이 성치 않은 녀석이라 탈출은 꿈도 못 꾸고 있지.”

“그렇군요. 그런 녀석이라면 처치하는 것도 간단하겠네요.”

“기왕이면 한 번에 숨통을 끊어줘. 원래 내가 키우던 개거든.”

할머니는 지친 표정을 지으며 벽난로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으셨다.

“비비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려졌어. 그걸 내가 데려다 키웠고. 뒷다리가 없어서 제대로 기어 다니지도 못했지만 언제나 긍정적이고 흥이 넘치는 녀석이었지. 하지만 일주일 전에 갑자기 마물로 변해버렸어. 정신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날 해치지 않으려고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저 창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 부디 그 녀석의 고통을 끝내다오.”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시며 비비를 부탁하셨다.

돈을 보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시니 되도록이면 비비를 한 방에 보내주도록 해야겠다.

“저희가 꼭 비비를 해방시켜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반쯤 마시던 보리차를 남겨두고 할머니를 포옹해드렸다.

그리고 라우라와 함께 집에서 나와서 비비가 갇혀 있다는 버려진 창고로 향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고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이런 곳은 그냥 싹 밀어버리지 왜 방치하나 모르겠다.

역시 돈 때문이겠지?

“여기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려나?”

“아마 괜찮을 거예요. 정식으로 의뢰를 받았고 경고판 같은 것도 없으니까요.”

“좋아, 일하러 가자.”

“잠깐만요.”

라우라는 내 팔을 붙잡더니 복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친절하게도 직접 내게 복면과 고글, 장갑을 차례대로 씌워준 뒤에 망토까지 입혔다.

“복면과 고글로는 얼굴에 튀는 생체물질을 막을 수 있고 유사시에 망토를 이용해서 전신을 가릴 수 있어요. 손은 혹시 작은 상처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장갑을 끼는 게 좋고요.”

“출발하기 전에 네가 설명을 잘 해준 덕분에 무탈하게 끝날 것 같아.”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그런데 이거 좀 웃기지 않아? 하하핫!”

깨진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은 모험가가 아니라 은행 강도나 다름없었고 그건 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복면을 쓴 2인조 노상강도다.

지나가던 기사단 사람들이 불심검문을 요구하거나 즉결체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게요. 예상은 했었지만 상상 이상이에요. 푸흡!”

계속 웃음을 참던 라우라도 결국 터져버렸다.

나와 라우라는 서로를 보면서 한참을 깔깔거리면서 웃은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들어가자.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시잖아.”

“네, 레베카님.”

내가 무거운 창고 문을 낑낑거리면서 열고 들어가자 엉망이 된 내부사정이 우리를 반겼다.

과거에 물건이 가득 쌓여있던 선반은 모조리 무너졌고 천장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데다 바닥에는 온갖 잡초들이 자라난 상태였다.

게다가 조금 그늘지고 습하다 싶으면 곰팡이나 이끼가 무성했다.

유일하게 좋은 점은 어둡지 않아서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라우라, 내가 오른쪽으로 갈 테니 넌 왼쪽으로 가. 목표가 나타나면 바로 소리치고.”

“네, 조심하세요. 위험하면 도망치시고요.”

“응. 그럼 가보자.”

나는 라우라와 떨어져 창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라우라와 같이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혼자 있으니 내 발자국 소리조차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내 귀에 무언가 자루 같은 것이 바닥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력권총을 앞으로 조준한 상태로 천천히 움직여서 소리의 근원으로 다가갔다.

‘씨발, 저게 그 마물인가본데. 존나 역겨워.’

가까운 곳에서 꿈틀거리며 괴성을 내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생물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비비라는 이름의 개는 전신이 검은색 무언가로 뒤덮여있었고 등과 배에서 기괴한 촉수와 벌레의 다리 같은 것들이 자라난 상태다.

거기에 머리는 4갈래로 갈라져서는 그 안에 제멋대로 생긴 이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고 목구멍에서는 얇은 촉수다발들이 튀어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기존의 앞다리는 비정상적으로 뒤틀렸고 인간의 팔처럼 생긴 새로운 다리 8개가 돋아나 비대칭적인 몸을 지탱했다.

무엇보다 역겨운 점은 전신에 다양한 크기의 눈들이 돋아나서는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아직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어. 한 방에 끝내자.’

나는 비비였던 괴물 몰래 놈의 머리에 마력권총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비비는 한 방에 죽기는커녕 총알을 맞자마자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미친 듯이 날뛰면서 주변을 아무렇게나 공격했다.

작은 애완견보다 조금 큰 덩치가 촉수와 벌레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주변에 있는 금속을 자르고 목재를 찢고 돌바닥을 부수는 모습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나는 남은 5발의 총알을 모두 퍼부었지만 비비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비비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장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사건현장으로 합류한 라우라와 함께 비비를 공격했다.

우리는 거의 20발에 가까운 총알을 쏜 끝에야 겨우 비비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레베카님,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저 괴물을 끝장낼 수 있었어. 아, 지친다. 얼른 돌아가자.”

“마물의 시체는 반드시 불태워야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우라는 주변의 낙엽과 목재를 긁어모아서 비비의 위에 덮은 다음에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곧 역겨운 냄새와 함께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고 새빨간 불꽃이 불쌍한 비비의 시체를 집어삼켜 더러움을 정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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