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예기치 못한 위험(8)
* * *
“아름다운 곳이네요.”
알록달록 피어난 기화요초들 사이를 거닐던 아르벨라는 대피령에 도망친 아이가 놓고 간 걸로 추정되는 나무에 걸린 풍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길에 따라 내려오는 풍선을 쥔 채 유천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노는 거 같아 기분이 좋네요.”
“이런 곳을 좋아했어? 내 기억에 아르벨라 너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평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아르벨라가 위원회의 기사단장이라고 하지만 결국 군인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끝나지 않은 전쟁을 두고 누리는 거짓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저 평화가 피 값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아니까. 하물며 실제로 멸망을 보고 회귀를 한 것까지 고려하면 혐오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죠. 일상을 영위할지언정 저는 이런 평화를 본래라면 그렇게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아니 정확히는 이해가 돼요. 어째서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이런 것에 심취하는지.”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피우고, 기아로 배를 곪는 상황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거기에는 합리성이 배제되어 있지만,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르벨라는 자신 또한 그러한 인간임을 느꼈다.
지금 당장 전장으로 나가 하나라도 강대한 괴수들을 죽이는 게 합리적이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천과 함께 있는 게 즐겁고, 그가 자신만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것에 마음이 설렌다. 당면한 현실을 손에서 놓고 그와 떠나 단둘이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는다.
무의식의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초월자인 자신조차 이러한 본능에 반하기 힘든데, 평범한 자들에게 그건 하나의 심마로 다가올 것이다.
아르벨라는 노란색 이름 모를 꽃 앞에 쭈그려 앉아 꺾어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 관종이라던가 공주병 말기 환자라느니 하면서 속으로 욕했겠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외모는 그것조차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었다.
“어때요? 저 예쁘죠?”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걸 본인 입으로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네...?”
“후후...본인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미인은 없어요. 하물며 저 정도 되면 오히려 겸손하면 욕먹는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입가를 가리고 웃는 아르벨라를 본 유천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지만, 그녀의 자신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에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못 믿으세요? 지금 당장에도 제 집무실에 되지도 않은 사랑을 읊은 편지들이 산처럼 쌓이고 있을 건데도요?”
“하하하...냉정하네.”
“흥...! 그래 봤자, 제 외모, 권위, 무력, 명예를 탐하고 싶은 버러지들이죠. 저쪽에는 애만 낳으면 여자는 고분고분해진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 넘치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특별한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건 중앙세계라도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아르벨라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여인 중 하나. 그녀의 무력이나 업적은 경외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겁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넘쳐났다.
마헬 제국의 검궁을 수백 년 노괴인 카트레나에게 구혼을 하기 위해 오르는 자들도 있는 판국에 말해서 뭐할까?
주제도 모르는 인간 군상들을 떠올린 아르벨라는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곁에 유천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게 보이고 싶기는 어느 여인과 마찬가지였다.
꽃밭을 넘어 양쪽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숫길까지 걸어 시야가 탁 트인 언덕에 올랐을 때쯤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유천의 권능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산 너머로 져가는 노을을 둘은 가만히 쳐다봤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는 않았다. 아직 어색하기에 둘은 일정 간격을 두고 있었다. 아르벨라는 잠이 든 유천의 머리를 쓰다듬을 정도로 적극적인 여인이었지만, 제정신인 그에게 함부로 다가가기 심리적으로 부끄러웠다.
‘언젠가...’
그녀는 언젠가 이 간격이 줄어들기를 바랐고, 그날이 길지 않을 것임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붉은 색이 저물어 점차 보라색으로 하늘을 수놓을 때쯤 아르벨라는 고개를 들어 유천을 바라봤다.
“유천님.”
“응?”
“이 지구라는 곳...좋은 차원이라 생각해요.”
여느 문제가 쌓여있었지만, 그건 어느 차원을 가도 같다. 절묘한 균형 속에서 금방이라도 금이 가 부서질 평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아르벨라는 그것만으로도 이곳을 높게 평가했다.
“그만큼 침을 흘리는 짐승 새끼들이 모이고 있는 차원이고요.”
“넌 누군지 알아?”
“네. 알고 있습니다. 꽤 귀찮은 이름들이 많더군요.”
위원회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구에 여러 관심을 보내고 있는 Top 5들이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Top 5는 거기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거기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르벨라 본인조차 유천을 만나는 것 이외에 어떠한 개입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포함한 그들은 유천님을 경계하거나 배제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알아서 먹어치우라는 건가...?”
“네. 동시에 그들은 유천님이라는 존재에 끌려 어떤 먹이가 걸리길 바라고 있어요.”
“먹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건...”
설마 저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해 유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알고 계셨나요?”
“...딱 한 번 들어본 적 있어.”
과거 해인사에서 마주한 명계의 신수. 그 신과 같은 늑대가 증오를 담아 마주하면 전부 죽이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르벨라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신수라...귀한 존재를 마주하셨군요.”
아르벨라라도 그와 비슷한 존재인 드래곤을 멸망 직전에 마주한 게 전부였다. 자신이 꾸미고 다듬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영면에서 깨어나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장면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신수라는 존재를 불러온 팔만대장경이라는 아티팩트에 대한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헥사곤 타블릿에 담긴 염원도 대단한 수준이었는데 이전 완전한 상태였을 때의 그건 분명 아티팩트들 중에서도 최상위 넘버링이 매겨질 물건일 것이다.
“그래. 대단했지...숨도 쉬기 어려웠으니까. 그리고 내게 이 권능을 주기도 했고.”
화르륵...
아르벨라는 유천의 손을 휘감은 황금빛 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하나 태우지 않는 저 불은 유천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불사 지르는 재앙으로 태어날 것이다.
통제와 조율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저건 그걸 감수할 정도로 매력적인 힘이었다.
“어쨌든 놈들에 대해 아신다니 녀석들이 저지른 죄악 또한 아시겠군요.”
“그래...”
유천은 인상을 왈칵 구겼다.
“인공적인 신을 만든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게 아니야. 인간이 더 높은 존재를 바라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놈들은 정도를 지키지 않았어.”
창조주가 세상을 위해 세운 기둥을 억지로 비틀어 이용하다 부숴 먹었다. 그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아르벨라 너는 알아? 그게 뭔지?”
“...모르지만 예상이 가는 게 하나 있어요. 그리고...”
쿠구구구...
핏빛을 담은 아르벨라의 눈이 싸늘하게 웃음 지어졌다. 거기에 담긴 감정은 유천이 보아온 어느 살의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해가 가요...나머지 Top 4들이 어째서 놈들을 그리도 찢어 죽이고 싶어하는지...고작 흔적을 발견한 것만으로 외차원으로 기어들어간 것 또한 말이죠. 유천님도 예상이 가는 게 있으니 제게 물으신 거겠죠?”
“그래...추측일 뿐이지만...”
카렌과의 전투로 부상을 입었던 킬리언이 깨어나 자신에게 말해줄 것이 있다하여 들어간 그녀의 방에서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며 들려준 이야기.
어지간한 것에 덤덤했던 그녀도 혐오와 경멸을 숨기지 못했던 진실을...그리고 유천 또한 그 말을 듣고 구역질을 할 뻔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기분이 땅으로 추락했다.
절대방위선은...전장이 아니야...
“뭐?”
내차원과 외차원에 서로 의사를 나눌 지성체가 있음에도 수만 년 동안 그걸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절대방위선을 유지한 이유.
처음에는 외차원에서는 넘치는 괴수를 소모하기 위해, 그리고 내차원의 상층부는 권력을 놓치기 싫어서가 이유인 줄 알았다. 아니 아마 절대방위선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자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쁜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킬리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곳의 본질은 더욱 추악하고 더러웠다.
내가 아래에 있던 군주님에게 듣기로는...그곳은...하나의 마법진이자, 주술판이라 하였어...
그녀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했다. 절대방위선의 실체는 창조주의 유산이 없어진 세상을 지탱하기 위해 지어진 수백 개의 차원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마법진이자 고대의 주술판이라는 것.
하지만 유천은 잊을 수 없었다. 그 별거 없어 보이는 말에 이를 갈며 눈을 좁히는 그녀의 표정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러한 표정을 지을 만큼 그녀의 심기는 어지러웠다.
내가 마법이나 주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하나는 알지. 그건 저 밖에, 완성된 동력원에 기름을 넣으면 굴러가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게...무슨 말이야...?”
유천 정말 몰라서 물어?
“.........”
마법이나 주술의 재료로서 값어치가 높지만, 전쟁터에서만큼은 가장 싸구려인 것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고?
유천은 그 말의 무게에 침묵했다. 몰랐던 게 아니었다. 그저...무의식적으로 저게 진실일 리 없다고, 없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과 주술은 기본적으로 대가를 바쳐야 작동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전쟁터에서.
가장 비싸면서도 싸구려인 제물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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