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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이 마법이다-112화 (112/116)

〈 112화 〉 예기치 못한 위험(5)

* * *

끼익.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들어오는 세 사람을 보고 양하연과 엘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유천씨!”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두 눈을 감은 채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거친 전투의 흔적. 양하연은 킬리언의 뒤, 이쪽을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을 노려봤다.

“당신이 이런 건가요?”

“글쎄...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당신!!”

마음에 둔 남성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초라한 몰골로 모습을 보이자 눈이 돌아간 양하연이 정령력을 끌어올렸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내부 공간.

유천을 만나고 짧은 시간. 뛰어난 재능으로 상위 랭커에 한 발짝 가까워진 묵직한 기세였지만, 검은 머리 여자, 아르벨라에게는 그 정도 기세의 폭풍은 한낱 봄바람에 불과했다.

‘그래도 제법이네.’

중앙세계에서 정령사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

다양한 힘을 다루는 대신, 정령의 느린 성장력을 고려하면 엘프 같은 장생종이 오랜 세월 힘을 키우지 않는 이상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인간이나 오크 같은 평균 수명이 100년도 채 안 되는 단명종에게 어울리는 공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르벨라가 알아본바 양하연 그녀의 나이는 고작 30대. 20대 후반쯤에 랭커에 진입한 그녀가 이런 농밀한, 상위 랭커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는 건.

아르벨라나 유천 같은 이질성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점을 지녔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저런 어린 나이에 저 정도 경지에 든 정령사는 아르벨라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과연 이그드리실 108정령관 후보에 들었던 자다워.”

“뭐...?”

“어느 곳보다 폐쇄적인 이그드라실에서 하프엘프의 몸으로 그 후보에 들었다는 건 자격을 증명했다는 얘기가 되겠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정령관. 이그드라실이 정한 108명의 정령교관들. 정령을 가꾸고, 교감하는 비결을 전수하는, 한 마디로 이그드라실 최고의 정령사를 꼽는 자리다.

이그드라실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양하연 본인이 원치 않았고, 하프엘프라는 차별로 후보 자리에서 멈췄지만, 단순한 실력만으로 볼 때 그녀는 최고의 정령사라 말할 만했다.

그러나 전쟁에 특화된 정령사의 성격상 암살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심사하는 과정은 이그드라실 내부에서도 엄중하다. 그런 비밀을 눈앞의 여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에 담으니 양하연 그녀가 경악할 수밖에.

휘이이잉...!

내부를 감싸는 바람이 점차 칼날의 그것처럼 얇아지고 날카로워진다. 회의실 내부의 대기가 마치 거대한 믹서기처럼 미친 듯이 회전하는 아래, 양하연이 살기를 담아 입을 열었다.

“너...누구야?”

“운용이 제법이네?”

회의장이니만큼 종이쪼가리들이 많았지만, 어느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그건 이 거친 칼날의 폭풍을 완전히 통제하여 오롯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

아르벨라가 이곳에 들어와 사전 설명을 하지 않고 무작정 도발한 것은 이들이 유천의 부상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또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합격.’

성향 그리고 현재의 능력이나, 미래의 성장성 셋 모두 마음에 든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했을 텐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정령이란 자연에 가까운 만큼 기색을 읽기 힘들다. 하지만 그 순환에도 시작과 끝은 존재한다. 눈을 굴려 환류 지점을 찾아낸 아르벨라의 팔이 순간 가속으로 희미해지고, 턱! 무언가를 쥐었다.

......!!!

“귀여운 아이네.”

“윈디!!”

양하연 그녀의 가족과도 같은 존재인 바람의 정령 윈디가 아르벨라의 손에 잡힌 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의 포악한 기세에 덜덜 떨었다.

그 모습에 흥미를 잃은 아르벨라는 양하연에게 윈디를 던졌다.

“자. 소중한 건 품 안에 잘 간직해 둬야지.”

“너...!”

“그만! 그만하시오. 하연양.”

“하지만...! 협회장님!”

“하연양...너무 오래 쉬다 보니 이전의 감은 다 잃으셨소?”

“큭...!”

질책을 담은 이만성의 눈빛과 말. 그 의미는 명확했다. 용병 시절 이성이 아닌 감정에 동요되어 움직인 자들은 전부 죽었다. 즉 여기까지 하라는 것.

후우...

한숨을 내쉰 양하연은 재밌다는 듯 눈을 좁히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당신께서 데리고 온 사람이 그만큼 저에게 중요한 터라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진짜...재밌네?”

공손해보이지만...결국 유천을 저렇게 만든 것이 본인이라면 다시 한 번 무례를 저지르겠다는 것. 그 속뜻을 읽어낸 아르벨라는 내심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양하연의 어깨를 툭 치고는 지나쳤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된 거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뭘 하신 건지...’

그 짧은 시간 뭘 어떻게 했으면 저 정도의 여인이 수준 차이를 파악했을 것임에도 목숨을 내걸려고 한다는 말인가?

“뭐, 그건 나중에. 지금 내가 이곳에 온 건 다른 이유니까.”

이 여자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건 거슬리지만, 다른 부분들에서 합격점 이상을 줄 수 있었다.

‘이제 다른 자들도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르벨라는 한껏 굳은 얼굴을 한 이만성 앞에 서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봐 영감...”

“한 가지 오해만큼은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하오. 저는 그녀를 이용해 당신을 시험해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만성은 테이블에 눕혀진 유천을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저 두 분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당황하여 그런 것이니...그가 저리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올 줄이야...”

“.........”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을 시험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소.”

“솔직한데? 그러다 죽어.”

“한낱 개미의 발버둥을 때려잡을 인물이라면 이 나라를 더욱 절망 구렁텅이에 빠트리겠지. 그땐 이 늙은이의 목숨 걸어 최후의 희망만큼은 살릴 것이오.”

“.........”

흔들림 없는 눈빛. 전직 용병이라더니 그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모습에 그녀는 흥미를 느꼈다.

“‘회색묘지’ 수복이란 공을 세웠으면서, 동료들의 죽음에 모든 재산을 내려놓고 은퇴한 용병이라더니. 그 책임감 하나는 인상 깊네.”

“...아픈 곳을 찌르시는군.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오. 손녀가 있어 돌아온 것이고, 이 자리를 받은 거니까.”

양하연의 비밀을 풀어헤쳤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 또한 이 여인이 알고 있을 거라 미리 생각했기에 미간만 좁혔을 뿐 흥분하지는 않았다. 다만...가슴은 쓰렸지만.

“당신이 뭘 믿는지는 알겠어. 확실히 보통은 아니야. 근데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 큰일 난다?”

“...무슨 말씀이시오?”

“저거.”

아르벨라는 창밖 하늘. 정확히는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고 있는 결계로 손을 뻗었다.

“이것저것 추가했지만, 그 안에 깃든 거대한 소망을 나도 읽어내는데 하물며 위원회 직속 ‘유물단’이 못 알아챌까?”

“.........”

오직 아티팩트를 수거하는 집단인 위원회 직속 탐험부대 유물단. 헥사곤 타블릿의 본체가 아티팩트임을 알아챘다는 말에 이만성은 할 말을 잃어 입을 꾹 다물었다.

“조심해. 유물단 그 지독한 놈들이 명목으로는 위원회 직속이지만 실상은 아드릭센을 따라는 자들이니까. 걸리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

양하연을 손쉽게 제압하는 실력, 아티팩트에 대한 이해와 통찰, 그리고 랭킹 1위 ‘더 원’ 그 이름을 저렇게 허물없이 부르는 점이나, 이 여인이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을 거물이라는 것에 이만성은 진땀을 흘렸다.

“...가르침 감사드리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무례를 범했음에도, 이만성의 위치에서는 알 수 없는 저런 사항들을 대가 없이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녀가 나름 이곳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됐어 뭘...잠깐 너.”

“네에...?”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거려?”

아까 유천을 걱정하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엘리스가 바보같이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자 아르벨라는 눈살을 좁혔다.

“헤헤...저는 어떻게 평가하실지 궁금해서요오...”

“...이것 봐라?”

이 분홍 머리 여자의 통찰력이 보통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에 아르벨라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 바보 같이 얼빵한 미소는 하나의 처세술이겠지.

그럼에도 속내를 드러냈다는 건...

“믿어달라는 건가?”

“헤헤...”

엘리스가 여전히 어리버리한 얼굴을 한 채 머리를 긁적였지만, 아르벨라는 속지 않았다.

양하연이 유천에 대한 마음올 보였고, 손녀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만성이 지닌 책임감은 확인하였다.

그러나 둘과는 달리 이 분홍머리 여자는 본진이 여기가 아니었고, 유천을 걱정하는 마음은 비쳤지만, 고작 그것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당사자가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들도 있는 법.

아르벨라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유천 단 하나.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중에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이끄는 집단 내부 불화의 씨앗을 모조리 으깨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아르벨라는 본인이 지금 심판대에 올랐다는 걸 모른 채 웃고 있는 엘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멜데이라고 아나? 아니 아델리아 그 오래된 하이랭커의 제자인 너는 알고 있겠지”

위대하고 존경하는 스승의 유일한 과거의 결점에 웃는 표정 그대로 굳은 엘리스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하하...화이트의 치욕을 굳이 입에 담으시는 이유가...”

“최근 저쪽에서 제법 그럴싸한 얘기가 나돌아서 말이야.”

아르벨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가 엘리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어지간한 연예인을 뛰어넘는 미인 두 명이 달라붙어 있는 광경은 눈이 즐거울 만했으나, 둘 사이의 분위기는 빙하의 그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정확히는 아르벨라의 기세가 엘리스를 누르고 있었다.

“멜데이아와 그와 관련된 핏줄은 모조리 도륙 낸 일은 수십 년이 지나도 화이트 일족 내에서 말이 나오지.”

“.........”

“그런데 최근 그게 아델리아가 멜데이아에게 모함을 씌워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하는 건 아나?”

“무슨?!! 말도 안 돼요!! 스승님께서 그럴 리 없습니다!”

자신에게 삶의 대부분을 준, 부모와 마찬가지인 존재에 대한 모독에 엘리스는 거세게 반응했다.

‘가면이 벗겨졌군.’

분노와 경악에 휩싸여 벌떡 일어난 엘리스를 보며 아르벨라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물론 내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이 떠돈다는 것 자체에서 지금껏 억눌러온 여러 문제를 터뜨리게 될 거라는 건 사실이지.”

실제 지구에 오기 전 내부 정보를 수집한 아르벨라는 드라고니아 내부에서 멜데이아를 복귀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흘러나온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근데 내가 이곳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킬리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엘리스도 덩달아 그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보아하니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나보군.

“멜데이아. 아까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너도 그와 관계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여기서 저 여자가 왜 나온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의문을 가진 차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엘리스의 입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 남자는 이곳에서 죽었으니까. 나와 유천의 손에.

“...좀 더 자세한 얘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뭐 그러지.

흉성의 병사로서 키워진 빌런 각시탈. 그리고 그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맴버와 이어진 전투. 킬리언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듣네요오...”

엘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곧 저 이름 모를 여인이 한 질문의 의도를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한마디로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하다는 건가요오...?”

“근본이 인간임에도 차기 용성주(???)에 내정된 엘리스 파셀. 네가 그걸 포기할 수 있을지 나는 알아야겠어.”

“정말...모르는 게 없으시군요오...”

용성주라는 자리가 용인족들을 보호하는 성체의 주인인 만큼 논란거리는 좋지 않다. 혈족을 중요시하는 용인족. 멜데이아에 대한 동정여론이 존재하는 이상.

그 자가 죽은 곳이 이 한국이라는 걸 그들이 안다면. 그럼에도 아델리아의 유일한 제자가 그 원흉과 붙어먹는다는 것에 나올 반발을 고려하면...

그녀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엘리스 또한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임은 분명했다.

‘용성주와 유천씨라...’

하지만 그 고민은 짧았다.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킬리언과 양하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만성.

절벽 끝에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하는 이 이름 모를 악마 같은 여인.

그리고...이 상황에서도 편안히 잠을 자는 듯 보이는 유천까지.

그들 모두를 둘러본 엘리스는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

“예?”

“당사자께서도 직접 듣는 걸로 하자고.”

입을 여는 자신을 막고, 유천을 꽃 같은 미소로 쳐다보는 아르벨라. 그에 이 자리의 모두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휙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눕혀진 유천을 쳐다봤다.

“으...”

유천의 눈이 닫힌 채 떨려왔으며 입에서는 곧 깨어날 듯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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