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예기치 못한 위험(4)
* * *
협회 본관 건물. 그 입구 앞. 담배를 문 거칠게 수염을 기른 중년인과 젊은 청년. 두 남자가 사람 하나 없는 넓게 트인 도로와 광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치이익...
“과장님 고위관료와 의원님들 그리고 시민들의 대피가 끝났습니다.”
“다른 지역은?”
“서해 라인에 포함된 각 도시 협회 지부장분들과는 방금 연락을 마친 참입니다.”
“생각보다는 쉽게 끝났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아카데미의 교수분들이 통제를 위해 나서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꽤 의외군.”
미래, 생존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
그런 이만성의 주장에 따라 한반도 내 지맥이 가장 활성화된 서울과 대전 가운데의 충주지역에 건립된 각성자 아카데미.
그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이 지구의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학문을 모은 차원으로 이름 높은 리브레스.
이도경과 이만성 이 두 사람이 중앙세계에서 쌓은 인맥으로 들인 교수단은 그들의 의도대로 어떠한 정치나 외부의 힘에 의한 흔들림 없이 중립을 지키며 아카데미라는 세력을 한국 최고의 전력으로 우뚝 서게 했다.
덕분에 아카데미 출신의 졸업생들 전력이 더욱 강화되어, 이만성 이전에 아카데미라는 이름이 그저 명찰만 좋은 허울뿐인 엘리트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가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는 고고한 중립인 만큼 국내의 사건·사고에 개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전 카룬의 팀장이자, 현 각성자 협회 과장인 문강선이 알기에는 그러했다.
“후우...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이걸로 한숨 돌렸군...”
이강선은 담뱃불을 짓밟아 끄다 머리를 스친 한 가지 생각에 인상을 구겼다.
“언론은?”
“...아시잖습니까? 그 치들이 특종거리에 얼마나 예민한지 말입니다. 이곳은 현재 완전 통제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지만...밖에서는 난리라는군요...”
“그래 시발...협회가 이런 사건에도 소집령 없이 시민대피에만 힘을 쓰는 것에 찍찍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당장 문강선 자신만 해도 총력을 각성자 총원을 동원해 서해안으로 달려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저곳에 솟아났던 금빛으로 타오르는 나무는 너무도...위압적이었고, 비상식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과거 그와 같은 팀장이자 현 협회장 비서인 나미령으로부터 들어온 대답은 그의 생각을 벗어나 있었다.
대기하라고 하십니다.
뭐...?
시민 안정에만 힘쓰라는 게 협회장님의 명입니다.
소집령도? 아니 그 이전에 저건 그럼 어떻게 하고?
...언제부터 카룬이 협회장님의 명에 의문을 가졌습니까? 문강선 과장. 그 자리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제길...알았다. 그렇게 하지.
‘분명 뭐가 있는데 말이야...’
그때 그렇게 말했던 나미령의 표정에도 알 수 없는 혼란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도 현 상황에 의문을 가진 건 마찬가지란 거겠지.
각성자 소집령 후 해산.
호두호수 발생.
인천 전투와 황금새 테러사건 그리고 어저께 일어난 부산 사태까지.
문강선의 예민한 감은 최근 발생한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커다란 기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협회장님과 관리기구 국장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거 같던데...’
그 사건들에서 협회의 움직임은 단 하나 뒷수습. 마치 한국의 협회가 어떤 세력의 아래를 닦아주고 있다는 불쾌감에 문강선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수상한 건...발토인가...?’
양하연을 필두로 경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수호 길드. 양하연 그녀의 고고한 품성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 움직임이 수상한 건 틀림없었다.
‘조사를 해봐야 하나...아니...그건 너무 위험한가?’
수호길드의 뒷조사를 한 자가 협회의 과장이자, 협회장의 측근이다?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올 사건은 아니다. 논란을 없애겠다는 명목으로 남몰래 제거당하기에 충분한 일.
애국은 단순한 선함으로 이룰 수는 없다.
비록 이만성을 충심으로 따르고 있지만, 국가를 위한다는 마음 아래에 그가 비수처럼 숨겨둔 잔인함.
그것이 비록 자신의 측근을 죽이는 것이라도 일말의 거리낌도 두지 않는다는 걸 문강선은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여쭙는 게 낫겠어...거기서 내게 허용되는 그리고 알면 안 되는 선을 정할 수 있겠지.’
“어? 거, 거기 두 분 멈추십시오!”
문강선은 갑작스러운 부하의 외침에 담배를 물며 라이터를 붙이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보이기 시작한 세 명의 사람에 눈을 예리하게 뜨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듯한 잠이 든 채 떠 있는 남성.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 둘.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문강선도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킬리언이라고 했던가...?’
저 눈에 띄는 은발 머리와 퇴폐적인 보랏빛 눈을 모를 리 없다.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발토의 핵심전력 중 하나. 그녀가 당황하는 부하를 밀어내고 문강선을 향해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발토의 핵심인사에게 함부로 아는 척해봐야 좋을 게 없다. 거기에 뒤에서 미묘한 표정을 옅은 붉은 눈을 한 정체 모를 여인까지.
텅 빈 공터에서 아무런 기척 없이 앞까지 도달했으며, 거기에 성인 남성을 띄운 초능력인지 뭔지 모를 마력작용만 봐도 저 여인 또한 보통은 아닐 터.
아직 그들이 완전한 아군인지 판단이 서지 않은 이상 문강선은 그런 이들에게 자신을 추측할 단서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려온 소리에 그의 안색은 굳어졌다.
입씨름하기 귀찮군. 문강선 과장.
“...어찌 저를...?”
너희가 나를 알 듯 나 또한 알 뿐이지.
“......”
너희의 하잘 것 없는 줄다리기에는 관심 없다. 애초에 이번에 내가 맡은 일 또한 협회장의 의사가 개입되었지. 그러니 시간 끌지 말고 문 열어.
‘듣던 것과는 다르군...’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킬리언이라는 여자는 싸움밖에 모르는 그야말로 야만전사 타입. 미묘한 파워게임에 관심이 없는 건 맞는 것 같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예 그럼 위쪽에 우선 연락부터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뒤에 계신 분은...?”
이쪽 손님. 중요한 사람이니까. 홀대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아니면 전부 죽을 테니까.
킬리언은 뒷말을 가슴속에 누르고 문강선을 재촉했다.
“예 그럼 잠시.”
그가 측근이라도 협회장에게 직통으로 향하는 번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협회 비서실을 통해 들려온 대답은 빨랐으며 간결했다.
입장 허가.
전시 상황에 준하는 현 상황에, 그 중 하나가 발토의 주요전력이라고 하지만, 아무런 연락 없이 온 사람들에게 내려올 대답은 아니었다.
결국 이 나라 각성자의 정점을 향하는 문을 아무런 절차 없이 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뭐가 됐든 명령은 명령.
문강선은 찝찝한 마음을 숨기고 길을 비켜섰다.
“...들어가시지요.”
아무 말 없이 입장하는 킬리언과 살포시 웃으며 옆을 지나치는 여인. 그리고 거친 싸움을 한 듯 옷은 헤져 있지만, 눈에 띄는 상처 하나 없이 공중에 뜬 채 잠에 든 남자.
“시발...묘한데...”
문강선은 그 기묘한 모습에서 꺼림칙함을 느끼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들었다.
*
“그녀가 돌아왔다는구려...”
“그럼 잘 해결된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가라앉으셨어요?”
“문제는 같이 간 남자가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인물이 돌아왔단 거지.”
어두운 표정으로 폰을 만지작거리던 이만성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저 너머로 들어올 누군가에 대한 근심이 담긴 채.
“새로운 인물이요?”
“정확히는 둘이지만, 그 중 하나는 예상이 가는 바요. 유천. 그겠지.”
문강선이 못 알아본 건 아마 유천이 본래의 얼굴을 꺼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유원’일 때와 ‘유천’일 때를 구분하여 변장하니까.
현재 공식석상에 알려진 그의 얼굴은 유원의 것.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시는 것인지요오...?”
엘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건 결국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인데, 걱정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문제는 그가 기절한 상태로 운송돼 왔다는 거요. 그것도 킬리언 그녀도 아닌 모르는 제삼자의 손에 말이요.”
그 말에 그제야 이만성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깨달은 두 여인 엘리스와 양하연 또한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그럼 왜 입장 허가를...?”
“내가 본 킬리언. 그 여인의 행동논리는 단 두 가지요. 생존 그리고 인정한 강자에 대한 굴종. 모욕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지만...짐승의 그것과 닮아있지.”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강자와 싸워 그를 먹어치워 강해지고자 하는 습성. 그것이 불가능하자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비굴함. 그러면서도 유천의 명만큼은 목숨을 걸고 따르는 기사 같은 모습까지.
그녀가 지닌 모순을 이만성은 그렇게 해석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번에 그녀가 이 심부에 함께 데리고 온 여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소.”
“두 가지 말인가요오...?”
재능은 차고 넘치지만, 이만성이 오랜 경험으로 쌓은 눈썰미만큼은 따라가지 못한 엘리스와 양하연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집중했다.
“첫째 이번 일로 은혜를 입은 아군.”
“음...나쁘지 않군요.”
“둘째...항거할 수 없는 무력을 지닌 아군...그것도 유천...그를 짓누를 수 있을 만큼의...”
“...그건...상당히...심각하네요오...”
아군이라도 그 두 개는 상당히 다르다. 첫 번째 같은 경우는 이런 큰일에 도움을 준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또한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전력을 이 땅에 이롭게 할 수 있다.
즉 원하는 것을 제공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기인을 데려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런 사람을 돈과 명예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득이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후자는 다르다. 사람의 생각은 그날그날 바뀌고, 아군이었다 할지라도 후에 적으로 돌아서는 건 드물지 않다. 하물며 그것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만성이 별말 없이 그들을 협회 내부로 들인 이유 또한 그 점이다. 상대가 전자일 경우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후자라면...그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때 양하연이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군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막말로 유천 그를 제압했다는 말은 그다지 좋게 들리는 소식은 아닌데 말이죠.”
“그건 다양한 방향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큰 줄기는 세 가지겠지.”
이번 일의 원흉이거나, 아니면 해결해준 은자거나...그도 아니면 둘 다이거나.
“하지만 원흉은 아닐 것이오. 그랬다면 이런 온건한 방법으로 이쪽에 접촉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해가 좀 되셨소이까. 하연양?”
“...네 감사합니다.”
이만성은 엘리스 또한 그에 의문을 가졌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예상치 못한 생사의 간극이 많이도 찾아오는군...엘리스양, 그리고 하연양 두 분은 먼저 돌아가셔도 되오.”
그러나 이만성의 말에 두 여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길드장입니다. 유일한 내부이사인 유천씨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저도요오...그분을 이유로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려 한 이상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오...”
“허허...알겠소이다.”
저것이 그저 핑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저 순수하게 그를 걱정하고 있음을 눈치챈 이만성은 허탈하게 웃었다.
‘여복인지 여난인지...’
한 명이면 모를까 개성 넘치는 다수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꽤 고단한 일이리라.
쿵. 엘리베이터가 회의실이 존재하는 최상층에 닿는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문으로 향했다.
이만성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고치고 상석이 아닌 두 여인이 앉은 반대쪽에 자리했다.
“그럼 어떤 분이실지 모르겠으나...손님을 받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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