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예기치 못한 위험(3)
* * *
“재밌네...하필 카이안 그 놈이 이 차원에 터를 잡았다라...”
유르힘의 팔다리를 꺾어 집어던진 아르벨라는 킬리언에게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하필 고르고 고른 차원이 지구일 줄이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오히려 커다란 필연의 고리에 엮인 무언가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의심은 안 가는가?
“무슨 의심?”
유천...그가 너를 배신했다는 의심.
아르벨라 본인이 멸망시킨 거대가문의 살아남은 후계자.
그 존재가 후에 그녀에게 어떤 귀찮음과 위험을 안겨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거기에 그리고 그런 존재를 살려서 아래로 뒀다는 건 인간의 사고를 습득한 킬리언의 눈에 충분히 배반행위로 오해할 여지가 충분해 보였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네.”
유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킬리언의 굳은 표정을 보고도 아르벨라는 피식 웃고는 여전히 잠든 유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은 전제 조건부터 틀렸어.”
무슨 소리지?
“애초에 카이안 그 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군...후환이 될 자를 살려둔다고?
“수천 년. 베렌듀크가 그 기간 동안 모아온 귀물들을 어떻게 보관할까?”
베렌듀크의 멸문 후. 아르벨라가 그들 본가의 재산을 눈을 감아주고, 도와준 대가로 이곳저곳에 뿌렸지만, 그건 한낱 일부일 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들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있다.
혈류(血?)경계.
가주의 자리를 받은 베렌듀크 직계의 살아있는 피와 영혼. 그리고 몇 개의 절차를 더해 입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보물고. 한 번 세상의 정점에 서 보고, 온 세상을 떠돌았던 아르벨라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통제를 할 수 없는 당대 가주를 죽이고, 나약한 후계 놈을 살려서 붙잡으려고 했지. 그런데 생각보다 당대 가주의 힘이 강했어. 산 채로 붙잡는 건 포기해야 할 정도로.”
죽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르벨라가 익힌 천살지멸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으로 별을 꺾어 신에 닿고자 하는 역천의 공부.
인간의 한계에 막힌 자가 별의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세가 한풀 죽었다고는 하지만 위원회 13석의 일원인 베렌듀크의 저력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안 되었다.
카이안을 붙잡으려는 아르벨라의 의도를 알아챈 카르딘 베렌듀크의 동귀어진은 그녀조차 식은땀을 흘릴 수준이었으니까.
그렇게 제대로 자리를 잡은 후 유일한 직계이자 가주인 카이안을 붙잡기 위해 막대한 인력과 금력을 풀었지만, 그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런 카이안이 이런 외곽차원에서 볼품없이 사로잡혔을 줄이야. 아르벨라는 다시 한 번 기가 막힌 우연에 감탄하고 유천을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유천님도 아셨겠지.’
멸망한 베렌듀크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존재의 위험도를 모를 리 없다. 아르벨라가 혈류경계의 존재를 안 건 유천이 사라지고 나서 온갖 보물들을 찾아 떠돌아다닐 때의 일이지만, 아르벨라는 그라면 알고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
유천을 굉장히 신뢰하는군.
“왜 못 믿겠어?”
아르벨라의 반문에 킬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정도의 강자가 고작 그런 걸 가지고 거짓을 말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그의 기억 이전에 너와 무슨 관계였는지.
“과연...그런 변명이었나?”
그건 무슨 말이지?
“됐어. 이쪽 얘기니까.”
킬리언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아르벨라를 불만 서린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내 이야기는 전부 했다만...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인가?
“하하하! 강자는 약자를 침탈한다. 그게 이 세상의 근본 아니던가? 듣고 싶으면 나를 이겨봐.”
...그의 곁에 머무는 여인들 전부가 거슬리지만, 그대도 만만치 않네.
“그렇게 삐지지 말라고 마족 아가씨.”
아르벨라는 마력으로 유천을 감아 둥실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어떻게 보면 너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무엇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
“이 사람이 한순간의 충동으로 너와 함께하는 걸 선택한 것과 내 신세가 별다를 게 없다는 소리야.”
다른 세상으로 갑작스럽게 던져져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거기에 한낱 필부의 정신으로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괴수들을 마주하는 건 육체는 그렇다 쳐도 정신은 고단했겠지.
적이라지만, 목숨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말에 응답해줄 상대가 필요했을 거다.
혼란 속의 외로움.
유천이 킬리언과 함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정이었으리라.
동정과 외로움. 결국, 둘 모두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인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아르벨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일단 돌아가자고. 들을 것들도 많고, 내가 해줄 이야기들도 많으니까. 그리고...데리고 온 부하 녀석도 진정시켜야 할 거 같거든.”
이 난리가 났는데 유라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분명 하늘에 뜬 일곱별을 봤을 것이다. 초일류 궁수인 그녀가 그것을 놓쳤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아르벨라의 부관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경거망동하지 않겠지만, 지구에서 하이랭커가 날뛸 가능성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럼 저놈은 어떻게 할 거지?
킬리언이 손가락을 향한 곳. 팔다리가 부러진 채 기절해 있는 유르힘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버려둬 상위랭커인 만큼 죽지는 않을 테지. 거기에 주재자의 계약도 맺었다며? 지가 뭘 할 수 있겠어?”
상상계 주재자와의 계약을 어기는 건 아르벨라라도 꺼리는 일이다. 그걸 고작 상위랭커 따위가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가자고 마족 아가씨 너희 본진으로.”
아르벨라는 다시금 미소를 띄우며 유천을 마력으로 감은 채 내륙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마나가 세상의 근본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성질 아래 세상엔 많은 힘이 존재한다.
상단전 정신 계통의 힘을 다루는 초능력, 구체적인 술식을 통해 법칙을 개변하는 마법, 육체를 시작으로 본인의 소우주를 개척해나가는 무공까지.
그 이외에도 많은 힘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 전부 수련을 통해 세상의 근본인 마나를 정제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루는 존재가 많아 주력에 속하면서도, 이들과 달리 이질적인 힘이 존재한다.
신성력과 주술.
그나마 주술은 상상계에 대한 공부와 이해를 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있지만 신성력은 다르다.
신성력을 다루는 데에 필요한 건 단 하나.
믿음.
실존하는 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하나로 엮는 교리를 통해 진실한 마음을 가진 채 기도하고 외우기만 하면 그들이 믿는 근본 아래, 마나는 그 믿음에 따라준다.
불을 믿으면 불과 관련된 힘이, 물을 믿으면 물과 관련된 힘이, 거기서도 다양하게 파생되어, 마법처럼 확고한 이성과 논리로 무장하지 않아도 여러 형태의 이적을 발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가장 추상적인 믿음이 있다면, 창조주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불과 물 같이 자연현상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면서도 위협적이기에 교리는 직관적이지만, 존재를 알 수 없는 창조주에 대한 교리는 차원마다 그럴싸한 역사와 사건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렇기에 각자의 창조신을 믿는 이들은 추상에 대한 믿음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검은 선자들이 더욱 증오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검은 선자들에게 그들은 실존하는 절대자를 배신하고 외면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서걱...서걱...
“크어어어...그만해...”
룰룰루~
그리고 지구에서 창조주를 믿는 종교의 총본산 바티칸.
온갖 다툼이 난무하는 유럽 대륙에서도 가장 강력한 중립파인 이곳을 피로 물들인 채 한 남자를 중심으로 검은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부들의 팔다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으어억...신이시여...”
“에이씨...밥맛 떨어지게”
피와 살점이 떨어지는 기괴한 탑.
그들은 신부들의 상처 부위를 불로 지져 출혈을 막고, 살아만 있는 몸뚱이를 짐처럼 끌고는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꼬챙이에 꽂아 탑을 장식하고 있었다.
“너, 너희는 누구냐...”
죽어가고 있는 신부들과 같은 형식이지만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노인. 당대 교황 카를로프 3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형제자매들을 처참하게 능욕하는 자들을 노려봤다.
“하하하하!! 어리석은 자 같으니. 우리가 누군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검은 선자들...”
바티칸을 뒤덮고 있는 강력한 신성결계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자들.
그런 강력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지구 같은 외곽차원의 종교를 이토록 잔혹하게 대할 자들은 그들뿐이었다.
“호오. 그래도 그 대가리가 장식은 아니었나 봅니다?”
검은 선자들에서도 가장 잔인한 이단심문부대인 호룬달의 1급 심문관 파루난케. 얼굴에 피와 내장을 묻힌 채 어울리지 않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그는 카를로프에게 다가갔다.
“쿨럭! 우리는 신성연합에 가입되어 있다. 그들이...그 위의 위원회가 가만히 있을 거 같은가?!”
“흐흐...이런 곳에서 우리 속 돼지마냥 편하게 살아서 그런가 머리는 제법 잘 굴리는 것 같으나 우둔하기 짝이 없어.”
“크윽...!”
파루난케는 카를로프 3세의 머리를 붙잡아 올리며 살소를 띄운 채 비웃었다.
“큭큭큭...! 신성연합, 우리한테서 살아남기 위해 뭉친 그 버러지에 겁쟁이인 오합지졸들이 고작 너희 따위를 구하러 우리를 적대할 거라 생각하나요?”
“우, 우리는...!”
“신성연합에 가입되어있는 종교만 수천 개. 믿음의 주체가 각양각색인 놈들이 모여봤자 대가리 수천 개 달린 뱀새끼에 불과합니다.”
하하하하하하!!!!
광소를 터트린 파루난케는 카를로프의 머리를 붙잡은 채 질질 끌어 거의 완성되어 가는 인간의 탑을 향해 걸어갔다.
“이, 이거 놓아라!!”
“위원회 또한 마찬가지. 위대한 아드릭센은 무감할 것이며, 모든 걸 보는 백선은 여전히 관망만을 할 것이고. 검(?)과 무(?)와 마(?) 또한 무관심한 건 다를 바 없겠죠.”
“이...이이이건...!!”
피와 내장을 흘리며 불길하고 악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건축물.
아니 역십자(???) 앞에서 던져진 카를로프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신중한 영감은 굼떠서 때를 놓칠 게 뻔해요. 그러니 어떡하겠습니까. 이쪽에서 먼저 그럴싸한 판을 깔아줄 수밖에.”
거기에 거슬리는 종교 하나를 지우고 말이야.
실존하지 않는 추상을 믿는 우매한 자들을 진정한 신께 보내는 것이야말로 운명이며 존재의의라고 믿는 파루난케는 입꼬리를 귀 아래까지 끌어올리며 카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상징의 역순은 어느 종교든 최고 수준의 신성모독에 속하는 편입니다. 너희가 믿는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박혀 죽었다던가요?”
“네 이놈!! 신이 두렵지 않은가!!”
“하하하!!! 네놈들이 믿는 신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 내려온다면 이 몸이 친히 고문해드리죠!!.”
파루난케는 검은 신성력으로 카를로프의 팔다리를 엮어 그의 머리가 바닥을 향하도록 뒤집어 추기경과 신부들의 피와 살점으로 만들어진 저주받은 역심자가에 들이대었다.
“이왕이면 여체인 게 좋겠어요. 근육보다는 야들야들한 속살이 더 손맛에 좋거든요.”
“이놈!! 천벌을 받을 것이다!!”
“진정 우리를 벌할 수 있는 분은 세상 단 하나. 아버지 창조주뿐이십니다. 네놈들이 믿는 그런 하찮은 이물 따위가 아니라.”
파루난케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서 망치와 말뚝을 꺼내 들었다.
두근...! 두근...!
살아있는 것처럼 핏줄이 돋아나 꿈틀거리는 대못에서 풍겨 나오는 저주의 기운은 바티칸 신부들의 피륙으로 만들어진 역십자 이상으로 불결하고 더러웠다.
“하나에서 비롯한 종교의 결은 주술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상징의 오염은 그 자체로 신성의 오염에 귀결된다. 너희 놈들의 종교를 믿는 자들이 이 땅에 상당하던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나?”
“이 악마 같은 놈들...!!! 네놈들은 지옥 깊은 곳에서 영겁의 세월 동안 타오를 것이다!!!”
“명계의 존재와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을 배척하기만 하는 구닥다리들과는 의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명계는 악을 구제하는 곳이 아니라, 업을 지우고 윤회를 위한 세상. 명계와 악 둘 모두 창조주의 아래 탄생한 것인데 그걸 멋대로 규정하고 선별하는 카를로프의 말은 파루난케의 상식에 한없이 어긋나 있었다.
그에 벌레 보듯 혐오스러운 표정을 한 채 말뚝을 카를로프의 손등에 대었다.
“저곳에 가서 보고 있으십시오. 멍청한 사이비. 너희의 종교가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지 말이죠.”
“크아아악!!”
아름답고 고결한 백색이 추락해 붉게 물든 땅에서는 그렇게 쿵쿵 말뚝 박는 소리와 비참한 단말마만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