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예기치 못한 위험(2)
* * *
뚜벅. 뚜벅.
격리결계 헥사곤 타블릿 밖. 녹았다 굳기를 반복하여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여전히 치명적인 열기를 담은 증기가 치솟는 땅.
그 속에서 각자 다른 느낌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유르힘과 킬리언. 과거 한 차례 격돌했던 두 남녀가 이제는 다른 위상을 지닌 채 마주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하는지 그 여자에게 들었겠지?
“나무의 정체, 그 이전에 우선적으로 그분의 안위 확인이 되겠지요.”
그래...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곳 서해에 유천의 수련장이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실제로 몇 번 가본 적도 있었고. 이곳에서 무슨 수련을 했길래 이런 사고를 친 걸까? 그 규모가 다를 뿐이지. 킬리언은 사고 치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보도록 할까? 어때. 따라올 수 있겠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바다와 고온의 수증기. 거기에 독성을 내뿜으면서 죽어있는 해양괴수들의 악취까지.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피를 토하며 죽게 될 지옥이었지만.
“...무시하지 마시지요.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전 베렌듀크의 팔검이었습니다.”
뛰어난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랭커에 오르고, 정체를 숨기고 빌런으로 살아온 끝에 상위랭커 수준에 도달한 유르힘에게 저 정도는 유황온천에 지니지 않았다.
그래? 자신 있다니까. 그럼 바로 가보자고.
킬리언은 굳은 얼굴을 한 그의 모습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려 발을 박차자 잔상만이 흩날린다.
파바박!
“...그때와는 다르군.”
모습은커녕 그림자조차 안 남기고 바다의 표면을 밟으며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던 유르힘이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세가 줄었다...약해진 건 아니야. 그 짐승 같은 기질이 줄은 거군...”
그저 바다를 박차는 모습에 불과했지만, 유르힘의 안목은 그 안에서 속도와 파괴력에 온전히 집중했던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을 포착했다.
“포악함은 감추고, 기세는 예리하고 날카로워졌다...이걸 좋아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모를 일이군.”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이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에서는 호재였지만, 아직 베렌듀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팔검 유르힘으로서 씁쓸함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거지...”
아르벨라. 그 증오스러운 괴물에게 후계자 카이안과 팔검인 자신은 남겨두기 찝찝한 벌레일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토라는 집단과 유천이 더욱 강해져야 할 것이다.
“잡념은 여기까지...이러다 놓치겠군.”
짧은 사이 킬리언의 기척이 너무도 멀어졌다. 맡은 일이 있는 이상 더는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목적지는 유천의 개인 수련장인 석모도. 밀려나간 하늘 너머의 태양빛 아래. 유르힘의 신형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
둘이 바다를 달리고 달린 끝에 보이는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일단 수련장이 있던 곳부터 가보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섬. 유천의 흔적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보다는 가능성이 있을 터다.
유천의 수련장이 있는 곳은 석모도에서 가장 높은 곳. 킬리언과 유르힘은 수련장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의외로 이곳은 멀쩡하군요.”
이곳저곳 금이 간 모습은 결코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주면의 망가진 풍경과 비교하면 멀쩡한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그분이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닌 거 같습...”
조용.
“예?”
...조용히 해라.
“갑자기 무슨...”
유르힘이 의아함에 킬리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기 꺼내.
“적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문제지. 모르고 있다는 거. 나도 여기 와서 알아차렸지만.
입술을 깨물며 극도로 긴장한 채 등에서 검을 꺼내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유르힘은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앞을 봐라.
“여기 뭐가 있다는...”
킬리언의 말에 따라 눈을 돌린 유르힘의 입이 꾹 닫히고, 동공은 경악에 차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 여자와 그 무릎을 베고 누운 남자.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감은 채 잠든 유천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한 연인 사이와 같은 광경이었다.
한번 인식하자 명확히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그전에 어째서 이곳에 왔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
‘아니 알겠군...’
동물은 식물이 아니다.
순리 속의 역순(??). 세상의 큰 흐름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작은 하나하나의 흐름에는 반(反)하는 것이 동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다르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 손을 유천의 머리를 쓰다듬는 움직임은 하나같이 자연스러움의 극치
“...누구십니까...?”
무(?)가 몸에 배어 인위가 사라지고 세상과 동조한다는 경지. 카이안의 아버지이자 마지막 베렌듀크의 가주 카르딘 베렌듀크조차 닿지 못했다는, 반고에서는 그 신화적 경지에 경의를 담아 이렇게 부른다.
의념을 세상에 펼치는 걸 넘어, 스스로의 소우주를 세상 속에 담는 경지.
자연경(???).
도대체 그런 자가 어째서 유천과 함께 저렇게 다정한 모습을 한 채 있단 말인가?
“고민이야.”
아름다운 색기가 담긴 목소리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미인인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고귀한 물건 다루듯 유천의 머리를 땅에 눕히고 천천히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너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이유는 이 분이 살려두었기 때문이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헛소리하지 말고 그 남자를 풀고, 정체를 밝혀라.
“상황 판단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나? 마족. 위대한 군주의 후보 탈피자라고 해드려야 하나?”
“마족? 탈피자?”
여자의 비웃음 소리에 담긴 말에 유르힘이 킬리언을 돌아보자,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도대체 뭐”
“마나의 미묘한 비틀림은 졀대방위선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흔적이지. 너 같은 망령 따위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유르힘의 표정 또한 싸늘하게 경직되었다. 유르힘은 죽은 자가 아니다. 망령이라는 말은 일종의 비유를 의미할 터. 그렇다면 그 의미는 명확했다.
“...너...뭐냐...?”
멸망한 베렌듀크를 비꼬는 정체 모를 여자의 말에 존대를 멈춘 그의 어투에서는 정체를 들켰다는 경계와 그리운 가문을 무시한 것에 대한 분노가 깃들어있었다.
“내가 너희를 모를 리가 있겠어?”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눈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고 있는 여자. 예상한 대로 엄청난 미인이었지만, 유르힘에게 그 얼굴은 심장 다른 의미로 심장을 터질 것처럼 뛰게 하였다.
머리색도 윤곽도 미묘하게 달랐지만, 확실하다. 아니 저런 외모를 가진 저 정도의 강자가 중앙세계라고 해도 또 있을 리 없다.
“카르딘 베렌듀크가 생각보다 강해서 그때 너희를 놓쳤었는데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이름 모를 애송이 팔검.”
“아르벨라!!!!”
카르딘 베렌듀크는 카이안의 아버지이자, 베렌듀크 최후의 가주. 눈앞의 여자가 그분을 도륙한 자임을 확신한 유르힘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쌍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분들의 최후를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베렌듀크의 원수여!!!”
‘유르힘! 공자님을 대피시켜라!’
‘...네가 이제 베렌듀크의 일검이다. 카이안을 지켜주어라 유르힘.’
광활하고 아름다웠던 영지는 폐허가 되고, 카이안을 제외한 모든 핏줄이 죽었다. 마력과 불, 그리고 피로 온통 붉게 물든 광경 속, 가주 카르딘과 스승이자 상관인 베렌듀크 일검의 뒷모습과 유언은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쌍검을 기반으로 둔 클라우스 식은 속검 이전에 환검을 중심으로 둔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발끝은 바깥쪽으로 돌려, 좌수 검을 내미는 척 우수 검을 내지른다.
호흡과 흐름을 뒤집은 엇박자의 검이 아르벨라의 목으로 향했지만.
채앵!
“좋은 검이네.”
“크윽!”
아르벨라는 유르힘이 쥐고 있던 우수검을 아이 장난감 빼앗듯 빼앗고는 날을 손끝으로 훑었다.
“어떻게?!!”
“카트레나라면 모를까. 네 따위의 환검이 내 인지의 틈을 찌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크으...!! 닥쳐라!!”
순식간에 역수로 쥐어진 좌수검이 시야 밖에서 빛살처럼 아래에서 위로 그어진다.
그것을 그저 상체를 돌리고 손등으로 검날을 쳐내자, 훤히 드러나는 유르힘의 상체. 아르벨라는 오른발로 복부를 밀어내듯 걷어찼다.
퍼엉!
“커억!”
“나쁘지는 않지만 뻔하다.”
날아가 바위에 처박혀 피를 토해내는 유르힘을 보며 그렇게 평한 아르벨라는 눈만을 흘긋 돌려 옆을 쳐다봤다.
“이것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다. 건방진 탈피자야.”
아르벨라는 뒤에서 공기를 밀어내며 날아오는 주먹을 붙잡아 바닥에 엎어 쳤다.
콰아앙!
커헉!!
“벗어나는 걸 내가 허락해줄 거라 생각하나?”
아르벨라는 땅을 부수며 틀어박혀 막힌 숨을 뱉어내는 킬리언을 냉혹한 눈으로 쳐다봤다.
킬리언은 몸이 땅에 내쳐지는 순간 팔을 비틀어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르벨라의 이명은 무신.
킬리언의 기세가 괴수에서 점차 무인의 그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의도는 아르벨라의 눈에 훤히 보이는 수준이었다.
아르벨라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나는 킬리언과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는 유르힘을 보고는 잠든 유천의 곁에 돌아가 다소곳이 앉았다.
“너희를 죽이려면 진작 죽였어.”
킬리언과 유르힘이 하이랭커에 가까운 상위랭커였지만, 중앙세계 랭킹 5위라는 자리 앞에서는 그 빛이 바래진다.
“저 베렌듀크 애송이는 이해할 수 있지만, 너는 납득이 안 가. 왜 이 사람이 너를 곁에 두고 있었을까?”
처음 이곳에 그들이 왔을 때 저 여자가 유천을 보던 눈빛을 아르벨라는 예민한 오감으로 인지했다. 걱정과 동요. 그건 결코 얕은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 잘 아는가 보군...
“잘 알지. 너 따위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흥!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과분한 걸 바라지마라. 개 같은 마족년아. 내가 너를 못 죽일 거라 생각해서 그리 나대나?”
쿠구구구구궁...
아르벨라의 짜증에 동요하여 하늘 높이 치솟은 붉은 살의가 섬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냥 마족도 아니고 탈피자에게 모든 원한과 관계를 넘어서 그런 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무슨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인 줄 알아?”
......
탈피자는 외차원 종의 시조이자, 태어날 때부터 마왕의 격을 인정받는 군주 후보다. 외차원 최고의 VIP인 그녀가 이런 내차원에 있다는 건 위원회도, 외차원의 군주들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말은 즉 킬리언의 존재가 유천의 앞길에 막대한 걸림돌이 될 거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너를 살려둔 거는 이 사람에 대한 존중과 경의. 그것 하나뿐이야.”
유천의 안위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아르벨라가 큰 위협이 될 킬리언을 살려둔 거는 그의 판단을 본인 멋대로 결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를 도발하지 마. 마족년. 이건 내 마지막 인내야.”
위원회 제 1기사단장의 자리를 차지한 거는 그 명예와 권력이 필요해서도 있지만, 괴수들을 상대하는 선봉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있다.
그만큼 아르벨라에게 괴수의 존재는 그녀에게 혐오의 대상이다. 마족이 그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본류가 같은 이상 킬리언은 아르벨라의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르벨라라고 했던가? 그 이름 외차원에서도 들어봤었지...
부드럽게 유천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르벨라의 모습은 심히 거슬렸지만, 약자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았기에, 킬리언은 들끓는 마음을 추스르고 그녀의 맞은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앙세계에서 이름 높은 여자가 도대체 왜 이런 외곽차원에서 행패를 부린 건가?
“말했을 텐데? 기어오르지 말라고.”
얘기를 하자는 거다. 네가 거기 편히 자고 있는 그가 소중하듯 나에게도 소중하니까. 아니면 그가 일어났을 때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
틀린 말은 아니다. 아르벨라 본인의 과거 이야기에 빠져 유천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게 실수였다. 권능도 그렇고, 베렌듀크 그리고 마족까지. 그녀는 유천이 이 세상으로 오고 나서의 이야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눈앞의 이 보랏빛 눈을 한 은발 마족이라면, 유천과 가까워 보이는 이 여자라면 대강의 윤곽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유천님과 가까운 여자라...’
능력 있는 자라면 부인이든 남편이든 능력이 되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지고지순하게 순결만큼은 지켜온 아르벨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어쩔 수 없나?’
저 여자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거 하나만으로 아르벨라가 유천을 미워하기에는 지닌 마음의 깊이가 한없이 깊었다.
복잡한 자신의 마음과는 반대로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든 유천이 새삼 얄미웠지만, 아르벨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킬리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얘기나 한 번 해보도록 하지 마족...”
“누구 마음대로!!!”
그때 유르힘이 씩씩거리며 검을 쥔 채 비틀거리면서 걸어왔다.
“킬리언 거기서 일어나라!!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뭐 베렌듀크를 멸망시켰다고는 들어본 적 있지.
유르힘의 살기 섞인 울부짖음에도 킬리언은 여전히 심통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을 돌렸다.
허나 그게 뭔 상관이지?
“뭐, 뭐라고?!!”
약해서든, 운이 없어서든 나와 관계없는 자들이 죽었는데 내가 거기에 화를 낼 이유가 있느냐는 말이다.
“감히!!”
유천의 아래에서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너희는 그저 패배한 노예에 불과하다.
그가 아무리 헌신을 다했고, 유천이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킬리언은 그들과 자신들 사이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이...!! 망할 년이!!”
유르힘이 존대조차 버리고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들자, 킬리언이 상대하기 위해 엉덩이를 뗐지만, 아르벨라가 짜증을 한껏 담은 눈을 하고는 그 어깨를 붙잡아 누르고 일어났다.
“귀찮네...저놈부터 눕혀놓고...우리끼리 얘기하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