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예기치 못한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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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도 아니군...”
각성자협회 빌딩 옥상 회의실. 협회장 이만성은 유리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바다를 찢고 하늘을 꿰뚫으며 구름을 밀어내면서 솟아오른 황금빛 나무.
원근법을 무시한 크기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까지 느껴지는 광량을 내뿜는 나무가 쓰러져가는 광경은 중앙세계에서 많은 것을 보아온 이만성을 압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협회장님 의원님들과 관료분들의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그런가? 고생했군. 말 안 듣는 꼰대 놈들 상대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아닙니다.”
현재는 이만성의 호위이자 비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 그의 개인 사병과 다를 바 없는 전투 집단 카룬의 팀장.
철저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창밖의 초월적인 미지에 공포 서린 눈의 떨림은 막을 수 없었다.
“두려운가?”
“...죄송합니다.”
“아닐세. 당연한 것이니.”
오히려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자신의 곁에서 보조하는 자가 거짓을 입에 담았다는 것일 테니까.
“그대는 나가서 시민들을 통제해 주게나.”
“그럼...협회장님과 두 분은 어찌...”
“이쪽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예 그럼.”
“수고하시게.”
오랜 시간 이만성을 모셨던 그녀는 인자한 말투 속에서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단호함을 읽어내고는 순순히 물러나 회의장 문을 열고 나갔다.
“자...그럼...”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만성은 고개를 돌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창밖을 묵묵히 지켜보던 아름다운 두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DCD의 수장님과 수호길드의 장께서는 어찌하시겠소?”
한국과 미국 그리고 발토와 드라고니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협회 회의장에 모였던 엘리스 파셀, 양하연. 두 여인은 이만성의 물음에 생각한 바를 읊었다.
“일단 저는 지지부진하고 더러운 이야기가 끝나서 좋네요. 늙은 것들의 눈초리나 주둥이가 여간 역겨운 게 아니었으니까요.”
“확실히...미국이랑은 성격이 달랐지요오...?”
“어쩌겠소? 평화란 그런 것인데.”
“평화의 성질에 대해서는 저도 고려한 바가 있긴 하지만...그래도 우연과 행운의 산물이 마치 자신들이 대단해서 그렇다고 여기는 건 좀...짜증나더군요.”
드라고니아와 발토간의 관계를 고려하기 전에, 괴수와 각성자들의 등장 이후 끊긴 거나 다름없던 한미 간의 동맹은 단순히 협회 하나만의 의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힘의 역학이 어떻든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정부 고위관료와 국회의 도움은 필요했다.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은 결국 위기를 겪어보지 못했다는 증거. 우연과 행운이 맞물려 아슬아슬한 안정을 구가하고, 그 속에서 사리사욕을 탐하려고 하는 상층부들. 그것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실태였다.
양하연과 엘리스 파셀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역겨움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직접 무력행사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었고.
“뭐...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오...그런 자들은 천황국과 중화연맹에 한발 들이민 것으로 보이니 말이죠오...”
“시국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놈들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쳐내질 것들이니 발토의 장과 DCD의 수장께서는 염려 놓으시구려.”
그게 정치적일지 물리적일지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 그런데...”
“음?”
“왜 갑자기 존댓말이시죠? 회의가 파토난 이상 여긴 더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 말이죠. 말 놓으셔도 됩니다.”
“내 어찌 그러겠소?”
양하연의 이해가 안 된다는 말에 이만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장대하게 무너져 내리는 금빛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나라의 파멸과 부흥을 선택할 수 있는 남자가 있는 집단의 수장께 그럴 수는 없지 않겠소?”
“저것이 그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런 이적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중앙세계에서도 극히 드물지. 어떤 식으로든 그가 관여되어 있을 것이오.”
“확실히...대단하시긴 하셨죠오...”
“당신은 태연하게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엘리스 파셀.”
양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웃고 있는 엘리스를 노려봤다.
“멋대로 이 나라에 들어와 수호길드장인 저를 제외하고, 그를 만난 저의가 궁금하군요.”
“...그건 제가 온 게 아니라 그분이...”
“어찌 되었더라도 저를 배제하고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겠죠.”
엘리스 파셀이 양하연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비밀리에 입국해서까지 알아보고자 한 것은 그, 유천에 대한 것일 터.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제 나름의 기준이 있어서 말이죠오...”
“마음에는 드셨고?”
“예 충분하고도 한참 남았죠오...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 모든 걸 걸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요오...? 저라도 반고를 뒤에 두고 있는 세력을 적대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랍니다아...”
“무슨 대화를 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아쉽지만...비밀이라서요오...저와 그분 단 둘의.”
“...그 말 뭔가 굉장히 거슬리네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답니다아...?”
유천이 엘리스에게 양하연의 원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비밀로 돌린 이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도발적인 어투에 양하연의 표정은 점차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크흠! 놈들의 막연한 상상과는 다른 형태지만, 이 나라에 실질적인 평화가 드리운 건 사실이지.”
두 여자 사이의 분위기가 점차 격해지기 시작하자 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만성이 주의를 돌리고자, 나무 위쪽 희멀겋게 이 나라를 둘러싼 결계를 올려다봤다.
“뭐가 되었든 제가 그에게 불만을 가진 건 아니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하오. 대형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가 이 나라에 선물한 저런 부흥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겠소?”
“확실히...저런 건 들어보지 못했네요오...”
하늘을 뒤덮은 반투명한 원형 돔.
비정상적인 이적을 뿌리는 나무가 있음에도, 직접 희생을 겪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유는 한반도 내륙을 뒤덮은 저것이 모든 피해를 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저 정도의 마도기술이 있었을 줄이야...그분이 아니었더라도 함께 할 가치가 있는 나라였군요오...”
“뭘. 대단한 게 아니오.”
“저게 대단한 게 아니란 건가요오...?”
지금은 사그라졌지만, 저 나무가 한창 솟아났을 때만 해도 거대한 쓰나미를 동반한 화염 폭풍이 내륙 쪽으로 몰아쳤었다.
현재 미국의 기술로도 막을 수 없는 그런 격렬한 마나의 요동을 막아낸 결계가 대단하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엘리스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기술이 대단한 게 아니란 거예요.”
“그럼...?”
“저희 발토가 이 나라에 제공한 재료들이 그만큼 상위의 것들이라는 거랍니다. 당신에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요. 비.밀.이라서요.”
협회와 발토 간에 비밀로 제작한 방위결계 ‘헥사곤 타블릿’에 여러 값비싼 재료들이 들어갔지만, 그 중 두 가지.
번경의 거미가 지닌 핵, 그리고 결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팔만대장경은 감히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팔만대장경이 지켜야 할 피의 영역을 규정하고, 거울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미의 핵을 통해 그 영역을 차원으로부터 격리시킨다.
비록 팔만대장경에 깃든 의지가 없다면 펼쳐지지 않고, 또한 들어가는 에너지가 막대하다지만, 이런 외곽차원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차단결계. 그것을 고작 동맹관계의 상대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하더라도 복수하겠다는 듯 한껏 우쭐거리는 양하연의 표정은 반대로 엘리스의 기분을 분탕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싱글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중에 그분께 물어보도록 할게요오...”
“...그가 당신에게 전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슨 자신감이죠?”
“말해줄걸요오...? 저희는 운명공동체랍니다아...”
“......”
양하연은 순간 저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찢고 싶다는 충동을 뒷감당을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유천 그놈은 도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건지...’
두 여인의 2차 기 싸움을 보며 속으로 유천을 욕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점차 더워지는 실내공기가 기분 탓이 아님을 알아챈 이만성은 이러다 정말 치고받고 싸우겠다는 긴장감, 이 나이 먹고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서글픔을 노련하게 숨긴 채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허허! 언론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민심 수습은 꽤 난해하겠으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일로 발토의 존재의의를 확실히 부각시켰으니 좋은 일 아니겠소? 하연양. 엘리스양.”
“네...뭐.”
“그건 그렇지요오...”
발토가 한 일이 뭐가 있다느니, 인접국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할 때 어째서 머나먼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느니. 우리도 반고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자들과 거기에 이도 저도 아닌 자들까지.
그런 잡부들과 바깥의 시민들의 머리에 이번 일은 확실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발토가 한국을 지킬 능력이 있고, 적에 가까운 타국과 세력에 손을 뻗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먼 거리에 있는 강대한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이득이라는 걸.
떡고물을 과하게 받아먹은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발토와 그리고 발토가 동맹을 맺고자 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재고해 볼 것이고.
“그건 그렇고...협회장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도 될까요?”
“응? 왜 또 그러시오?”
“뭔가...예전과 다르게 이쪽을 대하는 태도가 적극적이신데...무슨 심경에 변화라도 있으신가요?”
발토가 처음 한국에 자리 잡을 때까지만 해도 이만성의 태도는 필요성을 인지했다는 것뿐. 이렇게 국가기관의 협회장 위치를 넘어 적극적으로 발토를 두둔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흐음...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지만...또 그렇다고 하기에는 별거 없지.”
“무슨 말이신가요?”
“알고 있던 걸 새삼 깨달았다는 거지. 황금새가 사멸한 그날에 말이오.”
초월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초월자가 이 나라를 자신의 세력으로 여기게끔 해야 한다. 중앙세계에서 거대 세력들의 입맛에 따라 멸망과 생존의 기로에 서서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다면.
“모든 게 한정된 세상에서 부국(?國)은 결국 타인의 것을 잡아먹어야 이룰 수 있는 것.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아니면 포식자가 원할 때 잡아먹히는 사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 편린만을 보았지만, 한국은 유천의 등장으로 여러 혼돈을 겪었다. 그러나 그 끝에 얻은 것 중 하나가 ‘헥사곤 타블릿’.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남는다면 이 나라는 운명을 ‘선택받는 자’가 아닌 ‘선택하는 자’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지기도 하였고 말이오...”
“은혜요? 아...!”
성령수 희석액.
유천이 이만성의 손녀가 아프다는 걸 알고는 내놓은 희대의 보물. 그 덕분에 태생적인 마력중독으로 병원 신세를 지던 그의 손녀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떠올리고는 엘리스에게로 눈을 힐끔 돌렸다.
“으으음...?”
뭔가 비밀로 하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눈을 가늘게 뜬 모습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조심해야겠어...’
성령수는 어지간한 아티팩트 이상으로 희소하고 고귀한 성물. 팔만대장경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입에 오르내리면 될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이만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흠흠...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소? 이 늙은이 낯이 뜨거우니.”
“흠...뭐 이렇게 숨기는 게 많으실까나아...?”
“허허!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릴 정보는 아니니 나중에 그에게 직접 물으시는 게 좋을 거 같소.”
“으음...네 뭐 그렇게 할게요오...”
눈을 예리하게 뜬 채 양하연과 이만성을 교차로 쳐다보던 엘리스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엘리스라 해도 그녀의 부하가 함부로 허락받지 않은 정보를 뿌린다면 모가지를 땄을 테니까.
“고맙구려. 그나저나 이제 대강 해결은 된 것 같은데...하연양?”
“예?”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소?”
극도의 열기에 대기가 날뛰는 것은 여전해 보였지만 금빛 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곧 괜찮아질 문제고, 원인에 대한 심증적 확신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협회와 수호길드로서 1%의 불안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네 그래서 이 일에 가장 적당한 인원 둘을 보냈어요.”
“음...누구를 보내셨는지 알 수 있겠소??”
“이번 일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최상위 무력을 지녔음과 동시에 정보획득 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게 가능한 자여야 해요.”
어지간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상위 랭커급 무력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발 빠르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 현재 발토의 가용인원 중 그걸 성립하는 건 단 둘이었다.
“대구에서 가만히 조직 관리에 힘쓰고 있는 남자와 이쪽에 싸움밖에 모르는 여자 둘을 보냈으니 안심할 수 있겠죠.”
“흐음...”
엘리스가 있기에 돌려서 말했지만, 그녀가 말하는 자 둘이 누구인지 파악한 이만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만성과 양하연은 몰랐다.
“확실히 그 둘이라면 괜찮겠구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악연과 혐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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